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4_0421_수요일_06:00pm
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02_733_6469
유년-사라진 시간 혹은 태어나는 시간 ● 나도 얼마 전 그럴만한 일이 있어서 7호선 지하철을 타고 어린이 대공원엘 갔었다. 거의 사 년만이었다 (아마도 나는 그때 아직 유치원에 다니던 아이의 졸업 소풍을 따라 갔었을 것이다). 세월이 길기도 했고 아직 철이 일러서이기도 했겠지만, 그 사이에 대공원은 더 쓸쓸하게 변해 있었다. 동물원과 식물원, 텅 비인 놀이공원을 지나며 후문에서 정문까지 넓은 터를 한바퀴 도는 사이에 내 마음은 그야말로 대空원이 되었다. 간이매점 의자에 앉아서 캔 커피를 홀짝이는 동안에는 마음의 바람소리가 멍멍했다. 그리고 그 바람소리는 이 지연의 포토폴리오를 기억나게 만들고, 더불어 W. 벤야민의 어느 한 구절을 머리 속에서 다시 읽게 만들었다. '19세기 베를린의 유년시절' 안에 들어 있는 벤야민의 그 한 구절은 정확히 이렇다: "막 태어난 아이를 품안에 안아주는 어머니처럼, 생은 긴 세월을 유년의 기억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이 지연의 사진들은 아주 쓸쓸하다. 그녀의 사진 공간 안에 들어있는 오브제들은 하나같이 버림받은 모습을 보여준다. 야외 음악당은 비어있고 의자들은 쌓여 있으며 놀이 기구들은 엔진을 멈추고 서 있다. 버려진 건 사물들만이 아니다. 그녀의 사진 속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다. 놀이터에도, 운동장에도 심지어 매점에도 사람의 자취가 없다. 얼핏 한가로워 보이는 우리 안의 동물들은 부재의 풍경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텅 비게 만들뿐이다. 그러나 이 지연의 사진들이 껴안은 쓸쓸함은 사진 속 풍경 안에서만 끝나지 않고 보는 이의 상상공간까지도 침투하는 것 같다. 이 지연의 사진을 보는 사람은 관성적 상상력에 의해서 사진 공간 안에는 들어있지 않은 두 사람의 모습을 연상으로 떠올릴지 모른다. 프레임 밖에서 카메라 렌즈를 들여다보는 사진작가 이 지연과 그녀가 사진 공간 안으로 다시 불러들이고 싶어하는, 그러니까 유년시절 이 공원 안에 존재했었던 어린 소녀로서의 그녀가 그 두 사람이다. 하지만 버려진 오브제들과 사람의 자취가 지워진 폐허의 풍경은 보는 이의 상상력 안에서 그 두 사람이 행복하게 해후하는 것을 방해한다. 오히려 그녀의 폐허 풍경은 유년의 빈 의자처럼 다시 채울 수 없는 시간이며 빈 공중전화 부스처럼 사진으로 전화를 걸어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라는 걸 주지시킨다. 아마도 이 지연은 추억을 통해 부활하는 유년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속 깊은 멜랑콜리가 그녀의 사진이 강렬하게 풍기는 쓸쓸함의 정작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쓸쓸한 사진들이 그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확인만으로 끝나는 것일까?
이 지연의 폐허 풍경은 그녀의 사진을 보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만든다. 사진 속 풍경이 아니라 그녀의 '사진적 태도'에 주목하게 만든다. 우리는 보통 '지금-여기'를 사진 찍는다. 그건 현재의 귀한 순간을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탈취하여 과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막으려는 오래 된 시간초월욕망의 소산일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듯이 훗날 다시 보게 되는 지금 여기의 풍경은 그때-거기가 되어 우리들로 하여금 생의 시간적 조건을 더더욱 확인하게 만들곤 한다. 이 지연의 사진적 태도는 아마도 그러한 생과 시간 사이의 해소할 수 없는 관계를 인식하는 데서 비롯하는 것 같다. 그녀의 사진들은 지금-여기가 아니라 거꾸로 '그때-거기'를 포착하려고 한다. 현재가 아니라 과거를 포착하려는 이러한 사진적 태도는 내게 다분히 문학적으로 여겨진다. 문학적 언술은 잘 알려져 있듯이 서술과거형이다. '그녀는 오늘 아침 꽃을 사러 나갔다. 어느 사이 내일이 벌써 크리스마스였다'라는 소설 속의 평범한 문장 하나가 말해주는 것처럼 소설적 서술은 현재는 물론 미래의 사실마저도 과거형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서술적 과거형의 효과는 무엇일까? 호머 이래 소위 '서사적 과거'라고 불리우는 이러한 문학적 시간어법을 두고 어느 문학사가는 '과거를 선취해서 현재를 생성해 내는 적극적 언어 상상력'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시간의 무상성과 부질없이 맞서는 대신 그 시간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오히려 과거 속에서 상상적 현재를 불러내는 미적 시간장치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재가 아니라 과거를 포착하려는 이 지연의 사진적 태도 안에서 나는 과거의 폐허가 아니라 그 폐허 안에서 사라진 시간을 상상적 현재형으로 되살리는 적극적 상상력을 발견한다. 물론 이러한 상상력은 사진을 단순히 기록의 매체가 아니라 상상력의 주문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주술적 매체로 받아들임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를 기록해서 과거의 아카이브 안에 저장하는 대신 과거의 아카이브를 만들어 그 안에서 현재성을 불러내는 상상력이야말로 사진적 상상력의 고유한 매혹이 아닐까?
인용한 한 구절이 말해주듯 벤야민에게 유년의 시간은 사라진 시간이 아니라 태어나는 시간이다. '막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어머니처럼', 유년은 과거의 시간 속으로 속절없이 흘러드는 생을 늘 새롭게 태어나게 만드는 살아있는 시간이다. 이 지연의 과거형 사진 안에서도 유년은 그저 추억의 시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을 잉태하는 자궁의 시간으로 존재한다. 그러한 시간의 발견은 물론 유년의 시간에 대한 그녀의 사진적 태도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시간의식은 이 지연의 사진적 시선이 다름 아닌 여성적 시선이라는 사실과도 크게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김진영
Vol.20040425a | 이지연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