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4_0504_화요일_06:00pm
갤러리소리연 서울 서초구 방배3동 1025-2번지 태경빌딩 1층 Tel. 02_521_4003
정재식의 조각_파토스와 풍자로 나타난 사실주의 조각 ● 1. 첫 전시 이후 불과 일 년만의 정재식의 두 번째 전시이다. 대리석과 화강암 그리고 오석 등의 자연석을 재료로 한 것이라든가, 여기에 인체를 사실적인 방법으로 직조한 것 등에서 느껴지는 바는 지난 1년 간 작가가 작품에 기울인 남다른 열정이다. 작가의 조각이 갖는 미덕은 의외로 기본적인 것에 있다. 가장 전통적인 조각의 재료인 자연석과 가장 전통적인 조각의 소재인 인체를 근간으로 하여 이를 직조한다는 것이다. 이때 흔히 그렇듯 인체를 추상화하거나 양식화하기보다는 사실적으로 모사(模寫)하고 있는데, 이는 기술적인 면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인체의 포즈가 작가의 조각에서처럼 한눈에 드러나 보이는 동세표현이나 운동성을 포함하고 있을 때에는 더욱이 그러하다. 이를테면 브론즈나 폴리 소재의 캐스팅을 위한 점토 소성 과정에서는 그 속에다 각목이나 철근 등의 심을 넣어 형태를 유지할 수 있겠지만, 자연석을 재료로 한 직조에서는 자칫하면 돌이 깨어져 원하는 형태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연석을 재료로 한 사실적인 인체 조각이 흔치 않은 데에는 이런 기술적인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의 조각은 가장 전통적인 재료와 소재를 매개로 해서 인체의 자유자재한 동세 표현을 실현한 사실주의 조각의 맥을 이어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작업의 지난한 과정과 함께 땀의 채취가 그대로 전해지는 정직한 노동에 대한 신념이 놓여 있다.
참고로, 사실주의와 현실주의를 구별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그 자체 자연주의와도 통하는 사실주의가 전통적인 조형문법인 사물과 대상의 재현에 그 맥이 닿아 있다면, 현실주의는 현실 참여적인 성격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사물과 대상의 외관에 대한 닮은꼴이 사실주의에서는 기본이지만, 현실주의에서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주의와 현실주의는 그 이면에서 서로 통한다. 대상과의 닮은꼴이 이미지의 선입견과 편견으로 자리하고 있는 만큼 객관성이나 보편성과 같은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여지도 크기 때문이다. 사실주의와 현실주의와의 이런 미묘한 관계는 다음과 같은 로댕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즉 '유일한 예술의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자연을 수정하거나 변경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연을 정확하게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을 정확하게 본다는 것은 세계와 대면한 주체의 체험에 바탕을 둔 시각 즉 심안(心眼)으로써 자연을 꿰뚫어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심안에 포착된 자연은 해부학의 경계를 넘어, 인간실존에 대한 공감과 자의식 그리고 파토스의 표출을 가능하게 한다. 정재식의 인체 조각이 그러하다. 그의 조각이 기본적으로는 해부학에 대한 충실한 모사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이면에서는 가려진 인간 내면의 파토스와 함께 풍자와 같은 비판의식을 표출시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사실주의와 현실주의 모두를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정재식의 조각에 나타난 몸은 단순한 해부학의 반영을 넘어서 인간의 정념이 펼쳐진 지각의 장이며, 삶의 사건이 전개되는 메시지의 장으로 기능한다.
2. 정재식의 조각을 일별해보면 전신상과 함께 인체의 특정 부위를 극대화한 작품이 주를 이룬다. 전신상은 세부를 상세하게 모사하기보다는 개략적인 골격만을 노출시키고 있으며, 게다가 다리와 같은 신체 중 일부는 생략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개략적인 신체가 미처 형상화를 얻지 못한 채 남겨진 돌덩어리와 일체를 이루고 있는가 하면, 머리마저 최소한의 암시적인 형태로만 제시돼 있어서 보기에 따라서는 미완(未完)의 느낌마저 든다. 그런데 이런 미완의 느낌이 오히려 생동감과 함께 생명력을 강조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역동적인 동세 표현과 해부학적인 근육의 강조와 같은 사실적인 접근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재현하고자 하는 의지보다는 일말의 암시적인 분위기가 전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형상화를 얻지 못한 부분과 암시적인 부분이 하나로 구조화된 신체는 그 자체 하나의 신체로서보다는 그 신체가 유래한 돌의 물성과 함께, 돌 속에서 신체가 잉태되는 과정을 드러낸다. 그 자체 무생물인 돌덩어리로부터 꿈틀거리며 태어나고 있는 신체, 익명과 무명의 추상적인 돌덩어리가 어떤 선명한 주체로서 탈바꿈하고 있는 듯 읽혀진다.
형상화를 얻지 못한 채 여전히 돌 속에 파묻힌 발이 단단한 돌(대지)을 딛고 선 주체의 의지를 시사하는가 하면, 실재보다 크게 두드러져 보이는 손이 주체의 이상을 암시한다. 손은 자신의 몸통보다 큰손을 온몸으로 짊어지고 있는 조상으로도 나타나는데, 여기서 손은 마치 손을 신성한 교회에 비유한 로댕의 경우에서처럼 작가의 이상주의자적 측면을 드러낸다. 실제로 작가의 전신상은 외관상의 동세 표현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절제되고 내면적인 경향성으로 인해 고전주의의 이상주의 조각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그 조상(彫像)은 어떤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데, 이때 그가 쳐다보고 있는 그 먼 곳이란 사실은 자기 내면이나 다름없다. 이로써 전신상은 작가가 자기의 안쪽을 들여다보기 위한 자기 반성적인 계기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전신상이 자기의 안쪽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팔이나 다리 그리고 얼굴과 같은 신체의 부분을 소재로 한 조각들은 자기의 바깥쪽을 들여다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자기 외부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작가 자신의 반응을 표출시킨 것이다. 이것들은 전신상에 비해 근육의 세부 묘사 등의 사실적인 재현에 충실한 편이며, 나아가 뒤틀리고 왜곡되고 강조된 근육질이 표현성마저 획득하고 있다. 이런 의도된 강조는 그 자체 하나의 표정으로서 읽혀지며, 이는 그대로 자기 외부를 향한 풍자와 같은 일종의 비판의식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누군가를 손가락으로 지목하고 있는, 입술을 앞으로 쑥 내민 얼굴의 조상은 분명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조소하고 있으며, 그리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한껏 입을 벌리고 있는 얼굴의 조상은 마치 뭉크의 그림 속 주인공처럼 무언가를 보고 경악하거나 절규하고 있다. 그리고 잔뜩 힘을 주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근육을 보여주고 있는 발과 팔이 극적인 긴장감과 함께 일말의 비장감에 젖게 한다.
이러한 신체의 일부분을 소재로 한 조각들에 대한 인상은 일종의 암시적인 표정을 띠는데 반해,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보다 직접적이다. 이는 그대로 일종의 사회학적인 기호와 반응 그리고 메시지와 동일시된다(얼굴에 나타난 표정이 사회학적인 기호의 한 형식이라면, 머리는 그 자체 가치 중립적이고 중성적인 인간에게 남겨진 동물성의 한 표상이다). 그리고 이로부터는 전신상에서 볼 수 있는 이상화된 표현과는 다른,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정직한 표현이 읽혀진다. 한편,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조각을 전시하는데 있어서 종전처럼 조각을 올려놓기 위한 좌대를 따로 준비하지 않는다. 대신, 굵고 그 결이 거친 철근을 중심으로 해서 그 위쪽으로는 조각을, 그리고 그 아래쪽에는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각각 매달아 이를 공간에 세우는 방법을 취했다. 봉과 자연석 그리고 조각이 유기적인 일체를 이루게 한 설치 방법으로써 작가는 조각과 공간이 상호 작용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공간 역학에로까지 작업의 범주를 증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신상은 실제 작업 과정에 사용된 굵은 각목을 우물 정자(井)로 쌓아 그 위에다가 조각을 올려놓는다. 이는 좌대가 주는 이질감을 해소하는 동시에 실제의 작업 과정 자체를 전시의 한 개념으로 끌어들이려는 작가의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정재식의 조각에 대해 정리해보자면, 전신상과 인체의 부분을 소재로 한 조각으로써 각각 자기 내부를 향하는 조각과 자기 외부를 향하는 조각, 자기 반성적인 조각과 풍자적인 조각을 각각 대비시키고 있다. 내적으로는 인간 내면의 파토스를 표출시키고, 외적으로는 풍자로 나타난 사회적 비판 기능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 고충환
Vol.20040504b | 정재식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