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4_0609_수요일_06:00pm
갤러리 마이아트 서울 종로구 인사동 149번지 Tel. 02_725_6751
손홍근의 두번째 개인전인 『CUPping』展은 잠재성이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어떤 압축된 긴장감, 이름하여 'cupping'을 주제로 한다. 본래, 'cupping'은 한방 치료기술의 하나인 부항(附缸)을 지칭하는 말로서, 몸 속의 독혈이나 고름을 몸 밖으로 뽑아내는 행위나 그 기구를 의미하는 데, 작가는 그 용어를 차용하여 보다 추상적인 차원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cupping'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적인 존재를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존재로 드러내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생성되는 어떤 긴장감이나 밀도를 의미한다. ● 총 3점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데, 각각의 작품은 드러내는 매체와 드러나는 대상 그리고 그 과정에 생성된 분위기의 표현에 있어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6개의 꽃」에서, 드러내는 매체는 대화이고, 드러나는 대상은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개인의 사연이며, 대화를 나누던 그 상황의 긴장감이나 분위기는 꽃으로, 각기 그 느낌이 다른 여섯 개의 꽃으로 표현되고 있다.
6개의 꽃 ● 다양한 색깔의 꽃잎이 수북이 담긴 여섯 개의 아크릴 박스의 윗면에서 40센티미터 가량 들어간 위치에 비디오 화면이 놓여 있다. 여섯 명의 사람과 나눈 인터뷰 장면이다. 작가에게 물어보니, 모두 작가 주변의 사람들이란다. 애꾸 할아버지, 애꾸 할머니 등 모두 여섯 명이다. 작가는 묻고, 그들은 대답한다. 질문은 짧고, 대답은 길다. 대답이 길 수 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그들만의 사연인 탓이리라. 비디오 화면을 보다 보면 그 밑에 가득 쌓인 꽃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인터뷰 당시엔, 없었던 꽃이다. 꽃은 무엇일까? 작가에게 물어보니, 꽃은 그냥 꽃일 뿐이라고 한다. 무슨 말일까?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술자리에서 그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이 난다. 정확히 그 대화의 주제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진 못하지만, 우리는 부항에 대해 얘기하는 중에 어떤 밀도에 대해 얘기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서야 그때 그가 말했던 그 밀도가 무엇인지 이해할 것도 같은 기분이다. 그러니까, 꽃은 어떤 밀도이리라.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과정에 생성되는 어떤 긴장감 같은 것. 솔직히 말해서, 그것이 왜 꽃이어야 하는 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꽃들이 그 순간, 그가 그들과 말을 주고받던 그 순간의 어떤 밀도와 관련된 것이라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부항 ● 「여섯 개의 꽃」을 지나면 그 길의 끝에 「부항」 사진이 붙어 있다. 두 장의 사진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데, 하나는 부항단지가 등에 들러붙어 있는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부항단지를 떼어낸 후 그 자국이 벌겋게 남아있는 사진이다. 말하자면, 하나는 부항 중이고, 다른 하나는 부항 후이다. 만일 그 곳이 한의원이었다면, 그저 그것이 부항을 재현한 사진이라는 점만을 확인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종료되었겠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한번 더 쳐다본 눈길에 글자가 포착된다. 글자는 부항 자국 위에 쓰여져 있다. 펜으로 쓰여진 그 글자는 부항으로 인한 살의 긴장과 땀으로 인해 번져 있다. 흐릿하긴 하지만, 숫자다. 쓰여진 형식으로 보아, 날짜다. 독혈과 고름을 뽑자고 하는 일이 부항인데, 피와 고름 대신 글자가 딸려 나온 셈이다. 그러니까, 'cupping'은 부항과 같이 무엇인가를 안에서 밖으로 끄집어내는 일이며, 부항과 달리 그 대상이 피나 고름만은 아닌 일이다. 부항단지에 의해 몸 속에서 몸 밖으로 끄집어내진 그 날짜는 무엇일까? 작가에게 물어보니, 그것은 어떤 날에 대한 기억이며, 몸에 새겨진 기억이라고 한다. 등은 내장기관을 제외한 인간의 신체 가운데 가장 자연에 가장 가까운 곳인 것 같아요. 머리나 손과 달리 문화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할까.
오제미 ● 계단 벽에 의해 시선이 가로막힌 상황에서 똑깍 똑깍 하는 소리가 먼저 들려온다. 오제미로 속이 채워진 아크릴박스 위에 빔 프로젝터가 놓여 있고 프로젝터의 렌즈 앞에 추가 매달려 있다. 그 추의 움직임은 빔 프로젝트가 비춘 화면에 일정한 궤적을 그려내고 있다. 좌에서 우로, 다시 우에서 좌로 움직이는 얇은 흑색의 띠. 그 띠가 가로지르고 있는 화면에선 오제미 던지기가 한창이다. 화면의 중앙엔 빨간 박을 높이 들고 선 담임 선생이 보이고 그 주위로 아이들이 삥 둘러 서 있다. 박을 향해 날아가는 오제미의 쉼 없는 비행과 그 비행을 가로지르는 검은 띠의 비행. 오제미 장면은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일종의 사회적 기억일 것이다. 구체적인 박의 색깔이나 오제미의 색이 달랐을 수는 있어도, 그 시절 박을 향해 오제미를 던지던 흥겨움만은 결코 다르지 않은 것이리라. 그런데, 그 흥겨움을 가로지르는 저 까만 선의 움직임은 무엇일까? 그것 역시 우리의 어딘가에 잠재되어있던 그 무엇-그것을 추억이라거나 상처라거나 혹은 그 무엇이라 이름하건 간에-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어떤 긴장감이나 밀도, 즉 'cupping'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기억은 그렇게 그 나름의 정확한 규칙성과 함께 되살아나는 것은 아닐는지. ■ 김성열
Vol.20040609c | 손홍근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