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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522_토요일_04:30pm
갤러리 에스피 서울 강남구 청담동 80-6번지 성원빌딩 2층 Tel. 02_546_3560
Doing Nothing_'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관하여 ● 대상을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재현해낸 것을 이미지라고 한다. 뷔넨 뷔르제는 이를 좀 더 세련되게 표현했는데 그에 의하면 이미지란 "지각의 관점에 따라 현존 혹은 부재 하는 물리적 대상이나 관념적 대상을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재현해낸 것"이다. 이미지라는 표현양식이 감각과 의미, 즉 한 존재의 즉각적 양태로서의 감각적인 것과 인간의 순수한 사고의 내용으로서의 지성적인 것의 중도에 있으며 그것을 맺어 준다는 것이다. 이미지가 존재하려면 반드시 우리의 지각을 관통해야 한다. 이미지의 다양함은 우리 몸의 감각이 다양함에 기인한다. 결국 몸의 반응이 이미지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해볼 수 있다. 세계는 나의 감각활동에서 나에게 대상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계하면서' 존재한다. 세계가 지각적으로 이해될 때, 그리하여 느끼는 내가 세계 속에 있음을 지각할 때, 이 지각은 대상적. 물리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련되어, 나와 세계가 상호작용 하는 가운데 일어난다.
이경민은 한 장의 사진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진 속에는, 사진 안에는, 표면에는 뚜렷한 인증의 자취나 시각적 표상이나 상기의 흔적이 대부분 지워져있다. 모든 사진이 우리에게 볼만한 이미지를 제시하거나 드러내는 것이라면 오히려 이 사진은 그것들을 꼭꼭 감추고 숨겨놓았다. 인화지 자체만을 즉물적으로 들이대는 느낌이다. 순간 보는 이의 시선이 무력감에 빠지고 공허해진다. 가시적인 영역에서 미끄러져 애매하고 모호한, 미세한 얼룩이나 선, 조짐을 예감시키는 상처만을 단서로 해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런 사진이다. 보는 것을 기계적으로 재현하고 추적하며 건져 올리는 사진의 속성과 힘을 맥빠지게 만드는 전략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인다. 그것은 사진에 대한 미니멀한 접근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을 최소화하고 대신 상상력과 기억, 보는 이의 참여와 개입을 독려하는 측면에 무게추가 기울어져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동양화의 여백에 가깝다. 그것은 비어있는 무의 공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기운으로 가득 찬, 기로 충만한 공간이다. 바람으로 채워진 화면이다. ● 그런가하면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 대상은 언어와 의미로 무장되어 있으며 특정한 코드로 인식되어진 것들이다. 그녀는 그렇게 '네이밍'된 모든 것들을 해체하고자 한다. 특정한 의미나 거창하고 무거운 담론의 그늘과 관념의 무게를 덜어내고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그래서 시욕과 의미로 번잡하고 무성한 이미지의 세계를 명상과 휴식으로 돌이켜 세우는 틈을 만들어 가는 것도 같다. 안과 겉을 구분하는 것, 처음과 끝, 탄생과 죽음 같은 경계 역시 지우고자 하며 그에 따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양도 없지만, 자발적으로 흐르는 의미 지어지지 않은 것들'에 주목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한 예로 선택된 것들이 바로 물, 불, 공기(바람),땅 즉 자연의 4원소다. 작가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 있는 것들, 특히 바람이나 땅, 물을 촬영하고 그것들을 오래도록 파인더를 통해 들여다보는 시간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순간을 영원토록 기록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경민은 그 '바람'을 찍었다. 바람을 촬영한 것인데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불가피 하게 나무를 매개로 끌어들였다. 결과적으로 눈에는 보이지 않는 바람을 촬영하였지만 가시적인 이미지는 나무만이 존재하게 된 그런 사진이 되었다. 결국 찍고자 한 것은 사진에서는 무로, 부재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 오랜 시간 노출을 주어 비로소 드러난 이미지는 무엇인가로 가득 찬(빈)공간에 아주 흐릿하고 미약한 자취, 선들로 머문다. 사진은 온통 무색, 딱히 설명하기 힘든 흐린 색조로 채워져 있다. 그 위에 바람에 의해 나무가 허공 속에서 조금씩 흔들리고 뒤척인 자국이 슬쩍 얹혀져 있다. 아주 오랜 시간을 바람의 자취를 추적한 이 사진에 시간은 영원성으로 무늬져 있다. 아니 시간은 결국 망각되어 버렸다. 늘 변함없이 지속성 아래 자리하는 이 바람이나 나무(사물)는 실은 항구적인 변화 속에 있는 것이다. 항구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미묘한 변화의 항구성일 뿐이다. 우리 눈은 바람이나 나무의 생애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아니 오래도록 그 바람만을 그렇게 쳐다볼 시간과 여유가 없을 것이다. ● 여기서 이경민의 눈/사진은 바로 그 일을 해낸다. 그녀는 오래도록 바람만을 바라보았다. 사물은 그저 있다. 사물은 말없음으로 존재를 증명한다. 그 자체로 있든, 그림으로 표현되었든, 사진 속에 나타났든 간에, 사물은 말없는 가운데 자신을 말한다. 물론 이는 바라보는 사람의 인상으로 가능하다. 사물의 존재방식은 이를 바라보는 나라는 주체에 의해 고찰되는 것이기에, 사물의 존재방식은 내 감각과 사고의 존재방식에 대한 고찰과 더불어 탐색되어야 한다. 이경민은 바람을 바라보면서 결국 자신의 초상, 몸을 만난다. ● 작가는 제자리에서 오랜 시간을 제 몸으로 뒤척이고 흔들리는 바람의 숨결과 호흡을, 나무의 몸을 조심스레 응시했다. 아무런 의도도 지니지 않은, 목적론적인 행위에서 벗어난 바람에 스침과 흔들림, 파동과 떨림이 보여주는 무욕과 무위의 한 극치를 그림자처럼 부감시킨다. 인화지는 그러한 바람결, 시간, 흔들림을 담담하게 기록한다. 이 기록성, 다큐멘터리는 사실 아무런 얘기도 해주지 않는 편이다. 그저 시간의 흐름만을 저장하고 있어 보인다. 묵언과 침묵이 공기처럼 내려 앉아있을 뿐이다.
드라마틱한 바람의 행적과 그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지워져있다. 심미적이랄까, 혹은 사진적 대상으로 자리한 바람에 대한 모든 가시적 결과 역시 증발되어있다. 보는 것들에 지친 눈들이 순간 명상에 휴식에 접어들 듯이, 우리들은 몸을 대지에 수평으로 눕히고 휴지기에 접어든 대지처럼 꿈꾼다. 이 텅 빈(텅 비어보이는) 사진은 그런 만큼 역설적으로 더 많은 상상과 몽상을 가능하게 한다. 그 자리에 바람의 존재가 다시 새롭게 다가온다.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까지 바라보기 위해서는 명료한 정신과 꿈의 상상력이 그래서 필요하다. 이 꿈과 상상력의 도움으로 우리는 사물의 배후를, 그 피부와 내부의 굴곡들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사물의 외관만이 아니라 그 내장까지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사물의 전체와 친해질 수 있으며 그 존재와 하나가 된다는 메시지가 은은하게 깔려있다. ■ 박영택
Vol.20040522b | 이경민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