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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724_토요일_03:30pm
작가와의 만남_2004_0724_토요일_03:30pm 질의_김성배_정재훈 / 진행_우무길
소나무S 갤러리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계륵리 232-8번지 Tel. 031_673_0904
숨·쉼전을 준비하며 ● 올 초 소나무s갤러리 전원길 관장으로부터 "현대미술하고 놀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개인전을 제의 받고, 그동안 지속적으로 관심 가져온 인간과 자연의 생태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숨, 쉼"이라는 주제로 현장성을 살려 작업을 진행하여 왔다. ● 4월말경 소나무 넓은 뜰에 느티나무를 심는 일을 시작으로, 벌목되어 버려진 느티나무와 벗나무 가지들을 조립하여 앉아서 쉴 수 있는 침상과 인간의 형상을 만들고 심어놓은 느티나무 아래에 설치하여 작품과 함께 쉴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게 된다. 관람자가 직접 또 하나의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 나가도록 재료와 도구를 준비해 둘 것이다. 또한,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연못을 살리기 위해 수련, 부레옥잠, 물망초 등을 키워 오픈날 관람자들과 함께 연못에 띄워주고, 가져다 키울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 느티나무는 전시가 끝나도 깊이 뿌리를 내리며 주변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울 것이고, 베어진 나무로 만든 인간의 형상은 썩고, 곰팡이 피고 버섯도 생기면서 사그러 없어 질 것이다. ● 번식된 수련, 부레옥잠, 물망초는 여러 사람들의 손에 의해 퍼져나가 오염된 물과 공기를 정화해 가리라 기대한다. ● 실내공간에는 브론즈로 제작된 39점의 소품들 - 돌과 나무 위에 어우러진 인간의 형상으로 자연속에서 내가 느껴왔던 공포, 경외심, 반성, 고뇌, 명상, 해탈, 하나됨 등 감정들의 표현 - 이 전시된다. ■ 이윤숙
이윤숙의 범자연주의적 휴머니즘 ● 조각가 이윤숙은 가끔 만날 때마다 농사짓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고 말하곤 한다. 농사에 관한 한 작가는 좋은 의미에서의 딜레땅티즘으로 충만해 있는 것 같다. 재미로 농사를 한다면 전업 농군은 아니다. 전업 농군이 농사의 재미를 말하는 것을 본 일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동안 보여온 작업의 에너지와 열정을 감안할 때, 정말 예상 밖으로 농사일에 전념해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닌 게 아니라 작가만큼 자연에 애착을 가진 작가도 그리 흔치 않으니 말이다. 더욱이 작가의 작업 기조(基調)가 주로 생태론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그 말은 곧 자신의 일상에 대한 우연적인 언급이 아닐 수도 있다. 자신의 작업 전체를 시사하는 진지한 미학적 고백의 진술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십 수년 전부터 화성 봉담에 터를 잡아 전원생활을 해온 작가는 자신의 조각 작업과 농사일을 하나의 근본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간주해 온 듯하다. 아니 더 근본적으로는 조각에 생태적 문제를 담아 오면서, 자연스럽게 범자연적 휴머니즘이 창작의 모토가 되었던 것이리라. (작가의 개인 홈페이지 표지에 열심히 농사일에 몰입해 있는 모습의 사진이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그것은 단순한 농업적 생산의 행위가 아니라, 어떤 성찰과 깨달음에 몰두할 수 있는 하나의 구도적 과정으로 설명되고 있는 듯하다.)
은둔자와 같은 전원생활을 한다 하여 작가가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거나, 폐쇄된 자의식만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생활 속에서 체험으로 주어진 것들을 여과 없이 그대로 작업으로 만개(滿開)시켜 가면서도, 많은 작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지역사회의 현안에 대한 연구와 계몽 등의 활동을 부단히 병행해 왔던 터이다. 실제로 그의 작업실은 지역 작가들이 모이는 하나의 기지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결과로 수원 지역의 많은 작가들이 오랫동안 보여온 독특한 특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언가 끈끈하게 결속되어 생명과 환경, 역사와 전통, 삶과 예술 등의 다양한 과제와 명제를 놓고 치열하게 움직여 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10년 넘게 지속되면서 수원지역의 미술은 서울의 주변이 아니라, 서울과는 또 다른 독자성을 가진 하나의 미술문화를 일구고 수원 고유의 전통으로 정착시켜 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움직임들 속에 작가가 중심적 역할을 해 왔다는 점에 이견이 없는 듯하다. ● 작가는 조각가로서 매스와 전통적인 고형(固形) 재료를 통한 조각을 해오면서도 필요에 따라 다양한 연출을 선보이기도 한다. 그 연출은 전시장 내부만이 아니라 발길이 닫는 자연 모두가 대상이다. 직접 산에서 수거한 폐목들을 활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산 속 현장에 이벤트 연출을 하는 등의 다양한 작업이 그것이다. 요컨대 작가의 작업은 곧 생활이며, 자신의 생각이자 신앙이며, 가장 가치 있는 발언이자 사회적 참여의 행위이다. 생활에 기초한 예술은 근본적으로 작품에서의 유기적 생명력과 유연한 미의식을 가능케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작가의 경우도 조각에 대한 교조적인 신념에 빠져 있다거나, 혹은 기성의 것에 대해 해체적인 태도를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없다. 유연하고 신축적인 조형에 대한 입장, 그것은 비단 작품 형식의 문제만이 아닌 관객과의 관계에서도 잘 나타난다.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작품의 과정이나 작품의 의도에 참여하게 하는 미학적 전략을 생략한 적이 거의 없다.
특히 '숨쉼'이라는 주제를 가진 이번 전시에서 선보일 이벤트는 이러한 유형의 입체적인 연출의 종합편 과도 같다. 전시장 옥외에 나무토막들로 만들어진 인체 좌상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나무토막들을 쌓아두고 관객들이 스스로 조형에 참여하는 이벤트를 갖게 된다. 관객들이 작업에 스스로 참여케 하고 아울러 재미를 느끼게 하는 이벤트로서 현대미술이 고답적이고 현학적인 관념의 놀이가 아니라, 이렇게 참여하고 스스로 제작함으로써 흥미와 보람을 갖게 하는 이벤트인 것이다. (완성된 작품은 그대로 있다가 부패하게 되고 버섯과 곰팡이가 자리하게 될 것이다. 자연적 엔트로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작품의 물성 스스로가 무언가를 말하게 된다. 자연이 스스로 자연 되게 하는 '숨쉼'의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작업의 반은 작가가 맡고, 나머지 부분은 관객이 완성해감으로써 오늘의 동시대 미술은 관객의 주체적 참여라는 명제와 의도를 자연스럽게 인식케 한다. 또한 연못에 관객들이 부레옥잠을 하나씩 띄워주는 이벤트 역시 관객의 참여가 바로 자연의 완성이자 작품의 완성임을 자연스럽게 환기시켜 준다. 물론 여기서도 자연과 인간의 하나됨을 권유하는 금언적 서곡을 직접 육성으로 노래하는 의미가 간과될 수 없는 일이다. ● 근작들 가운데 비교적 조그만 브론즈 소품들이 있다. 돌의 형상, 나무 형상 등 다양한 이미지의 매스 위에 한결같이 인간의 모습이 결합되어 있다. 그 인간의 모습들은 투박하게 빚은 인간의 좌상들이나 손 이미지들이 많다. 고뇌하거나 사색하는 인간의 모습들이 나름대로 의미를 갖고 있겠지만 작가의 의도는 그 아래에 있는 이미지의 매스와의 관계에 더 역점을 두고 있는 듯하다. 양식적으로는 마그리트 그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데페이즈망과 같은 결합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질적인 양자의 결합은 의미의 시너지를 예상시켜주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오랜 기호론을 대입시켜서 본다면 이질적 양자의 근원적 동일성이라는 세계관을 시사하는 문맥을 떠올릴 수도 있다. 작가가 어느 쪽에 역점을 두고 있다 하더라도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리라.
15년 가까이 작가를 지켜본 필자의 눈에 그는 무엇보다 가공할 에너지의 소유자라는 점이 먼저 떠올려진다. 그 에너지는 순간적인 폭발력보다는 은근하고 진득하게 지펴진 군불처럼 나타난다. 말로 잘 표현을 하지 않는 성품 때문에 마주 할 때는 그러한 에너지를 잘 느끼지 못하지만, 그의 작업실에 발을 디디기만 하면 직감적으로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 사실 오늘의 우리 조각이 지나치게 모뉴먼트에만 치중하고 있어 내용 있는 전시나 발표를 볼 기회가 많지 않다. 바로 이러한 전시활동의 양적 감소가 반드시 작업의 질과 연관된다고 믿는 것은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조각만이 우리 미술문화 현장에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는 것은 사실이다. ● 이러한 조각의 풍토에서 작가가 거의 20여 년 동안 아홉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는 것은 평가할 만한 일이라 본다. 우리 화단엔 경력 쌓기의 일환으로 의례적인 전시의 수량을 늘려 가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작가가 그런 취지에서 전시를 하는 것이었다면 작가가 굳이 수원이라는 지역에 연연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수원은 자신의 삶의 터이자 지켜나가야 할 약속의 땅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작가 입장에서 스스로 자기 반성의 순리를 거스르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았을 터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작가의 전시활동 역시 작가의 삶과 밀접한 것이다. 자신의 삶을 진지하고 의미 있게 영위해 가는 한 생활인으로서의 작업이기에 더 큰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작가에게는 작품을 하는 행위와 그것을 보여주는 행위야말로 하나의 연못을 정화시키기 위해 행하는 이벤트와도 같다. 작가는 어느 사이 우리 사회의 진정한 교사이자 치료사의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을 이제야 알 것 같다. ■ 이재언
Vol.20040724a | 이윤숙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