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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721_수요일_05:00pm
촬영_김창겸_김지현 / 조명_여현정 / 편집_김지현 / 분장_여현정 / 의상_여현정 / 사진_목진우 현장사진_정종배 / 메이킹 필름_김익진_정다운 / 디자인_김지현
「I Am Ready!」퍼포머_김정민_정민호_김현식_김광규_오형권_채민석_서경원_이상욱 「탱고」퍼포머_조원철_김지현 / 「댄서의 순정」퍼포머_김지현
인사미술공간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02_760_4722
환상의 삼원법(三遠法) ● 이미지의 홍수 속에 사는 우리 세대의 눈에 사뭇 낯익은, 세련되고 유머에 넘치는 장면들이 흐르고 또 반전(反轉)하는 김지현의 작업에는 우선 경쾌함과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영상의 재미가 돋보인다. 그러나 그 포장을 벗겨보면, 그 속에는 다양한 문화적 코드와 이미지생산/소비시대의 허구와 환상의 껍질을 도려내고, 그것을 또 다른 문맥으로 가공하고 있는 작가를 발견하게된다. 좀 더 무거운 톤으로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문화적 '시선'과 그에 동반된 '의식'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된다. 즉 카메라를 통하여 보고 보여지는 관계의 문제를 '시선'에 관한 것이라고 본다면, 그것을 자르고 편집하여 새로운 리얼리티로 가공해 내는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역시 우리의 '의식'인 것이다. 김지현에게 있어 경쾌함과 유머는, 말하자면 일종의 당의정(糖衣錠)과 같은 것이다.
먼저, 「I am ready」를 보면 8개의 스크린을 각각 점유하고 있는 8명의 남자는 누군가를 위한 '공적인 연기'를 시작하기 앞서 표정을 가다듬고 있다. 그들은 사적인 공간/시간에서 헛기침, 트림, 코훌쩍임, 기침 등 다양한 동작을 계속하고, 그러는 동안 어느 듯 '공연'은 이미 시작된 듯도 하다. 작가는 이 동작들 사이에 리듬을 부여하고 하모니를 만듬으로써, 이 '시선의 권력'에 대한 비판의 날을 감추어 버린다. 그러나 서로 보고 보여지는 자신을 의식하고, 그것들 사이에서 착종(錯綜)하는 인간적 관계는 여전히 남는다. ● 누군가가 말했듯이, 인간은 타자(他者)의 시선과의 관계에서 존재한다. 또 나의 신체를 지각하는 것은 그것을 '보여지는 것'으로, 즉 '타인을 위한 것'으로 지각하는 것이며, 나의 신체의 일부가 어떤 성격을 가지는 것도 실제로는 누군가가 그것을 그렇게 바라보기 때문인 것이다. ● 그리고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보여지고 있음을 느꼈을 때, 우리는 그 '시선'의 깊이를 향하여 의식을 개입시킨다. (이렇게 말하면 어쩐지 메를로 퐁티(Merleau-ponty)의 이론과 닮은 듯도 하다) 그러므로 '연기(演技)'는 독자적인 자기의식에 의해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을 전제로, 그리고 자기에 대한 상상적 의식에 의해 유지되는 변증법적인 역동성에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프레임너머의 가상공간과, 모니터나 스크린 사이의 (실제)공간과 가상공간의 리얼리티가 교차하면서, 재처리되고 새로운 의식이 구체화되는 제3의 공간, 즉 인터스페이스(inter-space)는 이와 같은 프로세스를 드러내기에 매우 적합한 수단이다. 지난 5월의 '충돌과 흐름'전(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옛)감방의 감시창에 「댄서의 순정」이 셋팅되었을 때, 그것은 그야말로 '수술대 위의 우산과 재봉틀'처럼 기묘한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었다. 붉은 색 의상을 한 작가자신의 천연덕스런 '연기'와 노래는 역사적 현장의 강렬한 기억 및 아우라와 충돌하며 초현실적인 여운을 발산한다. 그런가 하면 그 연기는 아래쪽의 조그만 스크린에 나오는 맨발의 (전혀 가장되지 않은) 퍼포먼스와도 대조를 이루며 좀더 복잡한 구성이 되고, 결국에는 그것을 거꾸로 재생한 '시간의 역전(逆轉)'을 통하여 그 '여성'의 존재는 마치 바람이 빠져 가는 풍선처럼, 꺼져 가는 꿈, 아니면 환영처럼 기이한 여운을 남기며 페이드 아웃된다. 전체적으로 이 영상은 붉은 색 무대의상을 두른 여인의 과장된 교태처럼, 또 이처럼 부유하는 이미지의 세계와 함께, 그 형무소 감방에 배어있는 역사적 (혹은 한국인들의 집단적) 기억의 유동성을 드러내는 듯 하다.
마지막 작품 「탱고」에서 김지현은 내면적 경험으로서의 환상과 현실의 관계에 시선을 돌리고 있다. 두 사람이 한 팀이 되어, 주로 남자가 리드해야 하는 탱고라는 춤은 남성우월적 권력을 잘 드러낸다고 한다. 또 페미니즘이야기인가? 싶지만 그렇지 않다. 작가는 그 리듬과 규칙 속에 몰입하면서 경험하는 환상과, 춤이 끝났을 때 되돌아보게 되는 현실의 차이, 어찌 보면 흔할 법도 한 심리적 체험을, 인터스페이스에서, 매우 사실적인 원근법을 동원하여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관객은 두 개의 스크린 사이에 서서 각각의 스크린에 격리된 채로 춤추고 있는 두 사람을 보게 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춤은 정확하게 동기화(synchronized)되어 있고, 동작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공간적 이동에 따라 동시에 스케일이 바뀐다. 즉 두 사람은 하나가 되어 춤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관객은 도대체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작가는 그 '황홀한' 춤을 '3분간의 섹스'에 비유한다. 그리고 춤이 끝나는 순간, 상대편의 남성은 사라지고 양쪽 스크린에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서 있는 본인만 남게 된다. 물론 관객도 이 순간에 그 '환상'이 걷힌 두 개의 스크린 사이에 남겨진다. 춤은 물론 지극히 육체적인 작업이지만, 그곳에 동원되는 시선과 의식 그리고 환상은 뇌(腦)의 영역이다. 이처럼 뇌와 몸, 가상과 현실이 교차하면서 새롭게 인식되는 '현실'을 (위에서와 마찬가지 어법으로) '인터리얼리티'(inter-reality)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김지현은 그 환상이 투영된 종이를 조심스럽게 두 겹으로 나누고, 그 간격사이로 관객을 밀어 넣는다. 여기서 우리는 영상예술의 역사에서 자르고(cutting), 붙이는(montage) 공정이 새로운 시선, 새로운 의식 그리고 새로운 리얼리티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며, 이러한 공정이야말로 참으로 디지털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꾸쇼(Edmond Couchot)는 디지털영상을 '불연속적이고, 수치에 의해 결정된, 완전히 제어 가능한, 일정수의 요소에 의해 구성된 영상'이라고 정의한 바 있으나, 원래 연속적인 상태의 것을 제어가능한 단위로 분리하는 것이 디지털화(digitizing)이기 때문이다. ● 이 세 작품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환상에 대한 삼원법(三遠法, 혹은 triadic approach)이라고 할 만하다. 어느 작품이 각각 '고원'(高遠), '평원'(平遠), '심원'(深遠)에 대입될 수 있을 지에 대한 고민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산수화에서 그려졌던 그 '자연'을 실제의 자연이라 말하기 어렵듯이, 김지현이 그려내고 있는 환상도 결코 자연은 아닌 것이다. 모든 것은 뇌의 문제이다. ■ 이원곤
Vol.20040722a | 김지현 영상설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