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길을 묻다

제16회 회화정신展   2004_0428 ▶ 2004_0504

권여현_미인도_사진에 혼합재료_120×80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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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428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권여현_김경선_김종현_김현철_류지선_박영근_박영대_배성환_서효숙_신장식 오재규_윤종구_이상봉_이은숙_이인애_이인희_이정태_이종송 이혜경_임현락_전성규_정상곤_지원진_최진주

갤러리 라메르 서울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 Tel. 02_730_5454

회화정신이라는 이름을 공유하는 그림 그리는 사람들의 모임이 그새 열 여섯 번째 전시를 꾸린다. 새삼스럽게 같이 그림을 출품해온 내게 글을 쓰는 기회가 주어졌다. 새삼스럽게, 주어졌다! 회화나 정신 혹은 회화정신, 그리고 회화의 길에 관해서, 나는 어줍잖게나마 간신히 내 입장을 얼버무릴 정도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그리고 발표하는 그림을 통해서 가능했고, 그림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나는 한 사람의 작가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각이며 입장이며 또한 한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입장은 때로 모호하고 어설프지만, 또한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런 나의 작가적 입장이 이 작은 글쓰기에서도 여전히 반영될 수밖에 없다. ● 나는 우선 내 생각을 개진하기에 앞서 그간 함께 전시를 꾸려온 다른 작가들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나는 근래 개설된 '회화정신 그룹의 온라인 컴뮤니티'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올려놓았다.

김경선_浮游-봄 듣는 소리_장지에 수묵담채_60×60cm_2004
김종현_옥수수_캔버스에 유채_122×81.5cm_2003
김현철_지영제색(芝英霽色)_삼베에 담채_34×181cm_2003
류지선_백일과 만일_종이에 아크릴과 목탄_70×100cm_2004

"회화정신이란 무엇인가?" 당돌한 질문에, 고맙게도, 여러 작가들이 다음과 같은 응답을 보내왔다. ● 변화의 가능성을 찾아 뚜벅뚜벅 걸어가는 청년정신이다. (1) ● 모든 개념이 바뀌고 더해지듯이, 회화의 근본도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회화 안에도 변하지 않는 요체도 있지만 현 시점에서 그릴 수 있는 회화의 울타리는 19세기와 다르다. 나는 '현재'를 사는 사람이므로 과거와 다른 회화정신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회화정신은 바로, 작가의 동시대를 보는 눈이다. (2) ● 세상이 우리를 귀찮게 해도 우리 작가들끼리라도 서로 귀찮게 하지말고 그저 재미있는 일 자주 만들어 같이 잘 놀자고 하는 것. (3) ● 글쎄, 너무 광범위하고 막막한 느낌이다. 개인적 관점이나 태도라면 모를까. (4) ● 겉으로 보기에 이 시대는 너무나 타락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도 크게 감동하지 않는 세대, 잔인한 인간의 면모를 보고도 놀라지 않는 세대 - 그 속에서 작가는 어떤 선구자적 정신을 지녀야 하는가. (5) ● '회화정신'에서 그 정신이란 단어가 늘 부담이다. 회화가 뭔가 다른 장르와는 좀 차별화 되는 뭔가 다른 정신성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정신(?)없는 장르가 있겠는가? 시대 반영의 거울로서 충실하면 이미 정신성이 내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고, 그 출구를 회화라는 방식으로 찾는다 여기면 되지 않을까? '회화정신'을 회화와 정신으로 나누어 각기 독립된 개념으로 이해하면 우린 그냥 그림을 그리면 되는 것 같고, 회화를 정신에 종속된 개념으로 이해하면 우리에겐 좀 더 형식에 있어 자유가 부여되고, 좀 더 시대 담론에 대해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6) ● 회화정신이 뭔지 별로 고민한 적이 없다. 회화라는 일반적인 용어만 놓고 보면 너무 넓어서 정의 내리기가 모호하지만, 늘 깨어있는 작가가 선택한 내용과 형식이라면 모두 회화정신의 범주에 포함시켜도 된다. 어차피 회화정신에 기초하지 않은 작업은 없을 테니까. 그러므로 회화정신이란, 새로운 그림에 관한 연습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괜히 심각해지지 말고, 자기에게 솔직하기. 또는 용감해지기. (7) ● 간단하지만 이 언급들을 일별 하면, 대개는 회화라는 형식의 문제보다 정신이라는 내용의 문제에 더 많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형식과 내용을 함께 언급한 대답(6,7)이 없지 않지만, 흔히 요새 현대미술에서 거론하는 '회화'라는 전통적인 개념이 내포하는 가치는 여기서 별로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 정신적인 문제를 언급한 내용을 정리하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작가의 개인적인 관점과 시선의 문제(1, 3, 4, 5, 7)이고, 또 하나는 그것이 동시대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느냐 하는 점(2, 6)이다.

박영근_A balance_모노프린트_50×74cm_2004
박영대_2004년 4월 10일 광주_종이에 수묵_105×171cm_종이에 수묵_2004
배성환_무제-2004_종이에 채색_100×100cm_2004
서효숙_In the begining_펄프 프린팅_60×120cm_2003
신장식_금강산 양지대_캔버스에 한지와 아크릴채색_45.5×91cm_2004
오재규_Dandelion Seed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72.7cm_2004
윤종구_사각형 그리기_비디오 영상 스틸 이미지_2004

이 대답들을 정리하면 이렇다. 작가는 각자 주어진 삶 속에서 가장 진실되고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꾸준히 묻는 존재이다. 작가는 세상을 늘 깨어있는 눈으로 보고자하며, 자기 앞의 길을 부단히 회의하고 성찰한다. 변화의 가능성을 항상 열어놓는 반면, 심각한 매너리즘을 경계한다. 벌거벗은 자아의 진솔함을 추구하며, 늘 투명한 감수성을 지니고자 한다. 이러한 개인적인 관점과 시선은 늘 동시대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동시대를 보는 작가의 눈은 그러므로 시대 반영의 거울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여기서 작품이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한 흔적과 다르지 않다. 이들이 선택한 틀은 회화이다. 회화란 무엇인가. 칠하고 그리는 것. 입체적인 조각이나 설치 등의 형식과 구별되는 평면적인 형식. 동적인 영상 등과 대별되는 정적인 형식. 이런 개념 정의는 사실 위에서 언급한 작가들의 태도에서 보건대 썩 바람직하지 않다. 나를 포함하여 이 작가들은 오히려 여타 장르의 기본으로써 회화가 갖은 본질적인 덕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 밋밋한 종이나 나무, 천, 혹은 컴퓨터화면이나 인화지 위에, 이들은 여전히 오랫동안 다른 작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각자 선택한 어떤 대상을, 그리고 붙이고 찍는다. 이 종이, 나무, 천, 컴퓨터 화면, 인화지 따위는 기실 한 줌의 물질에 불과하다. ● 이를테면, 해남 윤씨 종가 소장인 공재 윤두서 자화상은 기껏해야 길이 한 자 남짓 되는 종이조각이다. 나는 그 그림을 직접 보기 전까지 한갓 종이조각으로 알았다. 교과서에 실려있는 것은 내게 어떤 느낌도 주지 못했다. 이미 다른 사람이 부여한 의미가 내 느낌을 규정하지 못했다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이상봉_기호의 집_한지에 연필 프로타주_79×119cm_2004
이은숙_황사(黃砂)_한지에 먹_170×130cm_2003
이인애_나무 이야기(04-1C)_한지에 수간안료_31×122cm_2004
이인희_무제_혼합재료_115×31cm_2004
이정태_대화對話_캔버스에 유채_60×120cm_2003
이종송_움직이는산-설악_한지에 천연안료, 흙벽화기법_각각 198×61cm_2004
이혜경_생명예찬_한지에 천연염색_100×60cm_2004

한편 나는 다른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를 확인하고 싶었다. 종가에 내려가 그림을 보고자 했을 때, 금고 속에 집어넣고 보여주지 않는 사람들의 태도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중에 서울의 한 미술관에 이 작품이 전시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달음에 달려가 확인하고는, 생각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공재는 삼사백년 시공을 넘어 여전히 그림 속에 살아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히려 조상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내보이지 않으려 했던 종가 사람들의 어엿한 마음에 감사하게 되었다. ● 나는 지금도 공재의 자화상을 처음 만나던 순간의 생생한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인물화의 가치는 전신사조(傳神寫照)를 추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물론 이것은 형태를 통해서 가능하지만, 형태를 뛰어넘는 어떤 정신적인 작용을 말하고자 한다. 내 경험으로 보건대 그건, 그림 속의 대상이 살아있는 실체로 파악되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공재의 육신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지만, 공재의 영혼은 한 장의 종이를 통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를 보는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있는 실체로 다가오는 것이다. ● 공재는 자화상 속의 자아가 생생한 느낌을 풍길 수 있도록 오랫동안 흐린 놋거울 앞에서 자신을 마주했을 것이다. 그는 스승도 없이, 고씨화보(顧氏畵譜)나 당시화보(唐詩畵譜) 따위를 들여다보며 그림 그리는 방식에 대해 탐구하는 한편, 실제 대상의 섭리를 파악하기 위해 오랫동안 관찰한 후 붓을 들고 꺾는 집요한 과정을 되풀이했을 것이다. 말을 그리기 위해 온종일 냄새나는 마구간에 살다시피 해서 한 점의 말 그림이 이루어지자 말이 쓰러져 죽어버렸다는 전설은 그의 집요함을 조금 과장한 데 지나지 않는다. ● 공재는 자신의 그림에 대한 관점을 밝힌 『기졸(記拙)』의 「화평(畵評)」에서 자신의 이러한 집요함의 결과인 그림에 대해, "잘된 데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화도(畵道)에서 보면 보잘 것 없다"고 자평했다.

임현락_겨울나무_종이에 목탄, 콘테, 파스텔_106×75cm_2002
전성규_Relationship_혼합재료_91×52cm_2004
정상곤_인용-forbidden_천에 혼합재료_120×170cm_2004

작가가 작가다운 것은 이와 같은 부정의 정신에 있다. 남들이 해온 기존의 방식을 면밀히 점검하고, 그 중에서 자신의 체질에 맞는 형식과 내용을 취사선택한 후에, 부단한 연습과정을 통해 자신을 극복하고 갱신하는 실험정신이 바로 작가정신이다. ● 그 완성을 향한 목표를 공재는 화도(畵道)라고 했다. '그림의 길'이다. 공재가 말한 그림의 길은 무엇인가. 역시 같은 기록에서 공재는 이렇게 말한다. ● 세상 만물의 생태와 성정을 두루 알고 가늠할 수 있는 것은 화식(畵識)과 화학(畵學)이다. 자로 잰 듯 정확한 것은 화공(畵工)이고, 마음먹은 대로 손이 가는 것을 화재(畵才)라 한다. 이를 두루 다 갖추면 화도(畵道)가 이루어진다. ● 이로써 미루어보면 그림의 길이란 결국 세상을 마주하는 작가의 눈과 마음, 한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이 지녀야할 성숙한 시대정신과 다르지 않다. 이는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와 당연히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 공재는 한 진솔한 자연인으로서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한편, 동시대의 문제를 온몸으로 감내하는 지식인으로서 초월적 인간을 그려내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공재를 대하는 마음은 자연인으로서의 공재뿐만 아니라 공재 속에 내재하는 초월적 개인,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에 해당하는 근원적 인간의 문제를 아우르는 것이다.

지원진_침묵의 소리 2004-04(moving image)_옐로우 페이지에 잉크_20×30cm_2004
최진주_섬_장지에 먹과 채색_40×50cm_2004

이번 『회화정신』展의 부제는 "다시 길을 묻다"이다. 여기서 길은 바로 공재가 말한 화도 ,곧 그림의 길이면서 동시에 '삶의 길'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간다. 그 길의 운명에 대해서 작가는 태생적으로 회의하고 반추한다. 그러니 길을 걷다가도 다시 길을 물을 수밖에 없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갈 것이며 어디쯤 서 있는가. 그 수많은 길 찾기의 흔적, 무수한 갈래 길에서 배회하며 던졌던 물음들이 이번에 출품하는 그림들이다. ■ 박영대

Vol.20040430a | 제16회 회화정신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