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지

전영리 회화展   2004_0804 ▶ 2004_0810

전영리_Time to change_혼합재료_65×56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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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804_수요일_05:30pm

경인미술관 서울 종로구 관훈동 30-1번지 제2전시실 Tel. 02_733_4448

전영리의 딱지, 반복과 변화의 공간 ● 전영리는 딱지를 그리는 작가이다. 종이의 네 귀퉁이를 꼬깃꼬깃 접으면 제법 근사한 형태로 완성되던 딱지와 딱지치기에 얽힌 유년기의 기억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기억들이 작가로 하여금 딱지라는 특별한 소재에 관심을 갖게 했던 것일까? 그러나 정작 그의 작업을 보면, 딱지의 모티프에서 애초에 연상되었던 유희적인 속성보다는 딱지 형태 자체가 가지고 있는 반복적인 패턴에 대한 관심이 강하게 발견된다. 왜 하필 딱지냐고 묻는 질문에 작가는 종이를 접어 딱지를 만들어 보았을 때 네 귀퉁이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좋았다고 말한다. 무언가 하나의 공간 속에서 완결되는 구조, 그리고 그 구조를 스스로 만들어서 완성시키는 행위가 가져다주는 완결감. 전영리의 작품에서 반복적이고 균일한 패턴들이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그의 관심이 이처럼 다분히 딱지의 구조적이고 형태적인 측면에서 비롯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처음에는 실제로 접은 종이 딱지를 부착하는 것으로 시작된 일련의 딱지 작업들은 점차 딱지의 모양을 직접 그리는 방식으로 변화되어갔고, 최근작들에서는 딱지 접기의 반복적인 행위를 연상시키는 기하학적인 딱지의 패턴들을 규칙적으로 그리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딱지의 형태는 사각의 그리드 안에 네 개로 분할된 삼각형들로 구성되는데, 작가는 올오버(all over)의 패턴으로 구성된 이 네 개의 삼각형을 규칙적인 네 가지 톤의 색조로 채워나간다. 전영리의 작업을 보면서 나는 이처럼 최소한의 구성과 색조를 설정하는 일련의 규칙을 고수하면서 다양하고 즉발적인 표현들을 스스로 억제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전영리_Dakji Grande-Ⅰ_장지_76×76cm_2003 전영리_Dakji Grande-Ⅱ_장지_76×76cm_2003
전영리_Dakji_화선지에 먹, 아교_49×33cm_2002 전영리_Dakji_화선지에 먹, 아교_67×41.5cm_2002

이에 대해 작가는 "허구적인 상상력과 은유를 배제시켜 순수한 반복으로 이루어진 화면을 표현해보고 싶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전영리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기하학적 이미지의 단순한 배열과 반복은 마치 텍스타일 디자인과도 같은 효과를 주면서, 패턴이라는 시각적 요소 외의 일체의 다른 의미를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화면 속에서 장식적인 공예의 패턴과 구분되는 자연적인 풍경의 요소가 읽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자연성을 획득하게 해주는 것은 균일한 패턴들 사이를 미묘한 농담의 차이로 채우고 있는 색조들이다. 그의 작품에서 색채면들은 매우 건조한 중국의 공비화 종이 위에 천연 안료로 칠해짐으로써 마치 프레스코 벽화와도 같이 공간 위에 긴밀하게 밀착된 표면효과를 보여준다. 더욱이 각각의 색채면들은 각기 미묘한 명도와 채도의 차이를 통해서 색조의 변화를 드러냄으로써 마치 빛이 반사된 모자이크 색유리나 크리스털 결정체와도 같이 각도에 따라 투명하게 빛나는 듯한 옵티칼 일루젼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효과는 평면 위에서 면들이 연속적으로 반짝이며 이동하는 듯한 시각적 리듬을 부여해줌으로써, 빛나는 작은 면들의 움직임이 화면을 넘어 끝없이 확장될 듯한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측면은 전영리의 작업을 형성하는 주요한 동기가 단순히 단위들의 반복을 통해 빈틈없이 짜여진 패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규칙적인 패턴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중성적이고 기하학적인 유니트 위에 마치 호흡과도 같이 자연스럽고 미묘하게 흔들리는 변화를 부여해줌으로써, 최소한의 조형요소들을 통해 펼쳐지는 다양함과 풍성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전영리_Love_화선지에 채색_90×61cm×2_2003
전영리_In my dakji case_화선지에 채색_53×45.5cm_2004 전영리_Dakji Box_화선지에 채색, 석회가루_33.5×24cm_2004

전영리_딱지를 찾아서_90×60cm_2002

이러한 태도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규칙성과 다양성, 일관적 법칙들과 우연적 요소들 사이에서의 균형을 포착하려는 작가의 의지이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데 무려 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그의 작업은 공간을 동일한 면들로 채워 나가야하는 매우 지루한 노동을 수반한다. 전영리는 이처럼 균질하고 고집스러운 반복을 통해서 다양하고 폭넓은 변화를 표현하고자하는 역설적인 어법을 택하고 있다. 그로 하여금 이처럼 집요하리 만치 반복과 변화 사이의 균형 상태를 포착하게끔 만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이 다국적인 문화를 경험해야만 했던 작가 특유의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공간을 구획하고 확장시켜나가는 작업 과정을 통해서 그는 가능한 한 외적 변화가 없는 규칙적인 환경을 스스로 창조하고, 그 규칙성 속에서 스스로 관조해낼 수 있는 작지만 섬세한 변화들을 포착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전영리의 작업에 나타나는 딱지들은 결국 변화무쌍한 세계 속에서 그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붙잡고자 하는 심리적이고 자의식적인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영리_Dakji_목탄, 연필, 콘테, 먹_95×136cm_2002
전영리_Dakji_화선지에 먹, 아교_41.5×33.5cm_2002

최근의 딱지 그림들을 통해 전영리는 자신의 기억에 관련된 어떠한 분위기들을 표현하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Love」, 「Blossom」, 「Childhood」와 같은 제목들은 딱지 공간들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그 자신만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암시해준다. 그의 새로운 작업들 중 나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딱지 패턴이 반복된 푸른 화면 속에 노란 별이 가로 놓여져 있는 작품이었다. 별을 보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그렸다는 이 작품에는 밤하늘처럼 빛나는 짙푸른 색면들로 이루어진 패턴들 속에 마치 퍼즐처럼 커다란 별이 그려져 있었고, 그 위에는 엉뚱하게도 'Wow!'라는 감탄사가 새겨져 있었다. 작가의 장난스럽고 천진스러운 일면을 엿보게 하는 이 작업에서 나는 그가 습득했던 복합적이고 다문화적인 경험들, 하나의 규칙 안에 수용되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이 경험들이 앞으로의 작업에 신선함을 더하는 예측불허의 에너지로 작용하리라는 가능성을 읽을 수 있었다. 딱지 공간의 고집스러운 규칙성을 아직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깨고 들어온 이 에너지가 앞으로의 작업 속에서 더욱 독특하고 역동적인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나갈 것을 기대해본다. ■ 이은주

Vol.20040804a | 전영리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