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4_0512_수요일_06:00pm
인사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29-23번지 Tel. 02_735_2655
콤플렉스-소통의 단절과 갈구 ● 땅을 딛고선 사람의 역사 속에서 예술은 함께 호흡하며 그 생명력을 유지해 왔으며, 비록 물질화가 극단으로 치닫는 현대 사회 속에서도 예술은 사람의 삶 속에 용해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개별화되고 개인화된 사회 속에서 서로를 소외시키는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에서도 예술은 단절과 고립의 절망의 언어가 아닌 무모하도록 희망적인 언어로 살아남아야 한다. "삶은... 사람은... 예술과 함께 있다." (주연수) ● I. 사람, 그리고... 그러나 ● '나'는 분명 '너'와 분리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와 '너'가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타인에게 이해와 사랑받는 것을 꿈꾸며 '내'가 '너'에게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역설적으로 '나' 안에 '너'를 집어 넣을려고 하지는 않는다. 자아와 타자는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이질적인 색채와 이분화된 형태의 꿈을 꾼다. ● 주연수는 인간을 그린다. 정확히 말하면 사회적 상황 속에서 비틀거리는 존재의 고백을 형상화한다. 인간 형상은 검정에 가까운 갈색, 청색, 자주빛의 암흑 같은 배경 위에 겨우 식별될 수 있을 정도로 해체되고 물감범벅으로 짓이겨져 있다. 어둡고 암울한 그리고 짓이겨진 육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인간. 작가는 이것을 콤플렉스로 설명한다. 타인에게 많이 이해받고 사랑받는 사람이 콤플렉스에 빠지는 일은 드물다. 반대로 타인에게 자신을 설명할 수 없고 이해시킬 수 없는 상황 속의 사람은 일반적으로 콤플렉스를 갖는다. 주연수는 콤플렉스를 소통의 부재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작가는 소통의 부재로 인해 느끼는 소외, 고독, 때로는 분노, 타인과의 불완전하고 불균형의 감정을 콤플렉스의 원인으로 생각한다. 소통의 부재, 단절, 고립 속에서도 인간은 타인과 부대낄 수 밖에 없고 어떤 양상으로든 관계를 맺지 않을 수가 없다. 어긋나 버린 관계는 잘못 끼워진 단추처럼 인간을 더욱 고독하게 하고 소외시킬 뿐이다.
주연수의 어둡고 암울한 사각의 벽에 갇혀 찢겨지고 해체된 인간 형상은 장 포트리에의 「인질」 연작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주연수는 포트리에에게 관심이 없으며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다. 포트리에는 「인질」 연작에서 제2차 대전 당시 고문받고, 살점이 찢어지고, 구타당하며 인간으로서 일말의 존엄성 조차도 보장받지 못한 살 덩어리로서의 인간 육체를 형상화하여 인간성 상실의 시대를 고발하였다. 주연수가 보여주는 인간은 육체라기 보다 낯선 사람들의 생소한 시선 속에서 고립과 소외를 느끼는 인간 내면의 모습이다. 다시 말해 형상이 짓이겨지고 해체된 것은 육체가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받은 내적 상처이며 또한 깊은 고독과 소외감을 토하는 우리들의 내적 고백이다. 주연수의 암흑과도 같은 어두운 화면은 소통의 단절에 대한 자아의 극단적인 절망으로 보이지만 그는 삶, 예술, 인간은 함께 있어야 하고, 함께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소통으로 나아갈 것을 호소한다. 절망은 절망적으로 보일 뿐이다. 이것은 희망의 이면이며, 희망의 간절한 바램을 내포하고 있는 역설일 수 있다. 주연수는 '그리고', '그러나'의 단어로 희망의 대안을 찾는다. '그리고'는 상황의 연결을 의미하며, '그러나'는 반전을 지시한다. 우리의 삶은 소통의 시도, 단절, 부재 '그리고' 절망, '그러나' 소통의 재시도, 희망으로 나아갈 것이다. ● 주연수가 제시한 작품 「이것은 나이다 그리고 내가 아니다」는 혼자 고립된 인간이면서 동시에 내가 누구인지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지시한다. 오늘날 고립의 의미로서 개별화는 급속도로 빠르게 진행되지만 각자의 개성, 인격의 존중과 정체성은 상실되어 가고 있다. 사람은 점점 혼자가 되어가지만 개인의 인격과 개성은 몰살되고 대중이라는 익명의 집단으로 분류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대중이라는 익명의 집단 안에서 소외를 느낀다. 주연수 회화의 인간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질문한다.
II. 놀자~~ ● 주연수의 소통에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은 '놀자~~' 테마에서 분명해진다. 어두운 화면 속에서 꿈틀거리는 형상은 하나이기도 하고 또한 여럿이 어울려 있다. 그가 제안하는 놀이는 절대로 혼자할 수 없는 것이다. 「고무줄 놀이」, 「술래잡기」, 「공기놀이」 등은 여럿이 함께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가능한 집단적인 놀이들이다. 이 테마는 크레모니니의 회화를 떠올리게 한다. 크레모니니는 아이들이 함께 놀이하는 주제를 통해 인간 심리 저변에 감추어져 있는 욕망의 근원들을 파헤쳤다. 크레모니니가 제시하는 욕망의 기원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주연수는 크레모니니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음을 분명히 밝히지만 양식적으로 전혀 유사하지 않다. 그의 화면에서 아이들의 놀이는 구체적인 형상을 띠고 있지도 않으며 분명한 이론적 해석을 제시하고 있지도 않다. 주연수가 형상화한 '놀이~~' 테마는 아이들의 놀이를 직접적으로 포착했다기 보다 어른들이 어린 시절에 동네 친구들과 놀았던 추억의 한 장면으로 느껴진다. 아파트나 주택가 골목에서 「고무줄 놀이」, 「공기 놀이」, 「술레잡기」를 하는 아이들을 지금 볼 수 있을까. 지금의 아이들은 컴퓨터 앞에서 전자 게임으로 시간을 씹어 먹으며 혼자 생각하고, 혼자 웃고, 혼자 재미있어 하거나 짜증을 내면서 놀이한다. 주연수의 '놀자~~' 테마는 누군가와 함께 웃고, 떠들며 놀고 싶다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닫힌 공간 안에서 혼자서 표류하는 현대인에게 '함께' 하고픈 잃어버린 희망을 찾게 만든다. '놀자~~' 테마는 물질화된 사회 구조 속에서 개별화되고 고립된 사람들에게 모두가 함께 생각과 놀이를 공유했던 소통의 시간들을 추억하도록 제안하는 것이다. 이것은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향수이자 소통의 부재와 단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희망을 의미한다.
주연수는 신문지, 청계천 주변에 버려진 철사류의 오브제, 용도폐기용의 여러 산업 쓰레기들을 주워 모아 오브제 작업을 하면서 잃어버린 시간들의 추억을 상기시킨다. 새로운 것은 낯선 것이다. 낡은 것은 인식 그리고 반가움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소통의 교환이다. 주연수의 어둡고 다듬어지지 않은 인간형상은 낡은 고물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음울하고 괴기스러울 만큼 왜곡되고 해체된 형태를 타인의 낯선 시선에 의해 움추러드는 인간의 내적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주연수는 낯선 시선에서 벗어난 인간의 모습을 추구한다. 그는 타성적이고 인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을 거부한다. 즉 그의 어두운 색채와 왜곡된 형태는 절망이 아니라 습관화된 인간 사고에 대한 거부의 몸부림이다. 화장, 세련된 얼굴과 몸매, 고운 옷 등은 불안, 고독, 타인에 의해 흠집나고 상처받은 내면을 감추고 있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이 허물을 벗겨내고자 한다. 암울하게 해체된 인간 형상을 통해 주연수가 의도하는 것은 진솔함을 꿈꾸는 인간의 내적 진실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는 내면을 강조하기 위해 외면을 의도적으로 추하게 해체시켰다. 주연수는 내적인 소통의 가능성을 위해 외면의 가식적인 아름다움을 버린 것이다. ● '너'를 '나' 안에 들어오게 하는 소통은 그것을 간절히 희망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주연수는 함께 '놀자~~' 라고 외친다. 주연수의 어둠고 암울한 인간들이 외치는 '놀자~~' 테마는 단절과 소외의 고독을 벗어나게 하는 희망의 제안이다. ■ 김현화
Vol.20040512a | 주연수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