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4_0428_수요일_05:00pm
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특관 Tel. 02_733_6469
인공의 팽창과 시뮬라크르 ●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고착된 절대 영원한 그 무엇은 없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불확실한 상태로 진행하는 유동의 존재(자)로서, 우리의 경험적인 시각에서 출현과 소멸의 회귀적인 속성을 가지는 "생성-변성 devenir-forme" 속에서 이해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자연과학적인 도식에 이와 같은 발생론을 적용한 다윈의 "진화론"이 아니라, 우리의 인지 영역을 넘어 존재하는 어떤 형이상학적인 물질(matiere 질료)에 대한 탐구와 추적에 관계한다. ● 이러한 맥락에서 예컨대 최초의 개념적 출발로서 원형을 자연(능산적 자연 nature naturante)이라고 할 때, 이를 잠식하는 개념적 진행 다시 말해 마치 밭을 경작하듯이 조금씩 침해하는 반-자연적인 물질을 문화(culture)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화는 보다 엄밀히 말해 언제나 진행하는 운동자로서 필연적으로 서로 대립적인 두 가지 측면(소산적 자연 narure naturee)을 생산한다.
문화적 진행은 한편으로 오랜 시간의 경과와 사건들의 축적으로 끝없는 물질적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인공이라는 새로운 모조물(artifice)을 생산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인공의 부화와 동시에 전복과 파괴의 시뮬라크르(simulacre)를 잉태한다. 현대성의 변증법은 바로 이러한 두 관계 즉 인공의 출현과 시뮬라크르의 잠재성(simulation)으로 특징지어 진다. ● 인공물과 시뮬라크르는 자연을 잠식하는 진행자라는 점에서 서로 공통적인 특징을 가진다. 그러나 인공과 시뮬라크르는 전혀 다른 본성을 가지고 있다. 보이는 세계에 드러나는 인공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물질의 풍요를 가져다주면서 태생적으로 질서와 조화 속에서 자신이 쌓아온 것에 대한 보존과 영속의 속성을 가지며 자라난다. 인공은 자신이 수립한 복사물들의 질서를 보존하기 위해 그 복사물의 모델들 즉 자연을 파괴하면서 본성이 바뀌어 시뮬라크르에 의해 전복될 때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시뮬라크르는 현대성이 최대의 팽창력 혹은 지배력을 가질 때, 바로 그 지점에서 인공과 서로 대립하여 마침내 창조를 위한 혼돈을 내보내면서 인공물이 수립한 질서를 전복시킨다. 그것은 오히려 위대한 창조를 위한 새로운 생성(genese)의 출현이기도 하다. 예컨대 팝아트에서 앤디 와홀의 유령화 된 먼로의 초상이나 대량 생산의 형태로 무한히 반복된 코카콜라 병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한 인공물의 인본주의적인 고발 혹은 인공물 자체의 도상 혹은 상징이 아니라, 그러한 인공의 극단적 팽창을 전복시키는 시뮬라크르의 지표(index)로 간주된다. ● 여기 보여 진 채석장 사진들도 같은 맥락에서 단순한 상황적 의미 전달 이상의 것이 있다. 작가는 "도시화로 인하여 야기된 바다 모래 채취장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왜 이와 같은 엄청난 모래를 퍼 올려야 하는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순진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자신의 사진에서는 이러한 도시화의 인공 구조물과 인간 종류의 모조물(현대인)을 가능한 배제했다. 왜냐하면 작가는 오히려 보다 근본적인 것으로 화면을 채우고자 하는 의도에서, 모든 인공 구조물의 근원이 되는 건축 골재들과 그 출발점이 되는 장소를 자신의 재현 대상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공의 결과물 혹은 상징으로서 인공물을 말할 때 흔히 도시화 된 구획이나 자연을 거슬러 구축한 구조물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인공은 개념적으로 그와 같은 구조물을 있게 한 보다 근원적인 것 달리 말해 인공물을 생산하는 근원으로서의 진행 개념을 말한다. 결국 작가가 자신의 사진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은 채취장의 모래 흙 자갈 등의 단순한 생태계의 반-풍경으로서 인공물이 아니라, 그것을 수립하는 근원적인 배경 즉 진행과 파괴로서의 인공이다 : 궁극적으로 사진으로 나타난 골재들은 이러한 인공의 개념적인 은유이며 또한 사진에 나타나는 상황적인 장소로서 모래 채취장은 그것을 암시하는 가장 분명한 장소로 나타난다. ● 물론 이러한 이미지들을 이미지 자체가 암시하는 정언적인 의미의 진술, 말하자면 자연 보호,인본주의, 생태계, 무모한 도시화의 고발 혹은 황량하고 삭막한 이미지가 야기시키는 아우라의 복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최초 작가 고유의 상황적인 느낌으로 이해될 때, 사진들은 단순한 도상이나 코드 혹은 상징-이미지를 넘어, 폭풍 전야의 음산한 분위기나 시지프의 끝없는 인간의 도전과 같은 어떤 불길한 상황적인 조건, 다시 말해 인공의 극단적 팽창과 동시에 새로운 시뮬라크르의 도래를 지시하는 인덱스(index)로 나타난다. ■ 이경률
Vol.20040428b | 이철수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