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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04_0519_수요일_05:00pm
덕원갤러리_Dukwon Cube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5층 Tel. 02_723_7771
구성연 작업의 최종 결과는 분명 사진인데, 그것을 온전한 사진으로 분류해도 좋을지 사실 내겐 확신이 없다. 그의 사진은 거두절미한 채 이미지로서 말을 걸었던 저간의 사진들과 아무래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공중곡예처럼 연명하고 있는, 구성연의 우아한 모래 조각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을 '만들고 앉아 있었을' 그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넋이 나가는 한편 미소를 짓게 된다. 실용적 차원에서 예술가라는 직업군의 공헌도가 미미하다는 건 재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지만 그렇다 해도 이건 좀 심하다는 느낌이 퍼뜩 드는 것이다. 그는 이번에 사진 찍는 일보다 조각하는 일에 훨씬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인 것 같다. ● 대관절 한순간에 헛수고가 되고 마는 시행착오를 감수하면서까지 저 아슬아슬한 형상들을 빚어 낸 까닭은 뭘까? 그의 조각들은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는 중환자 같다. 돌과 청동으로 만들어진 조각들의 완강함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누구든 그렇게 느낄 것이다. 저기에 '손대지 마시오!' 따위의 경고문은 소용도 없다. 섬약하고 촉각적인 저 형태의 유일한 지주-수분이 증발하고 나면 손을 대든 말든 형상은 사라지고 말 테니까. 그는 경험으로부터 만들어져 뇌 속에 저장되었다가, 점차 희미해지고, 종국에는 소멸되고 마는 '기억'의 속성을 모래더미로 시각화하고자 했다. 따라서 모래 조각이 처음에 느끼게 하는 부질없음이 기억과 망각을 되풀이하는 우리 삶의 불명료함과 신비로움의 환유임을 눈치 채는 지점에서 그의 '헛수고'는 의미를 지니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토록 짧은 모래 조각의 생애가 사진이라는 흔해 빠진 매체를 만나는 대목에서 진짜 재미는 시작된다. 동시에 구성연의 어이없어 보이던 행동도 완전히 복권된다. 알다시피 사진은 초상화의 적자이고, 초상화는 젊음과 권력이 영속하지 않음을 잘 아는 인간이, 그나마 '잘 나가는' 현재의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고안해 낸 장르다. 요컨대 변화무쌍함을 고정시키는 순간 사진의 슬픈 매력은 꽃을 피우며, 그 꽃은 피사체가 사람, 혹은 사람의 체온을 간직한 흔적일 경우에 더 크고 화려해지는 법이다. 그렇다손 쳐도 사진 속 모델이 하루아침에 이승을 뜨지 않는 이상 어제 찍은 사진에서 부재의 상실감을 느끼기란 어렵지 않은가? 하지만 그의 모래 조각은 현상소에 사진을 찾으러 가기도 전에 이미 바람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렇듯 모래 조각의 일생은 사람의 생보다 짧고, 최후 또한 극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래 조각은 존재의 증명이자 부재의 증명인 사진의 이중성을 천하에 공개하는 데 가장 어울리는 피사체다.
한편 모래 고유의 단조로운 색감이 초창기 사진의 세피아 톤과 흡사하다는 점은 순전히 우연인데, 그의 작업이 사진의 원초적 속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면 꽤 그럴 듯한 것이어서, 그게 전부 의도였노라 거짓말을 해도 좋을 성싶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가 아는 구성연은 거짓말에 서툰 사람이다. 그는 저 백일몽 같은 모래 조각을 몇 시간씩 주무르면서도 콧노래를 불렀을, 조금은 엉뚱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눈앞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모래성'에서 '기억'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다시 그것을 사진이라는 허망한 매체에 담아 보여 줌으로써 그 앞에 선 관객까지 허망하게 만드는, 영리하고 짓궂은 사진가이기도 하다. ■ 김승현
Vol.20040519c | 구성연展 / KOOSEONGYOUN / 具成娟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