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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521_금요일_05:00pm
갤러리 아티누스 서울 마포구 서교동 364-26번지 B1 제1전시장 Tel. 02_326_2326
meditation on meditations; memories of deconstructed symbols ● 사진은 본래 인간이 기억하고자 혹은 소유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정확히 모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발생했다. 그러므로 사진이라는 매체에 관해 생각할 때 본질적으로 이미지를 정확하게 기록하는 기본적인 본질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이것은 물론 회화의 발생과 사진의 발생이 가지고 있는 동일한 특성이기는 하지만, 회화가 인간의 소망을 묘사하기 위한 미메시스의 전통 속에서 기록이란 의미로 발전해 왔다면, 사진은 근대 사회의 다양한 스펙타클을 담아내는 속도감 있는 수단으로서의 장점을 가지고 회화적 기록의 영역을 확장해온 매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자연을 자연답게 담아내는 사실적 수단으로서의 사진이 갖는 의미는 회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정신적 상황에 대한 범주적 고찰과는 다른 경향성 하에서 발전해온 것이다. ● 김창현은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서 대상을 조응한다는 면에서의 관조를 이미지에 대입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관조는 사물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좀더 본질적인 형상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그에게 본원적인 형상(prototype)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어 그의 삶 주변에 산재해 있는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본원적인 형상은 그의 작품에서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의 예술에 대한 미학적 태도와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흔히 작품에서 사물의 본질을 발견하고 그리하여 그 나름의 의미의 세계를 천착해 나아가는 그런 미학적 태도가 그의 작업의 본질을 지배하고 있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본질과 사물의 존재론적 상황, 삶의 다양한 조건들에 관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김창현은 그의 작품에서 분석적이라기보다는 그 자신의 감정이 이입된 그런 느낌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의 작품을 바라보면서 무언가 묘한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그의 사진작품이 본질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사진 이미지는 대상의 표면과 더불어 마치 파헤쳐져 정리되지 않은 해부도를 보는 듯한 두 종류의 느낌을 동시에 전달해준다.
그는 이미지를 통해 이미지의 기록적인 특성이 아니라 이미지가 의존하고 있는 자신의 시각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의 시각은 정확하게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그렇지만 그 두 가지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이분법적 시각이 아니라 서로 분리를 용인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분리되어 보일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혼재하는 이미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미지가 대상을 포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게 사물 혹은 자연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즉 스트레이트 사진 이미지 속의 대상을 바라보면서는 느낄 수 없는 이미지적인 인공성(artificiality)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그가 가지고 있는 상징주의적인 특성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는 이미지를 이용해 예술의 기원과 관련되는 그런 개념적인 속성들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작품을 통해 자연스럽게 의미의 세계를 찾고자 할 것이다. 이런 의미의 세계에 천착할 때 작가는 그의 작품에 디지털 기술을 통해서든 아니면 인화하는 과정을 통해서든 다양한 실험적 요소들을 집어넣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표현과 재현의 관계 혹은 그 경계에 대해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재현을 기반으로 이미지를 생산한다. 그가 생산하는 이미지들에서 관객들은 시각적으로 조작되어(manipulated) 드러나는 확연한 요소들을 발견할 수 는 없을 것이다. 작가에게는 시각적인 양식적 특이성 보다는 예술적 개념에 대한 태도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 그의 작품들에서는 의미의 수사학적 변용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네가티브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남성」과 「여성」, 「토르소」 등의 작품들에서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는 형태의 적극적인 표현을 자제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작품을 통해 의미의 가변성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이미지 자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과 김창현이 포착한 이미지의 속성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사진이라는 존재성은 시각에 따라 변화될 수 있겠지만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속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김창현은 「남성」, 「여성」, 「토르소」 류의 작품을 통해 그의 작품이 긍정하고 또한 수용하는 예술적 상징성의 구체적 증거를 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Torso」 에서는 흉상으로 하이라이트를 준 빛이 단순한 형태를 드라마틱한 구성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인간의 생각과 사고가 개념적인 틀을 통해 새롭게 주조되고 조명됨으로서 새로운 의미론적 잠재성을 가질 수 있다는 인식의 도약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의 초기 작품 「삶의 순환 Circle of Life」 시리즈에서 그는 단순한 원을 삶의 순환의 시각적 형식으로 제시하였다. 물론 원은 영원성 혹은 완전성을 상징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구체적인 이미지가 아닌 추상적인 형식으로 드러나야만 하는 원은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회화작품을 통해 제시된 것이라면 그 의미는 별다르게 주목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증거 기능"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예술형식인 사진에서 우리가 그런 추상적인 원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좀더 고민해보아야만 할 문제이다. 형식은 의미를 배태하고 있지만 의미는 형식을 필연적으로 수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즉 김창현의 작품에서 우리는 의미가 형식을 수반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경우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자신의 사유의 상징성의 표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그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이해에 어려움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사진이라는 매체의 당연한 재현적 성격을 재현의 1차원적 틀로 받아들이지만, 그 1차원적 특성은 작가의 상징적 의도 속에서 이해되어야만 하고, 그런 상징적 의도는 작품 이미지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개념적 틀 속에서 해체되고, 다시 한번 사진 속에 남아있는 형태의 각 요소들로 환원되어 의미보다는 다시 한번 형태로서 확장되는 것이다. 이렇게 복합적인 변화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그의 이미지들은 좀더 넓은 사유의 장으로 해체되고 환원되어 재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몇 단계의 해체와 재구성을 거쳐 조합된 그의 이미지에서 형태는 남아있지만, 남아있는 형태들은 그 자체로서 특별한 존재론적 특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 「남성」과 「여성」에서 그는 표면과 접근, 거부를 반복하고 있다. 두 작품은 네가티브 이미지로 보여지고 남성과 여성의 신체는 물리적인 변화가 아닌 개념적이고 시각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그러므로 김창현이 그의 작품 이미지를 통해 주장하는 것은 형태와 의미의 결합이 평행적인 방식이 아닌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차원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의미는 형식을 완성하는 원인이 아니고, 이미지로서의 형상과 형상으로서의 이미지는 의미를 수반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미지들이 갖는 이런 관계들을 타자로서 바라보고 있기도 하고, 의미의 창조자로서 참견하기도 한다. 의미의 해체와 감각적인 사유가 반복되는 과정 안에서 그리고 인식론적 차원의 시각적 조합 안에서 관객은 구조가 형성시키는 질서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의 질서로 편입되는 것이 아니고 작가가 시각적으로 주장하듯이 관조의 상태로 편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김창현의 작품을 목적을 가지고 분석하기 보다는 시각적 환영의 세계 속에서 이미지의 존재를 잊고 감상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작가가 의도하는 예술의 의미를 공유하고 또한 우리 삶이 구성하는 예술에 대한 이야기들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김창현은 상징주의적인 질서 속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모순적 자아를 드러내고, 그리하여 그의 작품에서는 해체적 이미지의 본질과 상응하는 현대성이 당위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의 이미지를 통해 규정적이고도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관조에 대한 명상'이라는 해체된 상징들에 대한 기억의 과정은 관객들에게 이미지로부터 환기되는 삶과 예술의 차원을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 정용도
Vol.20040523b | 김창현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