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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부르디외와 알제리(Pierre Bourdieu et lAlgrie) 강연회 2004_0612_토요일_02:00pm_대림미술관 4층 강의실 강연자_타사디 야신(Tassadit Yacine)
피에르 부르디외와의 인터뷰 영상물 매일 상영 『사회학은 격투기다』_00:09:00_2001
기획_CAMERA AUSTRIA_대림미술관 후원_e-편한 세상_주한 프랑스문화원 / 협찬_넥스필_KTF drama 관람료_어른 4,000원 / 학생 2,000원 / 10인 이상 단체 50% 할인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대림미술관 서울 종로구 통의동 35-1번지 Tel. 02_720_0667
세계적인 사회학자가 바라본 알제리 이미지 ●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는 프랑스 출신의 사회학자로 사르트르와 미셸 푸코에 이어 프랑스 지성사에 빛나는 세계적인 석학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성향 분석을 중심으로 인간과 사회의 본질에 대해 고민한 대표적인 사회과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교육ㆍ미디어ㆍ문학ㆍ미술 그리고 패션까지 문화 전반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으로 유명하다. ● 부르디외는 생전에 프랑스 최고의 지성을 상징하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회학과 교수이면서, 학문적으로는 후기구조주의자이자 사회비판적인 참여지식인이기도 했다. 그는 '사회문화적 불평등이 어떻게 재생산되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한 개인의 행위가 사회전체적인 구조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고 조작되는가에 대해 분석했다. 또한 부르디외는 빈곤ㆍ실업ㆍ파업 등 사회문제에 주목하고, 1990년대 이후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강력히 비판하며 대중매체 앞에 혹은 직접 거리에 나서기도 하였다. ● 이러한 부르디외가 처음부터 사회학을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프랑스 남서부 외딴 곳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철학자로 훈련받았으나, 1958년~1960년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에 징집돼 알제리 대학의 철학과 조교로 근무하면서 그 나라의 사회현실에 충격을 받아 전공을 철학에서 사회학으로 바꿨다. 이후 부르디외는 서구문명으로 인해 알제리 원주민이 겪는 문화 박탈을 연구하면서 파리대학 예술학부에서 레비스트로스 레이몽 아롱의 조교를 거치며 사회학의 길로 들어섰다. ● 이번 전시는 1958년~1960년까지 부르디외가 알제리에 머물면서 그 곳을 찍었던 사진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이 알제리에서 보고 느낀 사실들을 규칙적으로 사진에 옮기려는 시도한다. 식민국가로서 프랑스가 알제리에 대해 갖고있던 동양적인 시선의 반동으로, 피에르 부르디외는 전쟁과 지배에 시달리고 있는 한 사회의 폭력성을 뚜렷하게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그는 이러한 사회학적, 인류학적 시선이 당시의 프랑스인들에게만이 아니라 역사적인 이유로, 자신들의 사회에 대해 종종 잘 알지 못하는 알제리 지식인들에게도 어떤 판단의 요소들과, 정확한 이해를 제공할 수있도록 하겠다고 결심한다. 이러한 부르디외의 사진작업들은 그의 첫번째 저서인 『알제리 사회학』(Sociologie dAlgerie 1958)과 함께 그의 초기 이론적 근거를 이룬다. 여기서 부르디외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남주 베아른 지방과 알제리의 카빌리 지방 사람들의 행태를 비교하며 사회학적 시선을 넓히기 시작한다. ● 그러나 이 기간동안에 찍었던 사진들 중 몇몇 작품만이 부르디외 자신의 저서에 삽화로 쓰였고, 다른 많은 사진들은 부르디외를 잘 아는 이들에게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채 남아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부르디외의 사진들과 사회학자로서 그의 해설과 분석 이 함께 소개된다. 이것은 단순한 회고 사진전을 뛰어 넘어 가장 오래된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자신의 작품이라고 부르디외 자신이 언급했던 독특한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다. 이런 방법의 알제리연구는 후에 그의 이론적 개념의 공고한 기초가 된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알제리의 이미지들』 ● 피에르 부르디외가 1958년에서 1960년까지 알제리에서 찍은 사진들이 출간될 수 있었던 것은, 오스트리아의 사진잡지 「카메라 오스트리아(Camera Austria)」 (라틴어로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는 어두운 방, 즉 사진기를 뜻하며 오스트리아는 나라이름이다) 덕분이다. 부르디외가 찍은 사진들은 음화 600장, 밀착인화만 해도 100장에 달하는데, 대부분은 미간행된 것이다. ● 여기에 모인 작품들은 오스트리아의 그라츠(Graz)에서 2003년 10월에 전시되었고, 그 후에 프랑스 출판사 '악트 쉬드(Actes Sud)'-이 출판사는 한국문학 명작들의 번역출판으로도 유명하다-에서 출판되었다. 대림미술관이 한국에서 최초로 소개하는 작품들은 그라츠에서 전시되었던 작품들이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알제리 ● 1830년 이래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는, 부르디외가 카메라를 들이댈 당시 극심한 경제적, 정치적 변화를 겪고 있었다. 비록 식민지배가 이 나라를 근본적으로 근대화(도시화, 산업화, 의료시설)시키는 했지만, 마찬가지로 강렬한 민족감정을 불러일으켜서 이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공개적으로 표출되기에 이르렀다. 식민지 지배국 프랑스는 독립에 대한 모든 열망을 즉각적으로 거부하고 1945년 5월의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셸리프 지역에서만 5,000여명의 사망자 발생) ●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의 독립투사들과 식민지 지배국 프랑스의 사이의 투쟁은 1956년 2월 이후 하나의 전쟁으로 발전되었다. 사르트르를 위시해서 대다수의 프랑스 좌파지식인들은 알제리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싸웠다. 부르디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알제리 전쟁이 프랑스 내전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인들은 1958년 5월에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지도자를 권좌에 복귀시켰는데, 그가 바로 샤를르 드골 장군이다. 1961년 4월의 구테타 시도를 포함해서 여러 가지 난관이 없지는 않았지만, 드골 장군은 점차 알제리의 독립을 진행시켰고, 이는 결국 1962년 에비앙 협정(accords d'Evian)을 통해서 승인된다. ● 그 세대의 많은 젊은이들처럼, 피에르 부르디외는 알제리에서 군복무를 해야만 했는데, 여기서 그는 알제리 독립을 적극 지지하게 된다. 군복무 기간이 끝난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알제리에 머물면서 전쟁의 참상(포로수용소)과 전쟁에서 파생된 많은 사회적, 경제적 격변들, 즉 농촌공동화(農村空洞化) 현상, 주요 도심(都心) 근처의 빈민촌 형성, 전통의 점차적인 상실 등을 증언한다. ● 이 증언은 특히 민속학적(ethnographique) 연구형태를 띠는데, 여기서 사진은 중심요소 중의 하나이다. 부르디외는 알제리에 대해서 상투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상(像)을 제시하려고 노력한다. 즉 그가 보여주는 알제리는 그림 같이 아름다운 것도, 저널리스트적인 것도 아니며, 더욱이 인종주의적 편견에 사로잡힌 사진과는 하등 관련이 없다. 예를 들어 부르디외는 빈민촌을 찍을 때, 무엇보다도 빈곤을 고발하려고 하지 않고 실제로 경험한 상황들을 증언하려고 하며, 그가 "빈곤의 경제"라고 부른 것이 전통과 어쩔 수 없는 상황과 창의적인 지혜 사이에서 어떻게 조직되는가를 이해하려고 애쓴다. ● 자신이 관찰하고 발견한 것에 대한 열정 때문에 부르디외는, 사진 작업과 병행해서 상당한 양의 연구작업을 진행시킨다. 소비 행태에 대한 연구, 복식(服飾)의 사회학(전통의상과 서구의상의 조합), 일상생활에서 아랍어 혹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이유에 대한 연구 등이 그것이다. 기록으로서의 사진 덕분에 그는 이들 연구의 대상을 하나로 결합시킬 수 있었다.
사진과 민속학 ● 또한 부르디외는 이 「알제리의 이미지들」을 통해서 민속학적 연구작업에서 사진의 역할, 그리고 보다 넓게는 그가 생각하는 사회학의 개념 자체에 대해서 명확한 입장을 가질 수 있었다. ● 사진은 그 보편적인 성격 때문에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부르디외는 프란츠 슐타이스에게 이렇게 선언한다. "사진은 예술적인 차원을 가지면서도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유일한 문화적 재화이다." ● 사진으로 우선 다큐멘터리 작업을 할 수 있다. 즉 지금 사라져가고 있는 전통의 흔적(농부여인들이 만든 구운 토기제품들은 오늘날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을 보존하는 것, 그리고 그가 "삐걱거리는 현실"이라고 불렀던 것, 즉 전통과 현대의 대비, 그리고 알제리에서 사물이 쓰이는 방식과 서구적인 양태의 대비(예를 들면, 머릿수건을 쓴 회교도 여자가 스쿠터 위에 앉아 있는 것)를 파악하는 것이 그것이다. ● 또한 표본에서 출발해서 작업하지 않을 수 없는 특성 때문에, 사진작업은 과학적 선택에 비교할만한 선택을 할 수 있고, 또한 관찰을 심화시킬 수도 있다. 한 장의 사진 덕분에 끊임없이 새로운 디테일을 관찰할 수 있고, 관찰자의 시선(視線)을 집중시키고 심화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진은 기억을 되살리고 글쓰기를 하는데 필수적인 매체이다. ● 그러나 부르디외는 또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한다. 즉 사진 덕분에 자신의 연구대상에 접근할 수 있고, 이들과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으며, "이 연구대상과 공감(共感)할 수" 있다. 알제리인들을 사진에 담는다는 것 덕분에 그는 종종 이들과 접촉하고 대화할 수 있었으며, 사적(私的)인 혹은 가족들의 모임에 초대받을 수 있었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부르디외에게는 급격한 탈식민지화 과정에서 생겨난 불행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는 "휴머니즘적인 사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의 사회학적 작업들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즉 그것은 한 사회 혹은 자신이 연구하는 계층의 양태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일 뿐만 아니라, 연구대상에 참여하고 이들과 공감을 나누는 것이기도 하다. ● 부르디외가 알제리에서 사진을 이용한 방식은 이러한 실천에 전적으로 부합된다. 자신의 카메라, 자이스 이코플렉스(Zeiss Ikoflex)―그는 이것을 독일에서 구입했는데, 독일은 2차 대전 이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카메라를 생산했다― 덕분에 그는 피사체의 눈에 띄지 않고서, 즉 피사체를 거북하게 하지 않고서도 가슴 높이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이것은 어떤 장면을 찍을 때는 필수적이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때로는 아예 사진 자체를 찍을 수 없었을 것(머릿수건을 쓴 회교도 여성, 군인)이다. 이는 또한 사진 찍히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방식이자 이들을 거북스럽지 않게 하는 방식이었다. 부르디외는 현실과 아무 관련이 없는 예술작품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 현실을 설명하고 이 현실에 대해서 가능한 해석을 내놓으려고 했고, 자신만의 예술적 혹은 정치적 감수성을 표현하려고 했다. ■ 대림미술관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하는 알제리 생활의 초기_1999년 10월 27일 녹화된 사회학자 마리아 앙드레아 로욜라와의 대담 ● 누구에게나 처음 시작은 어렵게 마련입니다. 젊은 시절은 인성이 형성되고, 자신의 비전을 찾아가는 때입니다. 저는 사실은 운이 좋았던 편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운이 좋은 줄 모르고 그것을 불운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저는 군인으로 알제리에 파견되었고, 거기에 대해서 절망한 상태였고, 정말 벌받으러 가는 사람처럼 온통 불만에 차서 갔습니다. 제가 알제리전에 대해서 반대를 했기 때문에 일부러 벌을 주기 위해서 알제리에 파견했다고 생각을 했으니까요. 정말 그때 심정은 처참했습니다. 함께 이등병으로 알제리에 파견된 동료병사들과 알제리로 가는 배 안에서 저는 그들에게 식민지화는 정말 못된 짓이라고 말했습니다. 동료들은 대부분 식자가 적은, 특히 프랑스 서부지방의 청년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외에 지식인층이라고 할 수 있는 병사들도 모두 우리 파견대에 포함이 되어있었습니다. 르노사에서 일하는 공산주의 신봉 노동자 몇몇과 그리고 몇 지식인이 포함이 되어있었습니다. 사실 지식인들은 대부분 예비군에 속해 있었고, 프랑스 공산당은 지식인들은 예비군으로 본토에 남아서,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곤 했었던 때입니다. 저는 그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남들과 똑같이 2등병을 달고 군복무를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 그리고 별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알제리에 도착했습니다. 같은 부대 병사들이 "너의 그 바보소리 때문에 결국은 우리를 모두 죽게 될거야"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이들의 뇌리에는 베트남 전쟁의 이미지가 박혀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슬픈 일입니다. 정말 전혀 유쾌한 경험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연구를 시작했는데 그것은 어느정도 정치적인 이유에서입니다. 이런 이유로 제가 정치를 알게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때 파리의 지식인들이 하는 말들은 실제 현장과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을 했고 그래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실에 대한 조그마한 책을 하나 쓰고 나서는 철학을 계속 공부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계속해서 현실에 점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철학도 1964년까지는 계속했습니다. 낮에는 설문조사 등을 하고, 밤이 되면 훗설을 읽고, 시간의식의 구조에 대한 글을 쓰곤 했습니다. 저는 민속학에서 시작에서 사회학을 하게된 것입니다. 저는 알제에서 사회학을 가르쳤습니다. 거기서 제 수업을 듣던 사야드(Abdelmalek Sayad-1933-1998, 프랑스에 이민한 저명한 인류학자, 역자주)를 알게됩니다. 그리고 연말에 저는 몇몇 학생에게 저랑 같이 현장에 가보자고 했습니다. 사야드도 그 둘 중에 포함이 되어있었습니다. 제게 이런 점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 저는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사회학을 했습니다.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실제 위험, 상당히 큰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이 제가 다른 사회학자, 프랑스 내에 알려진 다른 학자들과 다른 자세를 취하도록 한 것입니다. 저랑 유사한 경향의 학자로 미국의 아론 시큐리엘(Aron Sikuriel)이 있습니다. 그의 경우에는 로스 엔젤레스 교외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어렸을 적에 흑인들과 달리기 경주를 하던 경험을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흑인아이들이 옆에서 뛰면서, "야, 네가 이기면 목을 잘라버릴거야"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은 그냥 하는 소리가 절대로 아니었답니다.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에 어려운 삶의 조건 속에서 저절로 사회학을 익힌 것입니다. 사회학에서 문제시하는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한 답을 어려서 이미 체득한 그는 즉각적으로 필요한 요소만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갖게됩니다. 그는 범죄에 대해서 정말 훌륭한 저술을 남겼는데, 그것은 그가 사회의 범죄현상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면서, 단지 관찰자의 입장이 아니라 경험자의 입장에서 기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상한 미국의 사회학자라면 책의 4분의 3을 채웠을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절대로 저술에서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 그이야기는 사회학자가 자신이 자란 환경, 자신의 사회경험에서 물려받게 되는 사회에 대한 지식자본이란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조금전에 말한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물론 그것만으로 사회학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훌륭한 것이며, 그것을 학문적인 문제화, 경계로 전환해서 활용할 줄 알아야겠죠. 전시에 위험이 난무하는 곳에서 사회학을 한다는 제 사회경험도 어느 정도 유사한 형태의 것이었습니다. 특히 제가 어떤 답을 하느냐, 또는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저의 생사가 결정되는 그런 상황에 두세번 놓여지기도 했습니다. 내전, 또는 해방전의 상황에서 저를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제가 풍기는 인상, 저를 인식시키는 방식, 조심스런 태도밖에는 없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제게는 정말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 방법론을 기술한 서적들에는 많은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방법론 책에서 배우지 못하는 것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본질적인 것은 적혀있지 않기 때문인데, 그런 것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만사에 생각을 해야했고, 모든 것에 조심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녁이 되면 우리는 사야드나 다른 연구원들과 같이 회의를 하고는 했었습니다. 참, 당시 우리들의 회의장면을 찍은 사진을 최근에 다시 본적이 있습니다. 그때 모여서 우리는 매순간 질문을 던졌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지, 누군가 한말에 대해서 등등...... 또 다른 해인가에는 우리그룹에 프랑스의 통합종교구호단체인 시마드(Cimade)의 구호물을 가지고 도착한 개신교를 믿는 여성이 하나있었습니다. 시마드는 결핍자를 돕는 구호단체로 그녀는 그 단체에서 보낸 선물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우리 중에 한명이 "우린 사회학자일 뿐이야, 근데 왜 구호선물을 나눠줘야 해, 다 바보같은 짓이지"라고 그 여자분에 말했습니다.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게 생각나는 이 친구는 결국 이후에 비밀경찰에 의해서 암살당하고 말았는데, 이 친구가 저를 향해 몸을 돌리면서, "야 부르디외, 말해봐, 너는 사실 사람들이 가난하던 불행하던 개의치 않지?"라고 물었고, 저는 "그렇지 뭐"라고 대답을 했고, 사실 그것은 이런 종류의 일시적인 인도주의를 타파하고자 하는 의미에서였습니다. 그들은 한번 선물을 주고는 떠납니다. 그리고 양심이 편해지는 것입니다. 저희는 학문이 해야하는 역할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토론을 정말 매일 했습니다. 이런 토론은 머리에 이성을 심어주고, 정말 많은 것에 대해 사고를 하게 해줍니다. 저는 정말 거대한 지식자본 속에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조로(早老)한 느낌입니다. 교양과정 교수를 하면서 안락하게 예사로운 연구나 했을 사회학자에 비해서 저는 정말 많은 문제와 많은 질문을 안고 있었습니다. 제가 축적한 지식자본은 그렇기 때문에 사고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 보다는 이 당시에 모아둔 문제에서 발원하여 형성된 것입니다. ■ 『사회학은 격투기와 같은 운동이다』라는 장편비디오의 요약본 / Pierre Carles 제작, 2003년 프랑스, C-P 프로덕션
● 이 전시는 부르디외 사망 1주기를 기념한 2003년 유럽 순회전시 이후, 대림미술관이 주한 프랑스문화원과 함께 마련한 전시입니다. ● 이번 전시에 이어, 대림미술관은 2005년 3월 프랑스 출신 사회학자 쟝 보드리야르의 사진작품을 소개하는 전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행사는 프랑스문화원이 주최하는 랑데부드 페스티발과 함께 진행되며, 쟝 보드리야르가 한국에 내한하여 대림미술관 주최 세미나도 가질 예정입니다.
■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는 1930년 프랑스 남동부의 소도시 베아른의 전형적인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파리고등사범학교(ENS) 졸업 후 1958~1960년 알제리에서 군 복무를 하며 서구문명으로 인해 알제리 원주민이 겪는 문화 박탈을 연구한 그는 파리대학 예술학부에서 레비스트로스 레이몽 아롱의 조교를 거치며 사회학의 길로 들어섰다. 릴 대학 교수를 거쳐 1968년 파리고등연구원에 유럽사회학센터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1981년 프랑스 최고의 학술기관인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취임한 그는 이후 콜레주 드 프랑스 및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부르디외는 자본주의 사회구조와 정치ㆍ경제 문화ㆍ예술을 장악하고 인간을 억압하는 권력 문제를 엄정하게 비판했으며, 아비투스 등 그가 창안한 개념은 현대 인문사회과학의 기본 명제가 되었다. 1990년대부터 빈민 노동자 이민 실업자를 위한 운동에 직접 참여한 그는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며, 2000년 5월 1일 노동절에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과 노동조합·시민단체 등의 연대를 주도했다. 또한 그는 2000년 9월 대산문화재단 주최로 열린 서울국제문학 포럼에 참석해 위기 속의 문화라는 발표를 통해 상업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의 얼굴을 지닌 문화적 국제주의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국내에 번역된 저서로 『재생산』(1970), 『자본주의와 아비투스』(1977), 『구별 짓기』(1979), 『혼돈을 일으키는 사회과학』(1980), 『상징 폭력과 문화 재생산』(1982), 『강의에 대한 강의』(1982), 『예술의 규칙』(1992), 『세계의 비참』(1993), 『텔레비전에 대하여』(1996), 『파스칼적 명상』(1997) 등이 있다.
Vol.20040614a | 피에르 부르디외_Pierre Bourdieu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