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의 얼굴

롯데화랑 창작지원 김동유 회화展   2004_0422 ▶ 2004_0501

김동유_두개의 얼굴-고흐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04_부분

초대일시_2004_0422_목요일_05:00pm

롯데화랑 대전점 대전 서구 괴정동 423-1번지 Tel. 042_601_2827

두 개의 거울이 바투 마주 본다. 각각이 비추는 것은 자신이다. 둘 사이엔 아무 것도 없다. 아, 순백의 카니발이즘이여! 티끌만한 오차도 없이 그냥 그대로의 자신을 삼킨 너, 나 자신이여. 텅 빈 너를 품은 나를 온전히 비추는 너. 무한 겹의 투명한 외피로 무장한 완강한 허무로다. 찰나(0, 零)간에 아른거리는(映) 나-너 그림자(影)들의 끝없는(永) 질주. 부재로 새겨지는 현존의 절대 기억(靈)... ● 정작 김동유를 말하려니 말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전설적인 일본의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오가와 신스케'를 추모하며 직접 카메라를 들고 그의 발자취를 더듬는 '빔 벤더스'의 작품을 본 적이 있다. 내 기억에 거기서 오가와가 말하길, 자신의 카메라는 그가 상대 할 사람들의 생활과 세계에 대한 이해의 진도에 맞추어 그들에게 다가간다고 했다. (오가와는 일본의 한 전통 마을에서 10여 년 동안 자신의 이름을 딴 프로덕션 팀원들과 함께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천년을 새기는 해시계-마기노 마을 이야기(1977-88)」를 완성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질감과 질량을 그리는 데 있어서 그의 작업과 일생은 일개 한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위대성의 극치다. 태양이 작열하는 논에서 허리 숙여 일하고 있는 노부부를 먼발치에서 카메라로 바라보며, 자신에게 인사하는 그들에게 똑같이 목례한다. 그들에게 그만큼의 거리에 다가서기 위해 일 년을 보냈으며, 한 일년쯤 뒤에는 그들과 마주서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며 허허하게 웃는다. 이 순간, 내겐 김동유와 그를 보러 가기 위해 동행한 또 한 사람이 오버 랩 된다.)

김동유_두개의 얼굴-고흐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04

시간이 흘러 마침내 그들과 눈 앞에서 마주할 때는 카메라도 그들과 멀리 있을 때보다 더 깊숙한 인사를 나눈다. 다소의 비약을 감안하고, 그와 나는 서로 오가와이자 그 피사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엔 각자의 풍경 속에서 인지하다가! 시간이 지나며 아주 조금씩 만 접근하고 있다. ● 물론 그간에 막걸리 색깔의 침을 난사하며 '추상폭력영화(?)'의 시조 격인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 속 피날레를 다투듯 흉내내면서 백치처럼 서로 낄낄댄 적도 자주 있었지만, 시간이 더 지나고 가까워질수록 웬일인지 우리는 더 예의를 차리는 사이가 되어가고 있다. 그의 세부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내가 긴장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급기야 최근에 서문 핑계로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난 후론 막연한 긴장이 일종의 경외심으로 굳어지고 말았다-나의 이런 감성적 언표에 그는 또 얼마나 당황할 것인가. 미안하지만 할 수 없다. 나를 불러 세운 그의 업보다.

김동유_해바라기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04
김동유_해바라기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04_부분

그의 내실에 잠입한 순간, 꽤나 오래 전부터 파기 시작한 듯한 검은 구멍을 맞닥뜨린다. 쇼생크 탈출! 라켈 웰치 대신 먼로로 가려진 이접공간? 내민 손에 그 대신 잡힌 허공. 낙망과 약간은 두려운 호기심으로 머뭇거리는 내 앞에 입을 벌린 블랙홀. 어두운 화면-허공에서 맥박 치는 규칙적인 혼돈. 당황과 경탄을 누르고 태연한 척 클리쉐들의 도열과 그것이 만들어 놓는 심연의 역설에 혼곤히 빠져든다. 그것은 여전히 각각의 구슬이 나머지 모두를 비추는 인드라의 그물, 화엄과 호접몽의 경계에서 조망되긴 하나, 조금, 그러나 확연히 달라진 무엇인가로 인해 종전 그의 작업을 제어하던! 극도의 냉정이 그 정점에 이르러 파토스의 짙은 구름으로 되돌아 피어오르는 걸 감지한다. 소심한 내 뒷걸음질에 매달린 경쾌해서 더 심각해지는 버섯구름의 진혼곡.

김동유_해골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04
김동유_장미꽃_캔버스에 유채_227.3×181.8cm_2003
김동유_구름_캔버스에 유채_227.3×181.8cm_2003

김동유의 그림은 단호하고 복잡하다. 명령조나 감탄문 같은, 그래서 때론 허무 개그처럼 실소와 통렬한 조응을 일으키는, 깊은 뜻 없이 툭툭 내뱉는 그의 평소의 짧은 멘트를 닮았다. 형상은 단순하고 익숙하나 결코 한 눈에 전체와 세부를 파악할 수 없다. 웬만한 거리를 두지 않고선 도록에서처럼 보이지 않는다. 단일한 하나의 공간, 캔버스 안에 모순적인 두 개의 깊이가 무심하게 공존한다. 부분과 전체, 유일한 것과 평행으로 존재하는 그것들의 무수한 복제. 둘은 결합되어 있으되, 하나만을 취하면 다른 하나를 잃게 된다.

김동유_두개의 얼굴-먼로(고흐)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03
김동유_얼굴_캔버스에 유채_116.8×91cm_2004

세포와 천체(天體)의 모습을 한꺼번에 포획하는 불가능한 동시성. 사방무늬. 환각적인 반복 리듬으로 팽창하면서 응축하는 거대하고 미세한 우주적 파노라마, 만다라. 나비들의 현란한 군무가 여백으로 채워내는 일련의 형상들 속에서 나비들의 날개 짓은 차라리 박제처럼 정지되어 있지만, 강렬한 흑백으로 버무려져 기계적인 배치와 역할을 부여받은 형상 속의 작은 형상들은 오히려 하나하나가 연기처럼 꿈틀! 거린다. 이것과 저것을 함께 펼침으로써 이분적 분별의 경계를 슬쩍 넘어버 리는 선문답이다. 칼끝에 서린 유머. 선택이 아닌 도약.

김동유_나비들-사유반가상_캔버스에 유채_190×122cm_2003
김동유_나비들-사유반가상_캔버스에 유채_190×122cm_2003_부분

하나의 존재는 독립적이 아니라 그 자체로 '관계'다. 대립과 차이를 안고, 또는 넘어 만물은 교직(交織)과 상호작용으로 생성을 거듭한다. 모순을 품은 공리. 어두운 밝음, 밝음을 담지 한 어둠. 우리가 사는 세상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큰, 밤하늘에 빛나는 무수한 '작은' 점들.

김동유_꽃과 여인_캔버스에 유채_162×112cm_2003
김동유_꽃과 여인_캔버스에 유채_162×112cm_2003_부분

나는 이번 기회에 조차 그의 작업을 풀어 낼 단서가 될만한 어떤 것도 물어 보지 않았다. 피차간에-구경하는 내가 조금 더- 쑥스러워 하며 학창 시절의 노작들까지 훑어보는 동안 앤디 워홀을 유시한 '팝 아트' 계열의 당시의 경도를 슬쩍 흘려듣긴 하였지만, 피하듯 넘어갔다. 영화 상영이 끝난 것도 아니므로 감독 말에도 귀를 막고 아껴두고 볼 것이니 급할 것이 없기도 하거니와, 하나의 표정이 하나의 감정만을 의미하진 않기 때문이다. 각각의 우리들 안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섞여 소용돌이치고 있는가. 그 무량함은 자신도 모른다. 아니 바로 자신이 가장 오해한다.

김동유_나비들-교황_캔버스에 유채_145.5×112.1cm_2003
김동유_나비들-반 고흐_캔버스에 유채_116.8×91cm_2002

그가 천착하고 걸어가는 길은 자신과 자신을 형성해 온 시스템에 대한 내밀한 탐구와 맹렬한 도전이 다져 놓은 것이되, 그의 관심은 이미 이런 저런 시류와 담론의 그물을 뚫고 홀연히 비껴가고 있다. 한 가지, 내게 있어 그것은 앞서 암시되었듯이-그가 역시 민망해 할 얘기지만- 차라리 양자론으로 대표되는 현대 물리학이 그리고 있는 세계상이나, 그것이 끊임없이 구애를 시도하는 인도와 극동을 아우르는 동양적 사유들을 끌어 안는다. 그런데 그의 그림은 현대미술의 보철 장치로 활용되는 수사로서의 철학이 아닌, '나'로부터 비롯한 전일성(全一性)을 꿈꾸는 통찰로 향하게 하는 단초다! . 그것은 사유가 아니라 그림이며, 그것은 논쟁이 아니라 '함구'로 닦아야 하는 내 앞의 거울이다. 나는 그의 그림만큼 명료한 형상으로 축조한 관념적인 세계를 접한 기억이 없다. 냉정하게 말해, 그것은, 그완 반대로 일상의 사소한 표정변화에 좀스럽게 매달리는 나 같은 자가 꿈도 꾸기 힘든 거대한 대칭세계다. 그는 말 않고 그림만 그리는데 난 벌써 말만 많다. 장자가 일갈 했듯, '개가 잘 짖는다고 꼭 좋은 개가 아니오, 사람이 말발이 좋다고 현명한 것은 아니다.' 에이, 그림 버린다. 여기까~지! 나만의 비~밀.

김동유_대나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04
김동유_최후의 만찬_캔버스에 유채_50×72.2cm_2004

나가면서 하나 더. 그가 사는 시골집 정경처럼, 그는 더 밝아졌다. 담담한 나이테에 또 한 겨울을 보낸 안도가 옅게 배어 있다. 한층 각이 잡힌 어깨로 캔버스가 아니라 땅을 갈고 있다. 그의 붓이 단단한 농기구같이 보인다. 막걸리 표 주전자와 사발 찾으러 간 사이 훔쳐 본 휴식 같은 대나무 그림. 빛과 그림자, 허공과 대나무의 속살이 취한 달빛처럼 한데 굽이친다. 그대, 길을 아는가. ● 그것은 움직인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 그것은 멀다. 그리고 그것은 가깝다. / 그것은 이 모든 것 속에 있으며 이 모든 것 밖에 있다. (우파니샤드)전상용

Vol.20040427a | 김동유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