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경.막막.팍팍.허망

김정욱 회화展   2004_0609 ▶ 2004_0623

김정욱_한지에 먹_93×63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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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609_수요일_05:00pm

갤러리 피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28번지 백상빌딩 1층 Tel. 02_730_3280

김정욱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지라는 재료를 통상적으로 서술하는 '푸근하다'라는 말이 이제는 아주 터무니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한옥 문틀의 창호지는 더 이상 우리의 일상적 주거환경을 이루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서 김정욱 작품들은 질료와 모티브 사이의 이질적인 긴장을 통해 한국화에 대한 우리의 통념에 도전한다. ● 김정욱이 그려낸 얼굴들은 낯설다. 언뜻 보면 일본 전통 연극에서 분장한 배우들처럼 소름 끼칠 정도로 하얀 얼굴을 하고 있기도 하고 대체적으로 둥글고 통통한 인형은 중남미의 원주민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정면상의 얼굴들은 여백 없이 한지에 꽉 찬 채 그려졌다. 클로즈업,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그려진 얼굴들은 미간이 넓고 눈이 크다. 일부는 흰자위가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혹은 반대로 검은 눈동자가 눈 전체를 덮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때로는 머리칼이 눈을 가리고 있기도 하다. 자세히 보면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깝게 보이는 얼굴들도 있다. 기괴하다고까지는 말 할 수 없겠지만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취향이나 상상력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 첫 번째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들에서는 작가 주변 인물들이 여러 가지 자세로 다양한 각도에서 주로 미디엄 샷이나 니 샷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와 비교한다면, 얼굴에 집중된 이번 그림들이 주는 이러한 아주 낯선 효과는 김정욱의 그림을 초상화라기보다는 관상학적 내지는 골상학적 이미지로 보게 만든다. 대체 작가는 누구의 인상을, 그리고 왜, 혹은 어떤 모티브 때문에 이렇게 보고[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김정욱_한지에 먹과 채색_94×64cm_2004

김정욱의 작품에 없는 것들을 모아보자. 전시할 때 어떻게 벽면에 부착할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본 작품들은 프레임이 없다. 배경도 없고 여백도 없다. 또 작품 안에 제관이나 도장이 없다. 작품에 별다른 제목도 없고 이름이 있는 인물도 아닌 것 같다. 간단히 말해서 그림 속의 인물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없는 것이다. 또 일부 작품에서 그 인물들은 눈썹이 없거나 눈동자가 없다. ● 그렇다면 있는 것은? 눈썹과 수염, 잔털 등이 있다. 갖가지 기미와 반점과 피부 트러블들이 있다. 눈두덩의 주름이 있는가 하면, 눈동자들이 그려진 경우, 의도적인 '비대칭'이 있다. 작가 자신의 초상화인 경우 낙서에 가까운 파격적인 이탈이 있다. 그 이탈은 튀어나온 귀와 송곳니, 그리고 엉뚱하게도 모나리자를 패러디 했을 때의 뒤샹을 연상시키는 수염에 의해 이루어졌다. 프로필로 얼굴을 검게 그린 경우 눈과 눈동자만이 두드러져 있다. 이렇듯 현존하는 것은 아주 강력한 세부적 효과를 낳고 있다. 그리고 이 세부적 효과는 부재하는 것들의 쿨함이나 미니멀함과 대조를 이루면서 상호작용한다. ● 김정욱의 몇몇 얼굴그림들을 일별하면 최초에는 어디선가 본 듯한 팝 아이콘을 닮았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이미지들을 자세하게 뜯어볼수록, 이러한 부재, 현존, 대조와 간섭 때문에 낯선 느낌이 점차 강화된다. 게다가 우리 모두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한국화의 초상이라는 게 종이돈의 이황, 이이, 세종대왕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렇듯 낯설고 기이한 느낌은 더욱 강력해진다.

김정욱_한지에 먹과 채색_94×64cm_2004

김정욱은 재료, 양식, 장르 및 모티브에 있어서 한국화의 전통으로부터 이탈해 있다(한국화라는 말 자체가 한국 미술 제도의 식민성과 이식성을 드러내는 기이한 용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부연하자면 그 전통으로부터 뜯겨져 있다고, 아니, 스스로를 뜯어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전통의 계승 혹은 재창조라는 담론의 허구성을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김정욱은 보통사람들이 동양화, 한국화에 관해 갖고 있는 상투적 인식과 선입견을 가차 없이 허물어뜨린다. ● 앞서 말한 낯섦과 기이함과 더불어서 작동하는 이러한 이탈과 분리에 의해서만, 김정욱이 투사하려고 하는 '감수성의 구조'가 가능한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낡은 전신(傳神)이라는 말의 용법에 기댄다면, 작가를 사로잡고 있는 당대의 일상적이고 실존적인 삶에서 형성된 내적 '감수성의 구조'를 바로 이 얼굴들과 얼굴들의 표정과 얼굴들의 눈동자(의 있음과 없음)를 통해 작가는 투사하려고[傳神] 하는 것이다. ● 이 감수성의 구조에 관해 나는 비평적 내러티브를 갖다 붙이고 싶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다. 우선 대체로 섬뜩하다고 해야 할 김정욱의 이미지들이 보는 이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김정욱의 그림 앞에서는 너무 빨리 삶의 생경함, 막막함, 팍팍함, 허망함 같은 것들이 상기된다.

김정욱_한지에 먹_93×63cm_2004

작가의 경우, 지루하고 황폐하고 씁쓸한 삶, 그리고 그 씁쓸한 삶에서 느끼게 되는 감정들, 그리고 그 감정들이 지나간 뒤에 되풀이되어 남는 상처들-이 모든 것들을 간증하는 행위가 바로 그림을 그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굳이 달리 말하자면, 작가는 자기 자신을 후원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미술제도의 가장 본원적인 메커니즘을 시야에 넣고 말한다면, 한국화는 김정욱에 이르러서 스스로를 '모던한 방식으로' 후원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어진이나 사대부상이나 풍속화에서의 인물상으로 점철된 전통적 한국화들의 목록을 놓고 보면 이러한 자기 후원은 더욱 두드러진다 할 것이다. 인물상을 즐겨 그린 우리시대의 채색 한국화 작가들과 비교해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 목이 짧고 콧날과 인중(人中)은 뚜렷한 반면에 법령(法領)은 거의 그려지지 않은 김정욱의 관상학적 이미지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눈동자에서 피가 흐르는 것처럼 묘사된 작품이다. 가로가 더 긴 한지에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그려진 이 작품에서 왼쪽 눈동자는 피를 흘린다. 아니 피가 아니라 눈물인지도 모른다. 관람객들이 어느 쪽으로 읽어내도 무방하며 그런 의미에서 피눈물이라고 해도 괜찮다. ● 전통 한국화 역사의 에피소드에 밝은 사람이라면 여기서 쉽게 최북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최북이 자기 자신의 예술에 대한 기세와 오기 때문에 자기 눈을 찔렀던 것과는 아주 다르다. 김정욱의 관상학적 이미지가 무엇보다 삶의 그러한 황폐함, 그리고 일상적 삶 속에서 되풀이되기도 하고 남기도 하는 패턴의 감정들, 그리고 그 감정적 패턴들이 이루는 감수성의 구조가 외화(外化)된 것이라고 한다면, 눈을 찌른 것이 우리의 당대적 삶 자체라고 단언한다고 할지라도 실수하는 것은 아니리라. ● 피눈물-먹물이 아래로 흐르지 않고 옆으로 흐른다는 것도 매우 함축적이다. 김정욱 인물들의 미간이 넓고 눈동자가 비대칭이라는 점은 옆의 눈/눈동자를 향해 중력을 거슬러서 흐르는 피눈물-먹물의 함축적 의미를 더욱 증폭시킨다. 상투적인 표현을 써서 미안하지만, 김정욱의 이미지들은 나를, 내 눈을 찌른다. 그리고 그렇게 찔린 눈으로 다시 보니 그림 속에 숨겨져 있던 다른 면모가 드러나는 것도 같다. 이를테면 그림 표면의 황폐함을 관통하는 순간, 어떤 찐득한 유머가 잠깐 빛난다. 이로서 김정욱의 또 다른 감성성의 구조가 포착되기 시작한 건지도 모르겠다. ■ 백지숙

Vol.20040609a | 김정욱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