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4_0630_수요일_05:00pm
인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2층 Tel. 02_736_1020
야만의 시대에 바치는 제의(祭儀) ● 1. 단단한 근육질의 남자가 있다. 등판과 프로필, 그리고 정면의 포지션을 각각 취하고 있는 남자. 이는 마치 취조 과정에서의 신상을 기록하기 위한 범죄인의 초상 사진을 연상시키지만, 정작 그림에는 얼굴이 빠져 있다. 얼굴이야말로 공공연한 사회학적 기호, 개인을 담보해주는 지표임을 생각할 때, 얼굴이 지워진 작가의 그림은 신상 사진으로는 전혀 소용이 없다. 대신, 얼굴과 함께 하반신이 잘려나간 채 마치 클로즈업된 사진처럼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남자의 근육질의 몸이 해부학적인 세부를 손에 잡힐 듯 드러내 보여준다. ● 그러나 정재석의 그림에 나타난 어떤 전형이랄 수 있는 남자의 몸 덩어리, 남자의 등판, 그리고 남자의 뒷모습은 단순한 해부학을 위한 규범이 아니다. 마치 단단한 바위나 골이 패인 대지처럼 화면을 압도하며 버티고 서 있는 근육질의 몸은 차라리 넘을 수 없는 벽, 타협을 모르는 고집, 회유할 수 없는 결의를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이는 세상으로부터의 일정한 거리 두기와 외면(그 자체 수동적이기보다는, 타협을 거부하는 능동적 계기인), 그리고 자기 반성적인 계기에 그 맥이 닿아 있다.
얼굴이 없다는 것은 거세된 욕망과 좌절을, 그리고 익명적 주체를 암시한다. 따라서 그 남자의 몸은 작가 자신의 몸이며, 우리 모두의 몸이다. 주체, 자아, 에고, 그리고 나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호명되는 그 몸은 나의 몸이며, 타자의 몸이기도 하다. 나의 몸은 타자와의 긴밀한 교류와 영향사의 편린들로써 축조돼 있고, 그 몸 위에는 타자가 남긴 선명한 상처가 새겨져있다. 정재석의 그림에 나타난 마치 누더기를 기워 붙인 듯한 몸, 상처가 각인된 몸이 이러한 타자의 흔적을 증언해준다. 이처럼 내 몸에다가 상처와 흔적을 만들어내는 타자의 존재란 무엇인가. 바로 그것은 지금 여기로 나타난 지정학적인 장소, 가부장적 체제로 나타난 사회적인 관습, 학습을 통해 습득된 가치관과 세계관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아우르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지평이며, 이 온갖 이질적인 힘의 계기들이 교차하는 장이다. 이 타자의 지평은 때로는 주름처럼 겹쳐져 있고, 때로는 사막처럼 아득하다. 이처럼 나는 주체이며, 타자이다. 지평이며, 장이다. 그리고 세계가 투사되는 풍경이며, 세계가 투영되는 거울이다. ● 정재석은 동선(銅線)을 라이닝 하는 방법으로써 이 이름이나 욕망이 거세당한, 심지어 얼굴조차도 없는 익명적인 주체에다가 왕관을 씌워준다. 회화적인 몸 덩어리와 이질적인 오브제를 결합시키는 작가의 이런 행위는 반미학의 실천논리에 연유한 미적 부적절성의 법칙과 함께, 물신주의에 바탕을 둔 키치에 반응한 것이다. 따라서 왕관은 일종의 반어법적인 의미로 읽혀진다. 말하자면 왕관은 마치 고대 희생제의에서 제물로 바쳐지기 전에 잠정적으로 왕의 권위와 지위가 주어지는 가짜 왕처럼 자기에 대한 냉소와 조소에 바탕을 둔 자위와 자기연민의 한 표상인 셈이다. 나는 이 야만적인 시대를 위한 제물로 바쳐진 희생양이라는 이 지독한 자의식은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나의 이름을 빼앗고, 나의 욕망을 차압하고, 나의 얼굴을 지운 그것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누가 당대를 야만의 질곡에 빠트리는가.
2. 작가의 삼면화(三面畵가)를 보면, 가운데 화면에는 군인이 그리고 그 양쪽 화면에는 각각 남자의 몸 덩어리가 그려져 있는데, 이로써 작가는 그 야만의 실체가 군인임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림에 등장하는 군인을 그 자체로 읽기보다는 군인으로 대변되는 일종의 상징체계로 읽어야 한다. 그러니까 군인은 민중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봉건 군주, 정치군인, 정치 지도자로 대변되는 인격의 주체를, 그리고 신 제국주의, 후기자본주의, 후기식민주의, 다국적기업, 세계화 포럼, 경찰정부, 전자정부로 대변되는 제도의 주체를 아우르는 것이다. 그의 신념은 맹목적인 만큼이나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특히 민중을 지도하고 계몽하고 선도한다는 그의 신념은 그대로 개인을 억압하고 감시하고 통제하는 권력의 기제와 동격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 이면에는 수직적 규준에 바탕을 둔 기왕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음모가 숨겨진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수직적 규준이 질서와 정체성의 논리로부터 당위성을 끌어오고 있다면, 이와는 비교되는 수평적 계열은 다양성과 차이의 논리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 정재석은 이런 그릇된 신념을 각각 마키아벨리, 아메리카 인디언, 부시, 그리고 차도르를 두른 차림의 중동 여인의 초상을 그린 사면화(四面畵)를 통해서도 드러내 보여준다. 마치 제단화가 그런 것처럼 밑에 단을 만들고, 그 위에 위치시킨 이 그림에서 작가는 정치적인 신념에다가 종교적인 신념을 결부시킨다. 맹신에 바탕을 둔 정치적인 신념을 광신에 빠진 종교적인 신념과 동격으로 놓는다. 알려진 바와 같이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서 「군주론」에서 일개 군주에 의해 통치되는 방식의 전제정치를 옹호하고 정당화한 바 있다. 작가는 이 위험한 이상주의의 악몽을 동시대의 부시에게서 본다. ● 그림에서 부시는 신께 기도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현재의 이라크에 이어지는 중동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으로서의 전쟁기계의 초상은 그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일종의 반어법인 셈이다. 심지어 그의 경건한 모습이 교황의 초상을 떠올리게 하는 것에서는 이번 전쟁을 신 제국주의 전쟁(중동의 석유를 노린)과 민족전쟁(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민족분쟁이 확대 적용된)과 함께 종교전쟁(기독교와 이슬람의 오랜 반목이 되살아난)으로 보는 세간의 우려를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세간의 이런 우려를 인정한다면, 동시대는 분명 야만의 시대로 퇴행하고 있으며, 그 선두에는 부시를 내세운 미국의 이해관계가 그 퇴행을 이끌고 있는 셈이다. 전체화면 위에 결부된 십자가 라이닝이 이런 종교의 얼굴을 한 야만을 강화시켜주고 있다. 그 야만이 아메리카 인디언의 정체성을 관광상품으로 변질시키고(인디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게토화하는), 중동 여인의 머리로부터 차도르를 벗겨내는 것(계몽주의의 화신이 되살아난)에서는 오만으로 나타난다. 이는 제삼 세계에 대한 앎의 역사(사실상 침략의 역사인)로부터 태어난 인류학, 인종학, 고고학의 학문의 얼굴을 한 야만과 결부되며, 나아가 심지어는 그네들의 민주주의의 이상마저도 의심하게 한다.
이처럼 자신과 자국의 이해관계를 위해서는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 주체는 단순한 정치적 주체이기보다는 전쟁기계 또는 정치군인과 동격이 된다. 그리고 작가는 「마키아벨리의 정원」이라 이름 붙인 다른 설치작업을 통해 정치군인과 그에 의해 통치되는 민중과의 관계를 논평한다. 작업에서 정치군인은 미니어처 장군으로 나타나고, 그 뒤로는 점토로 빗어 만든 돼지들이 도열해 있다. 그리고 작업의 최 후방에는 죽은 분재들을 배열했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민중을 돼지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 돼지들은 자본주의의 욕망의 수혜자이며, 사회화되고 제도화되고 관습화된 수동적 주체이며, 집단무의식의 화신이다. 그 돼지들은 과연 행복한가 라고 작가는 묻는다. 그리고 그 이면에 정신적인 패닉상태, 헤어날 길 없는 공허감과 권태,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는 수동성의 질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수동성이야말로 어떠한 혁명의 계기로부터도 절연된 최악의 정체성과 동격이다). 그리고 몰이꾼(어린양들을 인도하는 목자)이 돼지들을 인도해 가는 이상향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나무 한 그루도 키워내지 못하는 불임의 땅임을 죽은 분재들이 증언해주고 있다. ● 이런 민중의 질병과 자의식을 얼굴이 거세당한 근육질의 한 사내가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다. 그의 결의, 그의 고집, 그의 벽은 그대로 이 야만의 시대를 건너가는 우리 모두의 결의이고 고집이고 벽이다. 그리고 꽃피운 연산홍 분재로부터 작가가 발견해낸 또 다른 일상이 야만적인 이 시대가 간과하고 있는 행복을 암시해준다. 그러나 분재의 꽃이 다름 아닌 억압의 계기로부터 피어난 것임을 인정한다면, 그 행복은 무엇보다도 능동적인 자기변혁의 실천논리 속에서 찾아지는 것임을 말해준다.(그런데, 이 야만의 시대는 진정 나의 시대이며, 민중이 않고 있다는 질병은 진정 나의 질병일까) ■ 고충환
Vol.20040628b | 정재석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