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4_0602_수요일_06:00pm
인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5층 전시장 Tel. 02_736_1020
이미지를 가공하는 재료의 연금술사 ● 예술작품의 구조는 내용과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과 형식은 분리되어 나타나지 않고 결합되어 있다. 예술작품에서 감상자가 불 수 있는 부분은 형식화된 결과물이다. 내용은 작가의 세계관, 철학적 배경 등 정신적인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에 작품에서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형식은 작가의 이러한 정신세계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따라서 물질적 상황으로 드러난다. 현대미술에서는 이러한 물질적 세계가 정신세계를 압도하고 있다. 정신세계(내용)의 속성에 맞춰 물질세계(형식)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세계에 의해 정신세계가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즉 몸이 성장하기 전에 옷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 옷에 맞춰 몸이 성장하기를 바라는 양상과 같다.
20세기 이후 현대 미술이 다양한 형식을 만들어내게 된 것은 이러한 예술적 변모에 기인한다. 형식의 반전은 표현력을 폭발적으로 확장시켜 주었다. 그 결과 오늘날의 미술에 있어서는 재료의 문제가 미술의 중심과제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재료의 확장은 미술의 다변화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담아낼 수 있는 주체적인 방법론으로 미술의 가치를 새로움에 두는 작가들에게 환영받고 있다. 20세기 초 미술에 오브제 개념이 도입된 이후 개념적 미학이 미술에서의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가들에 의해 확장되는 추세가 두드러져 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개념미술에 의한 새로운 미술의 추구는 형식의 다변화와 재료의 확장을 이루어냈으며, 날로 표현력이 증대되는 추세에 있다. ● 박생진의 경우도 이러한 미술적 격변기 속에서 작업을 시작한 작가다. 많은 재료 체험을 바탕으로 폭넓은 작품세계- 평면·입체·설치-를 실험하고 있는 그는 미술의 전통 관념에 대한 젊은이다운 미학적 도전 정신을 보여준다. 박생진이 이번 전시를 통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개별적 작품이 아니다. 공간 자체에 대한 연출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것을 다양한 재료와 표현방법으로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재료 확장에 의한 표현력의 증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재료와 방법론에 의한 형식·실험적 설치 미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재료나 표현방법의 연구에 앞서 작품의 내용적 측면은 먼저 생각하는 작가다. 그것도 '나는 누구인가', '예술의 기능이 무엇인가' 하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 '한국사회에서 여성작가로 살아가는 일' 이것이 박생진이 이번 작품전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문제인 것이다. 이런 경우 현대미술에서는 페미니즘 미술로 분류한다. 한국미술계에서 페미니즘은 투쟁적 요소가 강하다. 1990년대 초부터 민중미술계열의 미학적 근거로 출발한 한국의 페미니즘미술은 강력한 메시지에 비해 형식적 완결도가 약한 것이 사실이다. 박생진의 경우 자신의 개인적 관심사로부터 출발하여 여성으로서의 작가가 이 사회에서 어떤 좌표를 가져야할 것인가 하는 공동의 관심사를 이번 작업의 주제로 삼고 있다.
이번 작업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입체·설치작업은 여성의 정체성 문제를 강하게 담고 있다. 「더 높은 곳」 이라는 제목의 설치작업은 전통의상의 저고리 부분을 깃발처럼 세우고 그 아래 계단을 받쳐놓은 작품이다. 여성의 지위 상승 욕구를 직설적 표현방식으로 나타낸 강한 작업으로 보인다. 푸른색과 붉은색의 공단을 재료로 사용하여 화려함과 강한 욕망을 강조했으며, 깃발의 형태로 선동적 이미지를 나타냄으로써 최근 우리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여성의 사회적 활동영역의 확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잊혀지지 않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란 제목이 붙은 설치작업은 미니멀한 평면회화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 무명천으로 제작한 여성의 저고리 옷고름부분을 반복적으로 설치함으로써 보다 나은 상황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여성의 단합된 힘을 표현하고 있다. 단단히 여민 옷고름은 여성의 의지를 상징하는 이미지를 담아낸 것으로 보인다. ● 이러한 입체·설치작품을 통해 작가는 전통적 가치관으로부터의 탈출과 사회적 변화에 따른 여성의 힘과 역할이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제시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여성에게 불리한 사회제도와 구조가 여성작가의 활동을 제약하고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여성 자신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이것은 비단 여성들에게만 한정된 문제는 아니다. 척박한 문화현실은 이 땅의 젊은 작가들에게 작가로서의 삶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 박생진은 재료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지닌 작가다. 이는 자신의 경험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재료의 성질과 특성에 맞춰 이미지를 결합시키는 능숙한 솜씨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감상자들에게 그 이미지가 쉽게 전달되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이와 함께 박생진의 작품에서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유머적' 요소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어느 사이엔가 입가에 미소가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결코 작품의 가벼움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유머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찌릿한 자극적 쾌감까지도 가질 수 있다. 이는 작가의 의도가 감상자들에게 쉽게 전달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전달력의 근원은 작가의 재료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전준엽
Vol.20040602b | 박생진 설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