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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616_수요일_05:00pm~07:00pm
책임기획_김윤섭 / 진행_이경아 / 홍보_채민정
갤러리 라메르 서울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 Tel. 02_730_5454
2001년 9월11일의 미국 뉴욕. 유태인과 아랍인들의 증오, 그 증오가 결국은 이렇게 표현이 되는가 하는 탄식이 나온다. 이스라엘을 편드는 미국에 대한 아랍인들의 반미 감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 그리고 2003년 3월 20일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인 이라크 전쟁.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고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가져오려는 것인지, 아니면 문명의 충돌, 또는 현대판 십자군 전쟁이라고 보아야 하는지. 전쟁에는 승리란 없다. 패배의 정도가 다를 뿐이다. ● 40 년 전 미국의 한 유태인 건축가 루이스 칸이 한 이야기는 선택된 단어들의 순서를 볼 때 너무나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증오를 표현하고, 사랑을 표현하고, 인격과 능력을 표현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모든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다." (The reason for living is to express... to express hate... to express love...to express integrity and ability... and all intangible things.) ● 전쟁을 통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예술가들은 많은 생각을 하고 또 표현을 한다.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고발하는 사진들, 전쟁에 항의하는 퍼포먼스들. 그러나 반전 전시회의 표현 방식도 어찌 보면 획일적이고 다양하지가 못하다. ● 어느날 문득 떠오른 생각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전쟁의 피해는 얼마나 될까? 자료를 조사해 보니, 미국과 영국의 군인 전사자는 누가 언제 왜 죽었고 나이, 고향 등 자세한 정보가 나와 있었다. 문득 눈에 들어 온 18 살의 앳된 모습의 미국 소년. 미국 남자의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적어도 50년은 더 살 수 있었는데... ● 이라크 사망자는 정확한 통계가 없다. 추정치만이 있을 뿐이다. 민간인 사망자 데이터를 보고 미국 지상군이 이라크에 진입해서 바그다드를 함락할 때까지, 2003년 3월 20일부터 4월 9일 까지를 사망자 통계를 분석해 보았다. 하루하루 미군이 5~10명 정도 전사할 때 이라크 민간인은 평균 300명 정도 죽고 있었다. 이 중 상당수가 어린이와 여자들일 것이다. 매일, 매일의 미국 군인과 이라크 민간인의 사망자 숫자를 종이에 한 장 한 장 써 보았다. 그리고 바닥에 날짜순으로 놓으니 어떤 사진작품 보다도 그 충격이 더 가슴에 다가왔다.
3주간의 결과는 117 : 6009 ● "전쟁의 재구성"이란 제목의 전시회의 구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결과를 영상으로 만들어 보았다. 날짜는 아랍문자의 형태를 가미한 영어 알파벳으로 하루가 지나면 모래 속에 빨려 들어가는 액체 같은 기분이 들게 하고 하루하루 사망자 숫자가 차갑게 지나간다. 전쟁을 우리는 CNN에서 스포츠 중계 보듯 구경을 한다. 축구나 야구 경기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축구 경기장의 스탠드를 전시장 내에 제작하고 실제로 관람객이 앉아서 음료수와 팝콘을 먹으며 숫자로 전달되는 경기를 볼 수 있는 설치작품을 만들어 보았다. ● 또 다른 비디오 작업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태어나면 이름으로 그 사람의 정체성이 생겨난다. 사람이 죽으면 묘비에 이름을 새김으로써 죽은 자를 산자들은 기억한다. 큰 계량컵에 영어 알파벳이 하나, 둘 떨어지고 그 옆으로 아랍문자가 한번에 수십 개씩 떨어진다. 전쟁으로 죽은 자들을 문자로 상징하는 것이다. 계량컵이 천칭에 놓여 있어 아랍인들의 이름을 담은 쪽은 아주 무겁게 기울어져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 천칭은 미국 군인쪽으로 기운다. 100 여명의 목숨이 6000 명의 목숨보다 더 무게가 나가는 것일까? 그것이 현실이 아니냐고 얘기하는 것이다. ● 이 전쟁을 구경하는 대형 경기장을 상상해 보았다.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 6만 4천명 정도가 들어간다. 그 비율로 계산을 해보니 전 세계 인구가 경기도 정도의 면적이면 다 수용이 가능하다. 서울시를 그라운드로 하고 그 안에 이라크를 축소한 필드를 만들고 경기도 전체가 관람석이 되는 60억이 관전하는 현대의 콜로세움을 건축모형으로 만들었다. 경기장 전광판에는 지금까지의 미국과 이라크의 경기 스코어가 보인다. 스코어가 작은 쪽이 이기는 이상한 경기이다. 국제정치의 갈등과 위기적 상황, 전쟁을 바라보는 보통 사람들의 무심한 시선을 풍자해 본 것이다. 또한 실제 스포츠로 이 상황을 체험해 보는 설치작업을 만들어 보았다. 탁구대의 한편은 정상적인 사이즈 그대로 다른 한편은 4분의 1로 줄여 시합을 하는 것이다. 당연히 작은 쪽에서 경기하는 쪽이 훨씬 유리하다. 경기는 21점을 먼저 올리거나 아니면 큰 테이블 위의 양탄자 조각 혹은 작은 테이블의 작은 청바지 조각 위에 공이 떨어지면 즉시 경기는 끝난다. 큰 양탄자는 테이블 가운데 맞추기 쉽게 청바지 조각은 네트 뒤에 견고히 숨어있다. 이 게임은 공정한 것인가? 게임의 룰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가? ■ 김재준
전쟁, 숫자, 스포츠 그리고 미술: 내가 보는 김재준 ● 킬러 ○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김재준을 킬러라고 부른다. 과격한 수사법이지만 김재준에 대한 상당히 객관적인 관찰이 바탕에 깔려있다. 그는 김재준의 눈빛이 때로 무서울 정도로 날카롭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소 그의 유순한, 어찌 보면 좀 풀려있는 듯한 눈매에 길들여지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느껴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그는 김재준이 만들어내는 상대적인 자극의 진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극히 농밀하면서 동시에 지극히 희박한 사람, 그가 김재준이다. 그의 밀도는 균일하지 않다. 그것이 그의 에너지다. 그는 끝없이 소(巢)와 밀(蜜) 사이를 진동하며 조용한 가운데 수많은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 숫자 ○ 김재준은 경제학자다. 꾸준히 미술 작업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차적으로는 경제학을 공부하고 이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굳이 자신을 계량경제학자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가 하는 공부의 기본은 수학이며 추상화된 수의 세계다. '다른 조건이 같다고 보고.....'를 시작으로 하는 수학적 모델은 현실의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만큼 현실을 걸러서 보여주며 그 핵심을 적나라하게 때로 폭발적으로 제시하는 힘을 갖는다. 이렇게 그는 숫자를 통해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그에게는 숫자가 곧 문자요, 그림이며, 어떤 의미에서 현실 그 자체다. ● 나의 1은 너의 1보다 크다 ○ 그는 나와 나눈 대화를 통해 자신을 '계량적 사회과학자'로 부르는 것에 동의했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그는 숫자의 해석을 통해 오히려 숫자의 추상성을 극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쟁의 재구성 작업의 상당 부분은, 비록 그 자신이 그렇게까지 직접적으로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평등해야할 숫자가 평등하지 않은 경우에 대한 사회과학자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가장 섬뜩한 문장, 즉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돼지가 조금 더 평등하다'와 너무나도 유사한 상황이 이번 이라크 전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그는 주목한다. 이제 숫자도 주인을 잘 만나야 대접받는 세상이 되었다.
마야 린 ○ 마야 린은 미국의 건축가이며 공공예술가다. 예일대 재학 당시 월남전 기념비 공모전에 당선되어 일약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월남전의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 무관심했다. 이 동양계 여학생의 관심은 아주 간단했다.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월남전에서 죽은 미국 병사들의 이름을 전부 모아서 그것을 검은 화강석 벽에 하나하나 새겨 넣는 아이디어를 제출했고 이것이 그만 당선되고 말았다. 간단하기 짝이 없는 아이디어였지만 완성된 기념비가 주는 감동은 엄청났다. 그 수많은 이름, 이름들! 공식 명칭은 월남전 기념비였지만 전쟁의 영웅적 측면에 대한 언급은 일체 없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숫자가 주는 감동에 대한 작업이었다. ● 다시 마야 린 ○ 그러나 마야 린의 숫자와 김재준의 숫자는 그 의미와 구조가 다르다. 마야 린에게 숫자는 거짓이 없는 존재다. 1에다 1을 더하면 2가 되고 이렇게 끝없이 더해나가면 나갈수록 숫자는 거짓 없이 증가해간다. 그리고 어느 정도 모여지면 드디어 질적인 힘을 갖기 시작한다. 마야 린의 숫자에는 단순한 더하기의 논리가 통한다. 김재준의 숫자는 보다 복합적이다. 간단한 산수가 먹히지 않는다. 같은 1인데 같지 않고, 2가 과연 1보다 더 큰가라는 의문도 따라온다. 이 1은 내 것인가 남의 것인가? 갑자기 숫자가 인격적인 존재로 전환되면서 기존의 규칙들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과연 어떤 규칙이길래 이렇게 숫자의 세계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리는가? 게다가 숫자는 어느 한 가지하고만 관계 맺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 목숨일 수도 있고, 축구의 스코어일 수도 있고, 흘러가는 시간일 수도 있다. 숫자가 갖는 이 엄청난 환원력과 상징성 앞에 우리는 그저 놀라며 숨죽일 뿐이다. ● 스포츠 ○ 스포츠란 묘한 것이다. 축구를 아무리 열심히 봐도 건강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본인은 일종의 스포츠맨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정도가 조금 지나치면 유명 선수들의 백넘버가 달린 유니폼을 사서 입기도 한다. 나는 베컴, 너는 호나우두, 이런 식이다. 스포츠가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이렇게 주체와 객체가 교차되는 순간이다. 전쟁은 스포츠일까. 아버지 부시 때부터 전쟁이 생중계 되기 시작했다. 화면으로 보면 이런 전자오락이 없다. 그런데 갈수록 누구를 응원해야할지 알기 어렵다. 내 기억으로는 포클랜드 전쟁부터 그랬던 것 같다. 영국과 아르헨티나, 도대체 어디가 '나쁜 놈'이고 어디가 '좋은 놈'이란 말인가. 이번 전쟁도 그리 다르지 않다. 도무지 왜 싸우는지도 모르겠고, 누가 이겨야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런 경우 '편들면 재미있을 팀'을 응원한다. 그렇게 우리는 이라크 전쟁을 관람해왔다. 김재준의 말처럼 아주 무심하게. 그러나 열광적으로.
김재준은 화가인가 ○ 여기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김재준은 '화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테스트하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그는 어떻게 보면 화가이고 어떻게 보면 또 화가가 아니다. 그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해서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다. 분명히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은 열망은 느껴지지만, 그것이 꼭 화가로서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의 관심은 '화가가 되지 않으면서 좋은 그림을 그리는 것 (혹은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경제학이건 그림이건 김재준의 관심은 어떤 분야의 멤버쉽을 획득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는 인간의 창의력이 어떻게 한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흐르며 끝없이 순환하는지 알고 싶어한다. '학제간의 연구'(interdisciplinary study)란 주제는 그의 삶을 관통한다. 그래서 미술 이론 같은 경제학 이론을 만들고 싶어하고, 경제학 도표에서 시작된 그림을 그리고 싶어한다.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만물의 미묘한 농담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래서 존 시스템을 고안하게 되었다는 사진가 안셀 아담스를 연상시킨다. ("네거티브는 악보요, 프린트는 연주다."라는 말을 그는 남겼다.) 김재준은 화가인가. 그는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 황두진
Vol.20040617b | 김재준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