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카드/Placard-과잉의 풍경

신석호 설치展   2004_0805 ▶ 2004_0817

신석호_끈질김 혹은 멍청함_프랑카드, 나무_320×75×75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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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805_목요일_06:00pm

작가와의 대화_2004_0813_금요일_04:00pm

대안공간 풀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21번지 B1 Tel. 02_735_4805

"습관적인 소비를 파괴와 죽음의 반향으로 만드는 여러 층위의 반복들 사이에서 작용할 수 있는 작은 차이들을 가려내야만 한다. 잔인성을 광기와 연결시키고 소비의 장막 아래에서 와글대는 정신분열증자의 수다를 발견하고 가장 야비한 전쟁의 비열한 파괴들 아래에서 훨씬 더한 소비를 발견한다."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 Placard는 사전적으로는 n. 1) 플래카드 2) 간판, 벽보, 게시 3) 포스터 (Poster) ; 삐라, 꼬리표, 명찰. vt. 1) ...에 간판을 (벽보를) 붙이다. 2) 간판으로 (벽보로) 알리다 (공시하다). 3) 게시하다, 간판모양으로 내걸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흔히 프랑카드, 플랭카드, 플래카드 등으로 불리는 그것들 중 프랑카드는 그것의 한국식 발음과 함께 그것들이 가진 날림의 이미지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어 보인다. ● 일회용 프랑카드로 도배된 거리의 이미지는 사실 한국사회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들과 닮아 있다. 소비사회의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광고와 디스플레이 패션쇼 대형 쇼핑몰 따위들이 대량의 상품들을 눈부시게 전시하고 소비를 유혹하는 한편에서 거리의 각종 간판들과 프랑카드들은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며 가장 표피적인 날것의 상태로 그것들의 욕망을 부추기고 있다. 자고나면 건설되고 자고나면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며 빠르게 움직이는 일상 속에서 이렇게 좀 과장되거나, 허풍스럽거나, 목소리 크거나, 시끄러운 날림의 이미지들은 비단 프랑카드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신석호_프랑카드 Document_섬유판에 실크프린트, 아크릴채색_800×110cm_2004

군산 나운동, 지곡동은 신개발 도시구역이다. 이곳은 어제의 논바닥 위에 오늘 고층의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미 들어선 아파트 단지와 상가들의 건너편으로 세 군데의 대형 결혼식장이 들어서 있으며, 그 너머에는 성업 중인 모텔들과 기묘한 양식으로 신축중인 모텔들이 어우러져 아주 부산하고 번잡스러운 풍경들을 그려내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거대한 성채와 같은 외관으로 신축중인 교회들이 서로 등을 맞대인 채 건축 중이고 그 곁에는 이미 들어선 예배당에서 찬송이 울려 퍼지고 있다. 그것들은 각자 오늘의 쾌락과 내일의 행복과 미래의 구원을 위해서 서로 서로 분주하다. 그리고 대체로 이곳의 모텔들의 건축양식은 이곳의 예식장의 건축양식과 닮아 있고 이곳의 예식장의 건축양식은 이곳의 교회들의 건축양식과 닮아 있다. ● 새로 들어서는 현대식 건물들과 상가들 거기에 들어붙는 간판들, 프랑카드들 그리고 그 곁의 기묘한 양식의 모텔들과 사원들 예식장들이 그려내는 이 과잉된 제스처의 절묘한 풍경들은 그 빤짝이고 소란스러운 외관과는 달리 왠지 부실하고 허하다. 그것들은 사실 실재로 존재하는 풍경이라는 점에서 실재이지만 그것들의 그려내는 이미지와 표현들은 나름대로 성장한 경제력과 더불어 발전한 미디어를 통해 모사된 현실의 허한 욕구를 채우기 위한 수다에 다름없어 보인다. 70년대 이후 성장한 한국 경제의 물질적 수준은 이제 현대식 아파트에서 거주하며 세계 일등기업을 꿈꾸는 삼성 텔레비전을 보면서 그 미디어에서 모사하는 최선의 삶을 그리며 웰빙을 노래하고 있지만, 그것의 실제는 사진 찍으러 미국가지 않겠다던 대통령이 국익을 위해 파병원칙을 고수하겠다는 얘기만큼이나 허약해 보인다.

신석호_끈질김 혹은 멍청함_310×115×115cm(앞), 320×75×75cm(뒤)_2004
신석호_행복의 집Ⅰ_박스_120×100×75cm_2004

사실 이 모든 과장과 허풍과 억지의 정경들을 양산하는 의식의 배후에는 한국사회의 막가파식 생존이데올로기가 자리하고 있어 보인다. '사는게 우선이고 살아남는 놈이 강한 것' 이라는 한국의 산업 근대화 과정에서 구축해온 한국식 생존 이데올로기는 현재에도 여전히 막강하여 그 앞에 가기만 하면 다른 모든 가치들은 그저 하나의 얘기에 불과 해진다. 이 생존이데올로기는 살거나 죽거나 양단간의 입장 속에서 무한의 경쟁과 대결로 치달아 결국 하나가 죽던지 아니면 같이 공멸 할 때까지 목소리를 키우게 되는데, 혹자들은 이를 매우 열정적이란 평가도 하긴 하지만, 그것들은 매우 끈질기거나 혹은 멍청하다. 멍청해서 불쌍해진다. 이 맹목적 생존 이데올로기의 맹목적인 무데뽀 열정은 사업도 정치도 사랑도 예술도 무엇도 예외가 없어, 그에 대고 왜 그럴까 라는 질문들을 하는 것은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이다. 오늘도 거리의 간판들과 프랑카드들은 더 많은 소비와 더 많은 축적을 위해 더 크고 더 요란스럽게 나붙고 있고, 그것들이 나붙는 거리의 안 밖으로 왁자한 소란들이 배회하고 있지만 그것들의 과도함은 오히려 날림과 결핍의 이미지로 다가오고 그것들 위로 다른 죽음의 이미지가 겹치면서 떠오른다.

신석호_프랑카드/Placard_프랑카드_315×720cm_2004
신석호_프랑카드/Placard-과잉의 풍경展_대안공간 풀_2004

전시장의 프랑카드는 거리의 재현 같은 것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것들을 낱낱이 발가벗겨 걸어놓을 생각이다. 프랑카드의 사원, 프랑카드의 모텔, 프랑카드의 예식장, 프랑카드의 욕망, 프랑카드의 유혹, 프랑카드의 좌절, 프랑카드의 무덤... 프랑카드의 유희. 바람에 살랑 살랑 춤추고 노는 프랑카드들의 유희... ● 그런데 말을 하다보니 지금 어쩐지 내말이 거리의 간판들을 닮아 있어 소란스럽다. 내 말이 소란스러운 것은 지난 내 삶이 거리의 간판들 같이 소란스러웠고 살아온 날들이 부실해서 그랬던 것인들 내가나를 어찌할 것인가. 고백을 하자면 이 과잉의 풍경은 거리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 삶 안에도 켜켜이 묻어 있어 나를 갉아먹어 왔다. 고백이라고 하니까 언젠가 했던 고백이 생각나고 나는 고백밖에 할 줄 모르는 놈 같아 무참하고 비참하기 그지없다. 삶이란 대저 그런 것이라고 자위도 해보지만 누구 말대로 이 날뛰는 세상에서 대책 없이 살다가 거덜난 삶이란 대놓고 고백밖에 더 할 수가 없는 나는 의식의 노출증 환자이고 정신의 나체주의자이다. 그렇다고 한들 그것보다 더한 삶과 좀 덜한 삶에 또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인가.

신석호_죽은 놈, 산 놈, 죽어서 살은 놈, 죽어서 죽은 놈_캔버스에 프랑카드_53×45.5cm×2_2004

오늘도 이 도시의 한 켠은 부산하고 요란하고 시끄럽다. 도시가 요란하고 시끄러운 것은 비단 이 도시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 도시의 그 부산한 거리를 조금만 벗어나면 키 작은 집들 사이로 애달 캐달 삶들이 묻어있고 거기에서 조금만 가면 바다가 있고 조금 더 가면 산과 들이 있고 그리고 조금 더 가면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 사물이 문득 더 잘 보이게 하는 강이 흐르고 있어 좋지만, 강은 강대로 흐르고 나는 나대로 서있다. ■ 신석호

Vol.20040805b | 신석호 설치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