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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04_0623_수요일_05:00pm
대안공간 풀_이전 ALTERNATIVE SPACE POOL_Moved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21번지 B1 Tel. +82.(0)2.735.4805 www.altpool.org
내부를 반사하는 수면(화면) ● 표영실의 그림은 언어화될 수 없는 미묘하고 모호한 감정상태를 이미지 화 한 것이다. 물론 그것 역시 쉽게 그려질 수 없는 어려운 것이다. 결국 문자나 이미지란 부분적으로만 소통하는 불완전한, 그러나 불가피한 매개들이다. 우리가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세계를 소유할 수 없고 타인과 대화할 수도 없다. 누추하고 허망한 몇 개의 문자를 조합해 생각과 마음을 누군가에게 절실히 전하는 일이나 물감과 붓질을 통해 무언가를 그리며 형상을 만들어 내는 일은 반쪽의 절망과 반쪽의 희망 사이에서 떨어댄다. ● 그런가하면 그림은 보이지 않은 것을 보이게 하려는 욕망, 볼 수 없는 것을 보고자 하는 욕망이기도 하다. 그것은 일종의 금기의 위반을 닮았다. 그림 그리는 일은 결국 모든 것을 시각적 대상으로 현존시킬 수 있다는 바램인데 이는 역설적으로 시각화시킬 수 없다는 절망의 반복에 다름 아니다.
표영실의 그림은 자신의 피부 안쪽에서 파생되는 모든 것을 일러스트 화 한 것이다. 그것은 얼마나 난해하고 까다로운 대상인가? 그것은 형상화 할 수 있는 대상인가? 눈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것, 그저 머리 안에서 막막하게 떠돌고 가라앉거나 혹은 이내 소멸되어버리는 것에 형체를 부여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일 것이다. ● 자기 존재에 대한 이 의식의 집중과 '자아-세계'에 걸쳐진 지각과 감각의 반복 운동 안에서 번져 나오는 그림 그리기는 다분히 실존적이고 모더니스트로서의 의식의 일단을 부감 시킨다. ● 그녀는 매일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상태를 기억해두었다가 그린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작업실에서 무기력하게 앉아있을 때, 길을 가다가 혹은 차를 타고 지나다가 보는 모든 정경들이 필터링 되어 가슴에 차곡차곡 가라앉으면 그 모든 것들이 화면 속에서 물에 잠긴 수초처럼 흔들리며 솟아난다. 그녀는 작업실에 혼자 앉아있을 때 자꾸만 답답해지거나 무기력해지는 자신을 본다고도 한다. 그때 불안은 까닭 모르게 번져온다. 동시에 머리 속에는 여러 생각들이 풀처럼 자라난다. 이런 것들은 그림이 될까?
그녀는 자신의 일상을 침침하게 바라보던 눈 안에 들어와 박힌 인상들, 날선 신경 망에 걸려든 의식들,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육체의 내부에 가라앉은 앙금들, 아련한 추억과 나른한 권태, 숨가쁜 불안, 희미한 기억, 연기처럼 흩어지는 정서, 순간 벼락처럼 내리치는 단상, 느닷없는 낯설음, 스스로 증식해가면서 온 몸을 덮어버릴 듯한 상념을 그린다. 아니 그리고자 한다. 이는 결국 자기 자신의 '몸'을 그리고자 하는 욕망일 것이다. 몸은 자신이 거처하는 유일한 물적 토대이다. 나는 몸을 통해 산다. 몸이 세상과 교호하고 호흡하고 간섭하고 매개하면서 살고 몸이 반응하고 몸이 욕망한다. 또한 몸은 세상과의 경계이자 극한이고 최전선이며 모든 발화의 근원이자 그 발화된 것들이 죄다 가라앉는 곳이다.
표영실의 몸은 극도로 쇠약한 의식과 조심스럽게 융기한 신경, 어느 하나 그대로 넘어가지 못하고 걸려드는 안테나 같은 눈, 결코 잠들지 못하는 사념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모든 신경이 고스란히 몰려들어 그녀가 잡은 붓을 빌어 바깥으로 나온 것이 그림을 만들어 보인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런 면에서 화면은 자기 마음의 영상이며 내부를 반사하는 수면 같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그림은 사람과 사물들이 한결같이 젖어있거나 잠겨있는 듯이 온통 흐릿하다. 날카로운 윤곽선, 선명한 형태, 분명한 표식의 색상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그려진 형상, 중성적인 색조, 익숙한 대상의 틈에서 자라나는 기이한 변성, 불길하고 섬뜩한 상상을 유발하는 상황연출 등으로 이루어졌다.
밝은 바탕화면 중심에 자리한 형상은 일종의 자화상에 가깝다. 커다란 얼굴, 붉은 반점, 모두 지워진 얼굴에 달랑 남은 귀, 화분, 컵, 그리고 머리 속이나 감정을 상징하는 형상들이 그렇다. 이 다양한 상징들은 만화적 상상력과 영상적 구성, 다분히 초현실적 연상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그림은 회화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 흐릿하게 열려져있다. 심리의 얼룩과 마음의 떨림과 긴장을 그려내는 이 혼성적인 회화는 신체에 민감하게 연루되어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그리기의 힘을 강조한다. ● 단서처럼 놓여진 단촐한 형상은 보는 이의 상상력과 마음을 은밀하게 자극한다. 문맥에서 벗어나 흐트러진 단어처럼 놓여진 이미지를 추스려 이야기를 연상해나가는 체험을 준다. 이 작은 그림들은 그림책이자 이 세계의 목록에 대한 개인적인 사전이다.
벽제 주변의 한적한 농가 한 켠에 위치한 그 작업실, 방안에서 본 그림들과 그림 그리는 삶은 적조하고 적조한 만큼 아련하다. 세상의 변방처럼 조용한 그 방에서 일어나는, 희미하지만 치명적이고 위태로우며 불온한 상상력을 그려내고 있는 그림들은 섬세하지만 동시에 다분히 코믹하고 '팬시'하기도 하다. 아마도 이런 요소가 그녀의 그림 그리기, 나아가 자신의 생애를 지속시켜주며 견디게 해주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불안과 두려움 안에 유머와 해학을, 날카롭고 예민한 신경 밑에 부드러운 상상력을 지닌 그런 그림 말이다. ■ 박영택
Vol.20040623a | 표영실展 / PYOYOUNGSIL / 表榮實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