빗자루 그림과의 응시

양성옥 회화展   2004_0811 ▶ 2004_0817

양성옥_Sweep0402_8폭 병풍, 한지에 혼합재료_141×240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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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811_수요일_05:00pm

책임기획_김옥렬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별관 광화문갤러리 서울 종로구 도렴동 83번지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내 Tel. 02_399_1777

누구나 한번쯤은 청소를 하기 위해 접해 보았을 '빗자루'를 가지고 쓸거나 두드려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한 동기를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통제가 쉽지 않은 빗자루를 들고 어떻게 그림이 되게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은 양성옥의 빗자루 그림을 보고 싶게 하거나 확인하고 싶게 만든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그림은 붓으로 그려야 한다는 매우 상식적인 생각을 벗어나 마당을 쓸거나, 그것도 현대는 주거공간의 변화에 의해 청소기로 대체되어 거의 사라져 가는 빗자루를 들고 그림 그리기를 시도한 점은 우리의 상투적인 생각을 바꾸게 하는 그 어떤 변화의 계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가늘지만 딱딱하고 거친 대나무 빗자루는 부드럽고 정교한 붓과는 달리 어떤 이미지를 닮도록 재현하는 것에는 용이한 재료가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빗자루 그림은 재현보다는 행위의 과정을 수반한다. 그래서 양성옥의 쓸다(sweep)와 두드리다(knock) 시리즈는 이미지를 나타내는 방식이 그리기가 아닌, 행위과정 자체가 즉각적으로 흔적을 통해 화폭에 담겨진다는 점에서 퍼포먼스에 가깝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성옥의 빗자루 작업 중에는 가늘고 부드러운 붓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실감나는 이미지를 담아내고 있다. 그의 빗자루 작업은 붓으로 그려서 사물을 재현하는 대상의 묘사법이 아니라, 다만 거친 대나무 빗자루로 쓸거나 두드려 놓은 것이지만, 사실적인 그림보다 더 실감나는 어떤 시각적 효과를 부여하고 있다. 마치 탁본을 한 것 같은 그림이나, 프레스로 눌러 판화처럼 찍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그림은 프로타주를 한 것처럼 실제를 도드라지게 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하는 다양한 표현 기법들을 보면서 빗자루 그림의 매력에 흠뻑 취하기도 한다.

양성옥_Knock0402_한지에 혼합재료_81×151cm_2004
양성옥_Knock0403_한지에 혼합재료_77×141cm_2004

'두드리다' 시리즈 중에서 어떤 작품들에선 실제로 들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너무도 사실성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어 그의 빗자루 그림 앞에 서면 쓸쓸한 정취에 졌다가도 금새 내 속 어딘가에 있었던 강렬한 생명력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어떤 그림에서는 자연의 힘을 느끼게 하는 쓸쓸한 정취에 취하게 하다가도 또 어떤 그림에선 고양된 정신의 힘을 응시하게 하는 양성옥의 빗자루 그림은 사실적인 요소와 추상적인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 있어 보여지는 세계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시각도 열어 놓는다. 그래서 그의 빗자루 그림과의 응시는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듯 매우 직설적인 열정뿐만 아니라, 고요한 명상의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 빗자루를 들고 작업하는 것에 대해 작가 자신은 '내 삶의 욕망과 눈물 그리고 지나간 날들의 고통을 쓸어버리려는 마음으로 화폭 위를 혼신을 다해 쓸고 또 쓸기 위함'이라고 한 것처럼, 양성옥이 빗자루로 만들어 가는 화폭의 세계는 다만, 어떤 대상이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살면서 느꼈을 아픔과 시련을 두드리고 또 쓸어 내면서 다시 희망과 자유를 채우는 작업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 그렇기에 사람들의 성격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양성옥의 한바탕 빗자루 퍼포먼스가 남긴 흔적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적인 행위나 그림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좀 더 자유롭게 예술가 혹은 예술작품에 다가설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양성옥의 '빗자루 그림과의 응시'는 누구나 아는 것, 즉 보편적인 재료를 통해 아무나 할 수 없는 특수성을 이끌어 냄으로써 애달픈 삶과 예술에서 갈증을 느낄 때, 시원한 한 사발 물처럼 가슴을 채운다.

양성옥_Knock0403_한지에 혼합재료_76×282cm_2004
양성옥_Knock0403_한지에 혼합재료_192×133cm_2004

sweep & knock ● 양성옥의 '쓸다' 시리즈에서 보여 지는 것은 분명, 어떤 흔적들의 축적이다. 그 흔적은 다름 아닌 빗자루에 물감을 묻혀 화폭 위를 스치듯 지나간 흔적들이다. 바닥에 깔아 놓은 화폭 위를 묵묵히 쓸고 또 쓸어내고 남는 것은 무엇일까? 쓸고 또 쓸어 놓은 화폭에선 격렬하게 태풍이 휩쓸고 간 흔적 같은 것이 있는가 하면, 마치 소슬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 듯 스친 화폭에서는 쓸쓸함이 여기저기 묻어나 적막한 고요만이 감돌기도 한다. ● 통제가 쉽지 않은 빗자루를 들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기본적으로 어떤 이미지의 재현이 아닌 행위의 과정을 수반한다. 그런 점에서 양성옥의 '쓸다' 시리즈는 재현이든 추상이든 이미지를 나타내는 방식을 그림 그리기가 아닌, 쓸어 냄으로써 그려간다는 점이다. 그는 이런 빗자루 퍼포먼스를 통해서 행위의 과정을 담아냄으로써 육체 그 자체를 통하여 예술적 삶을 실행 해간다. ● 양성옥의 '쓸다' 시리즈는 다만 어떤 대상이나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살면서 느꼈을 아픔과 억압을 쓸어내고 희망과 자유를 담아 가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그의 작업은 아픈 흔적들을 비워내는 순간 다시 희망과 자유를 채워감으로써 과거와 미래라는 시ㆍ공간을 담는다. 그래서 양성옥의 빗자루 퍼포먼스인 '쓸다'는 어떠한 양식이나 이념을 넘어선 자신의 기질과 삶에서 반추된 명상이다. ● 또한 빗자루로 그림을 그리는 또 다른 방법을 통해 양성옥은 그 자신이 추구하는 명상과 희열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바닥에 펼쳐 놓은 화폭 위를 두드린다. 그 두드림을 통해 그가 열고 싶어하는 자유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는 화폭과 빗자루 그리고 그 자신이 뜨겁게 만나 하나가 되는 순간이 그 자신이 추구하는 자유와 평화가 펼쳐진 세계라고 말한다. 두드림을 통해 하나가된 세계는 두드리고 또 두드린 후에 경험했을 희열 후에 오는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자유로운 생명력으로 피어난다.

양성옥_Knock0406 시리즈 중 7_한지에 혼합재료_133×192cm_2004
양성옥_Knock0406 시리즈_한지에 혼합재료_133×192cm×10_2004

어쩌면 그는 스스로를 야초라 하듯, 그 자신이 화폭에 담으려는 것은 쓸어서 비우고 싶은 것이나 두드려서 열고 싶은 것 모두가 결국 자아로 귀결된다. 그가 대면하는 그 자신의 자아는 그 어떤 부정이나 비판이 아니라, 다만 존재하는 자아에 대한 응시와도 같은 것이다. 들풀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그는 들풀의 생명력을 통해 그 자신을 응시한다. ● 응시(凝視, gaze)는 사물이나 자연을 바라보며 그러한 외부의 것을 친숙하게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진리의 열쇠는 자신 안에 있기에 자기 응시를 통한 자기인식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철학자이자 마음의 스승인 크리슈나무르티에 의하면, "응시는 순간순간에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연습할 수 있는 습관적인 것이 아니다. 습관적으로 된 정신은 감수성이 부족하며, 또한 틀에 박힌 행위 속에서 움직이게 되는 정신은 둔감하고 완고하다. 이에 비해 응시는 유연성과 예민함을 요구한다. 응시는 자아의 활동으로부터의 해방과정이다. 응시가 점점 확대되어 감에 따라 모든 사고, 동기, 욕망의 추구와 같은 활동으로부터 더욱 더 자유로워진다. 응시는 자유를 의미하고 자유를 낳는 것이기 때문이다." (Jiddu Krishnamurti, 『자기로부터의 혁명 2부-대화편』, '응시에 대하여', 범우사) ● 그는 응시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이며, 우리의 일상생활의 단순한 진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보다 멀리 전진하려면 우리는 일상생활의 진리를 이해해야 하며 가까이 있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까운 곳을 이해하면 먼 것도 이해할 수 있으므로 가까운 것과 먼 것의 거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과 끝은 하나이기 때문에... ● 이처럼 양성옥의 '두드리다'는 자아를 발견하는 응시이다. 그래서 그는 특정한 담론이나 난해한 현대적 코드들로부터도 자유롭다. 그는 빗자루의 두드림을 통해 무겁고 번잡한 삶의 한 가운데서 명상을 하며 들풀도인을 만난다. 이리저리 바람 따라 흔들리는 들풀의 흔들림으로, 바람 따라 흐르고 흐르다 잠시 멈춘 깊은 침묵은 커다란 검은 점이 되어 마치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처소 같다. 수없이 두드리고 두드려 그가 만난 것은 생명의 응시이자 그가 그토록 열고 싶어했던 자유를 향한 문이다. ■ 김옥렬

Vol.20040814a | 양성옥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