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4_0512_수요일_05: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2층 Tel. 02_725_9257
자연으로 드러난 숨은 신 ● 일명 '검정 색조의 방식'(maniere-noir)으로도 칭하는 메조틴트(Mezzotint)의 장점은 풍부하고 미묘한 중간 톤의 색조를 얻을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컬러보다는 흑백의 모노 톤의 화면에 더 적격이며, 그 느낌은 정적이고 내면적이다. 일면적으로 모노 톤의 한정된 색조만으로는 그 느낌이 단조로울 것 같지만 사실상 전혀 그렇지 않다. 먹을 오색(五色)에 비유하듯이 메조틴트에 나타난 흑색 또한 사실상 그 속에 모든 색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메조틴트는 사진이 발명되기 이전에 흑백의 내면적인 초상화를 제작하는 주요한 방법이었으며, 이는 메조틴트가 상대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묘사하는데 어울리는 판법임을 말해준다. ● 그러나 이와는 달리 순수 추상화에서처럼 묘사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대상을 가지지 못할 경우에는 그림이 자칫 구심점을 잃고 공허한 화면에 빠지기 쉽다. 또한 큰 화면보다는 작은 화면에 더 적절하며, 작은 화면에서 밀도감 있는 표현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치열한 장인정신과 이에 따른 인내심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가장 전통적인 판법 가운데 하나이다. 메조틴트는 무엇보다도 장식적인 화면에 가려져 있는 고도의 감각이 낳은 산물이다. 그 감각은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 아우라(Aura)를 포착해내는 능력인 것이며, 테크닉 이상의 아우라야말로 메조틴트 판화의 포인트이다.
박영심은 메조틴트 판법으로써 자연을 묘사한다. 제라늄이나 튤립 그리고 작약 등의 꽃, 뽕나무 잎이나 플라타너스 잎 그리고 사시나무 잎 등의 나뭇잎, 토마토나 서양 배 그리고 사과 등의 과일, 소라와 고둥 그리고 각종 조개류를 소재로 도입하고 있다. 화면에 등장하는 이러한 소재들의 사실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판화는 자연의 표면을 그대로 복제했다기보다는 그 이면에서의 상당정도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지층이 읽혀진다. 이를테면 평면의 검정색 화면은 마치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은유하며, 모든 사물의 감각적인 표면을 자기 속으로 불러들여 은폐시키는 고도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장치에 비유될 수 있다. 어두운 화면 속에서 사물의 형상이 서서히 드러내지는 과정이 그대로 혼돈의 와중에서 최초의 생명이 잉태되는 아득하고 먼 태고적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더불어 검은 화면은 무엇보다도 무의식의 지층을, 관념적인 공간을, 밤의 서정을, 자연의 신비를 열어 놓는다.
작가의 판화는 이렇듯 외관상의 사실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자연의 표면이 아닌, 그 이면의 자연의 신비를 보여준다. 그 자연의 신비는 자연의 감각적 표면을 경유한 연후에나, 그리고 자연의 감각적 표면을 매개로 한 사유를 통해서만 닿을 수 있는 것으로서, 그 자체는 자연의 본질 곧 자연성에 접맥돼 있다. 자연성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게로 소급된다. 그에게서 자연은 모든 감각적인 것들을 낳는 원인이며, 운동의 내적 원리이며, 사물의 생장이 시작되는 시점이며, 사물의 기원이며, 사물의 본질이다. 한마디로 자연이란 감각적 표면으로 드러난 형상 자체라기보다는 이를 낳는 생산원리이다. 예술가는 이러한 자연을 모방해야 하며, 이때의 자연이란 자연이 작용하는 방식과 과정과 원리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자연의 이념을 감각적으로 드러내는 이성적인 능력인 것이다. 예술가는 자연을 모방해야 한다는 이 신념은 자연을 그 자체 완전한 신의 피조물로 본 중세의 신학과 맞물리면서 일종의 기독교적인 도상학의 한 전형으로서 자리잡는다. 이로써 기독교 신학에서의 자연은 신의 편재성(遍在性)을 증명하는 한 표상이 된다. 그러니까 자연은 모든 곳에 있는 보이지 않는 신(숨은 신)을 보이게 하고 드러나게 하는 상징의 한 형식, 암시의 한 형식인 셈이다. 박영심의 자연에 대한 관념이 접속돼 있는 지점 또한 바로 여기이다.
작가에게서 자연은 말하자면 '들에 핀 백합과 공중을 나는 새'를 키우고 보살피는 신의 사랑이 나타난 표상이다. 그런가하면 작가의 작업 중 특히 단단한 껍질의 소라와 고둥은 마치 교회와도 같은 신의 집이다. 세속적인 욕망으로부터의 일종의 보호막 역할을 해주는 그 집 속에 작가는 기꺼이 기거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귀를 바다소리를 듣는 소라에 비유한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Mallarme)의 시에서처럼 작가의 작업에 나타난 소라 껍질은 수평선 너머의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길어 올려진 희미해진 기억과 그리움의 편린들을 복원해낸다. 또한 어두운 심연 저편으로부터 들려오는 신의 말씀을 듣는 귀이기도 하다. 그 귀가 맞닿아져 있는 칠흑과도 같이 어두운 화면은 어둠 속에 거하며 이따금씩 빛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신이 거하는 집이다. 이렇듯 어둠 속에 숨은 신이야말로 신의 본질이며, 그 존재의 신비함이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의식과 심연, 미지와 어둠은 실상 동일자인 신(자연)의 신비를 드러내기 위한 똑같은 기호이고 단서이다. 그러므로 신은 상징과 암시라고 하는 최소한의 감각적 형식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내며, 박영심의 화면에 나타난 자연 소재는 다름 아닌 이런 신의 현시(顯示)를 위한 것이다. 이는 그대로 존재자의 진리를 작품 가운데 정립시키는 것에서 예술작품의 본질을 본 하이데거(Heidegger, Martin)의 예술 관념과도 통한다. 즉 예술작품이란 사물적인 것(자연 소재로 나타난 감각적인 형상) 자체에 그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서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를 개시하고 드러내는 진리의 장을 성립시키는 것에 있다. 이런 예술작품 속에 존재자의 진리가 은폐되어져 있으며, 이는 그대로 숨은 신의 생리와도 통한다.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자연 소재를 통해서 신의 상징을 읽게 하는 것, 그 감각적인 형상이 신의 암시로 드러나게 하는 것에 맞춰져 있다. ● 그 자체 신의 섭리와도 겹치는 자연의 섭리는 작가의 작업에서 일종의 순환원리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꽃은 봄, 소라와 고둥은 여름, 나뭇잎은 가을, 그리고 과일은 겨울을 암시하며, 사시사철 순환하는 계절의 이미지와 함께 변화하는 시간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작가의 작업에 나타난 자연 소재는 신의 편재성을 증명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연의 순환원리를 드러낸다. 이를 위해 상징적 문법이 도입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작가의 작업은 현저하게 문학적이고 서술적으로 읽혀진다. 시(詩)를 예로 들자면 드라마와 스펙터클이 있는 서사시보다는 암시적이고 비의적인 서정시에 가깝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여성적인 감수성이 느껴진다. 이는 어둠이 숨기고 있는 신성, 자연이 열어 보이는 비의, 자연의 순환원리에 대한 긍정이 마치 벨벳처럼 부드러운 표면질감과 결합한 형태로 나타난다. 러스킨(John Ruskin)은 예술을 사랑으로, 자연과의 융합으로, 그리고 종교로 보았다. 이러한 러스킨의 예술 관념은 그대로 박영심의 작품에 나타난 예술 관념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즉, 작가는 노동과 반복작업에 의해 점차 밝게 그 실체를 드러내는 사물의 모습을 통해서 사물의 감각적 표면이 숨기고 있는 신의 사랑을, 그리고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 더불어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소형 판화를 한 질로 묶어낸 판화집과 장서표(藏書票) 그리고 이미지와 문자 텍스트가 공존하는 아트북을 내놓고 있다. 이 가운데 장서표는 보통 명함 정도 크기의 종이에다 책을 뜻하는 문자 'Exlibris'와 함께 목판이나 동판으로 찍은 소형 판화를 책의 표지 안쪽에 붙여 책의 소유주를 명시한 것이다. ■ 고충환
Vol.20040513c | 박영심 판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