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개 없는 영역-사물·그리기·체험

책임기획_부산시립미술관   2004_0427 ▶ 2004_0615

이태호_그날-9.11Ⅱ_먹, 목탄, 네오파스텔_150×215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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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427_화요일_04:00pm

참여작가 박승순_박영대_안희숙_윤은정_이강욱 이종목_이태호_정은유_최용석

부산시립미술관 부산시 해운대구 우동 1413번지 2층 대전시실 Tel. 051_744_2602

말의 길이 끊어진 곳, 그곳에서 그림의 길이 열리고, 그림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정교한 말의 장치와 나긋한 논리가 아니라 말이 들어설 수 없는 자리, 체감으로 와 닿는 세계, 그곳에 그림이 있는 게 아닌가. 사물들이 감각 자체로 말할 때, 그것을 몸으로 느끼는 것, 그런 것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게 아닐까. 전화로, 편지로, 메일로, 영상으로 보내는 고백보다 골목길 어귀에서 가만히 손을 잡아보는, 손안 가득히 다가오는 그 체감,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그런 체감이 그림 그리기이고 그림 보기가 아닐까.

윤은정_무제_캔버스에 목탄, 유채_97×162.5cm_1999
정은유_Akt VI_캔버스에 유채_350×160cm_1997

형태에 얽매여 있는 사물이 아니라 '존재가 갑작스럽게 폭발해 나오는' 순간의 사물 즉 순전한 내용을 지닌 사물"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매개 없는 그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참여작가들의 작업에서 매개의 도움이 가장 적은 형태의 그림 그리기를 본다. 형태가 감성에 기초한 것이긴 하지만 사물이나 형태가 아니라 내용을 지닌 사물로서 스스로 드러나는 그런 힘을 감지할 수 있게 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작가의 의지나 보는 이의 감성적 만남보다 앞서서 질적으로 충만한 사물, 알 수 없는 깊이를 본원적으로 갖추고 있는 사물, 그것에서 형태와 공간과 양감과 장소성이 솟아오르고 있는 사물로 그려져 나온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사물을 재현하는 것, 빛에 드러난 덮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깊이를 가진 사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것도 매개 없이 순정한 그리기에 의해 세계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체취를 가장 가까이 느끼게 하면서 세계를 만나게 되는 그런 순간들을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것이다.

최용석_더이상 내가 아니다 II_종이에 목탄_200×300cm_2003
이강욱_네개의 병_종이에 콘테_76×57cm_2004
박승순_자연의 장_혼합재료_130×130cm_2001

대상은 이제 더 이상 반사의 덮개가 아니고 대기와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대상은 내부에서부터 은근히 밝혀지는 것처럼, 그 자신에서 방출되는 빛처럼 존재한다. 거기에서 대상은 견고성과 물질성의 인상을 낳는다. 그림은 그림으로서 존재성을 가지고 자신의 빛을 가지는 것이다. 인간에 의해 구성된 것이지만 그 스스로 존재하는 깊이에 의해 인간을 만나는 것이고 그림 스스로가 인간의 눈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것이 대상과 주체가 공존하는 매개 없는 영역에 새삼 주목하는 이유이다.

박영대_2004년 1월 9일 안성_한지에 수묵_150×210cm_2004
안희숙_淸溪行_장지에 먹_150×212cm_2004
이종목_Enterance of Mountain_한지에 수묵_150×105cm_2002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절묘한 떨림, 이것이 메를리 퐁티가 말하는 절대적인 지각의 모습이라면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절묘한 떨림 속에 우리를 넣는 것, 우리를 끌어들이는 것, 그것이 매개 없는 영역으로서 그리기이다. ● 이것은 결국 그림을 세계와 삶을 펼쳐 보이는 시원으로 화면이 내게 와서 말하고 그가 사유하고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게 매개 없는 그리기의 체험이다. ■ 부산시립미술관

Vol.20040426c | 매개 없는 영역-사물·그리기·체험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