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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작가 구본웅_김기창_김상유_김영주_김환기_김흥수_남관_도상봉_문신_박고석_박노수_박래현 박성환_박영선_박항섭_변종하_서세옥_성재휴_윤중식_이대원_이봉상_이응노_이종무_이중섭 임직순_장두건_장리석_장발_장욱진_천경자_최덕휴_최영림_하인두_한봉덕_황염수_황유엽
주최_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 131-1번지 Tel. 033_480_2655
박수근미술관에 기증된 한 화랑 운영자의 컬렉션 ● 수일 전, 갤러리현대의 사무실에서 박명자 사장을 만났을 때의 감명을 말하고 싶다. ● "양구의 박수근미술관에 원화와 전시 자료가 너무 부족해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했다. 양구군청(설립자)측에서는 개관 후 어렵게 수억 원 가격의 유화 하나를 구입했을 뿐이다. 그 이상 구입이 힘든 실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군수의 의지와 열의는 대단하다. 현재 포천의 공원묘지에 묻혀있는 박수근 선생의 묘를 출생지인 양구의 기념미술관 근처로 이장하게 되어 새로운 추모 행사가 추진되고 있다. 그래서 이 기회에 내가 그 동안 화랑을 운영하면서 개인적 애착으로 모아 갖고 있는 박수근 선생의 유화 한 점과 연필 드로잉 등이 포함된 여러 화가의 작품 55점을 그곳에 기증하기로 했다. 나는 그 동안 박수근 선생의 유작전을 수차 꾸미기도 했고, 또 그의 주옥같은 작품을 많이 취급해온 입장이기도 하다. 이렇게 라도 선생의 미술관에 기증을 결정하고 보니 내 마음 속에 깊이 쌓여온 선생에 대한 감사의 빚이 한결 풀리는 듯하다." ● 대단한 미거(美擧)가 아닐 수 없다. 나 자신 박수근 선생이 생존할 때부터 그의 작품의 창조적 독자성과 서민적 진실성을 참으로 존경하며 가까이 접촉한 적이 있고, 그의 무한히 선량했던 심성도 잘 알고 있다. 박명자 여사도 1961년에 처음 화랑계에 나올 때부터 박수근의 참된 예술가상을 존경하며 작품 판매 등으로 친밀 관계를 가졌던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런 저런 깊은 인연과 존경이 이번의 박수근미술관을 위한 미거를 실행한 것이다. ● 그 기증작품들 - 모두 37명의 화가의 작품들을 살펴보니, 역시 박명자 여사의 박수근미술관 지원의 깊은 속마음이 확연하게 나타나 있었다. 우선 박수근의 유화 「굴비」는 그간의 그의 화집들과 특별전 카탈로그에 거듭 수록되어 널리 알려져 있는 1950년대 중반 이전(내가 보기에는)의 사실적인 그림이다. 박수근의 전형적 특질인 주제 형태의 독특한 단순화와 암석질의 평면적 질감 창출 및 회갈색조의 심정적 분위기 등이 확실하게 전형을 이루기 이전의 사실적인 작품이지만, 배경이 없는 평면 공간에 바싹 마른 알배기 굴비 두 마리를 달랑 겹쳐놓고 그린 소박한 구도가 단순 명쾌하고, 사실적인 묘사의 중후한 색상 표현 등은 박수근의 일관된 본질인 서민적 회화감정을 착실하게 구현하고 있다. 이 유화와 함께 기증된 몇 점의 드로잉도 미술시장에서 진귀한 것이다. ● 다른 기증작품들도 모두 박수근과 시대를 같이한 작고작가들의 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서 이제 강원도 벽지의 양구로 가 있게 된 박수근의 영혼이 참으로 외롭지 않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품들이긴 하지만 거의가 다 내용이 짭짤하고 알찬 이 박명자 수집의 기증품 중에는 도상봉의 유화 「복숭아」 와 구본웅이 해방 직후 펜 그림과 짧은 글로 엮은『허둔기(虛屯記)』의 원화 3점, 그리고 이중섭의 은지화와 장발의 그림도 들어있어 한층 질적인 무게를 다하고 있다. 그러면서 박영선, 윤중식, 이봉상, 박고석, 황염수, 최영림, 장리석, 임직순, 장두건, 이종무, 이대원, 박항섭, 최덕휴, 한봉덕의 작품이 있다. 그런가 하면, 김환기의 1950~ 60년대 과슈와 드로잉이 6점이나 포함돼 있고, 남관, 장욱진, 김영주, 김흥수, 변종하, 김상유, 하인두 등의 유화, 수채화, 드로잉이 들어있다. 한국화 쪽으로는 이응노, 김기창, 박내현, 천경자, 서세옥, 박노수 등이 끼어있다. ● 앞의 작가들 중의 최영림과 황유엽, 장리석은 특히 박수근이 한때 취직하고 있었던 평양에서 1940년에 청년 양화가 그룹으로 '주호회(珠壺會)'를 같이 만들어 1944년까지 해마다 동인전을 가졌던 각별한 화우 관계이다. 따라서 이들의 작품은 박수근미술관에서 그 옛이야기를 상기시킬 만 하다. 역시 평양 출신 화가들인 박영선 ㆍ 윤중식 ㆍ 이중섭 ㆍ 박고석 등도 박수근이 청년화가 때 그곳에서 활동한 적이 있는 인연과 연관돼 있다. ● 박명자 여사가 기증한 작품들의 그러한 상호 연관관계는 거듭 말해서 박수근의 영혼에 반응이 있다면 그것은 더 없는 위안과 기쁨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 감사는 말할 것도 없이 기증자에게 돌아갈 몫이다. ● 어떠한 컬렉션도 그 가치와 의미는 수량이 아니라 잘 선택된 질적 내면과 전체적 성격이다. 그런 면에서 40년 이상 화랑을 운영해온 박 여사가 그만큼 오랜 시일 속에서 형성시킨 매우 양질의 개인적 컬렉션이 흔쾌히 박수근미술관에 기증돼 들어갔다는 것은 박 여사로서도 도 하나의 큰 보람일 것이다. 또한 그로써 박수근미술관도 한결 소장품 진열을 증대시키게 되어 방문 관람자들에게 그만큼 충족을 주게 되었으니 모두 박수를 보내야 할 일이다. ■ 이구열
고단한 시절의 꿈같은 그림들 ● 이 전시회는 갤러리 현대 박명자 사장의 기증작품 55점으로 꾸며진 것이지만 그 작품의 선택이 무작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박명자 사장의 기증은 처음부터 「박수근과 그 시대 화가들」을 염두에 두고 몇 차례 보완을 한 결과였다. 과연 박수근이 살던 시대의 화가들은 어떤 면면들이었는가. ● 박수근(1914-1965)이 화가로 데뷔한 것은 18살 때인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것으로 잡는다면 그는 5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33년간 화가로서 살아간 셈이다. ● 그러나 데뷔부터 8ㆍ15해방을 맞는 31세까지는 화가로서 활동이라기보다는 스스로의 시험이고 모색이었을 뿐이다. 그의 화가로서 활동은 오직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는 것이 경력의 전부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12, 13, 14회 연속 3년간 그의 이름이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혹 낙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1936년 제15회전에 다시 입선하고 이후 이 전시회가 막을 내리는 1943년 제22회까지 연속해서 입선했으니 박수근의 화가로서 대사회적 신고식은 20대에 자연스럽게 마쳤다고 생각된다. ● 20대를 보내면서 박수근은 한차례 화가다운 활동을 벌였다. 그것은 1940년 평안남도 도청에 서기로 취직하여 평양에 머물면서 그것의 청년화가인 최영림, 황유엽, 장리석 등과 「주호회(珠壺會)」를 결성한 것이다. 「주호회」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44년까지 해마다 전시회를 가졌고 박수근은 빠짐없이 출품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박수근이 살아가면서 첫 번째로 만난 동료화가들이다. ● 1945년 8ㆍ15해방이후 6ㆍ25동란이 끝나는 1953년까지 8년간은 박수근에게 사실상 동료화가가 없었다. 해방 직후에는 북한에 남아 거의 은둔생활로 지냈고 동란 중에는 생계를 위해 미군 PX에서 기념초상이나 그렸을 뿐이다. 이 시절 우리 미술계의 총아는 이중섭이었다. 세월이 한참 지난 다음에는 박수근이 그와 현대미술의 쌍벽으로 칭송되고 있지만 그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 그리고 다시 박수근이 화가로서 활동하는 것은 속개된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특선되면서부터이다. 이후 박수근은 1957년에 한차례 낙선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65년 타계할 때까지 추천작가, 심사위원으로 국전에 깊이 참여했다. 따라서 국전의 전성시대였던 1950년대 후반과 60년대 전반의 화가들은 그의 동료였던 셈이다. 도상봉, 황염수, 장두건, 임직순, 이종무, 이봉상, 윤중식, 박영선, 박항섭, 박성환 등의 작품은 이 시기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1957년은 중요한 출발점으로 기록되고 있다. 국전일파의 진부한 아카데미즘에 반기를 든 기성세대의 신사실파와 신세대의 앵포르멜운동은 그 기록만을 보아도 열기를 느끼게 한다. 이 운동을 이끌었던 조선일보 주최 현대작가초대전은 대단히 진보적인 전시회였는데 박수근이 제3회전에 초대된 것은 박수근 예술의 현대성을 그만큼 인정한 셈이었다. ● 이 시절 화가로 김환기, 박고석, 장욱진, 한봉덕, 남관, 김영주, 문신, 김흥수 그리고 흐름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이대원, 김상유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 박수근은 유화를 그리는 이른바 서양화가였지만 한국화를 그리는 이른바 동양화가들과도 친분을 맺고 교류하였다. 그 만남은 국전과 각종 초대전의 전시장이기도 했지만 상당 부분은 명동시절의 '술패'로서 어울린 것이기도 했다. 이번 전시회에 이응노, 김기창, 성재휴, 박래현, 천경자, 서세옥, 박노수 등이 들어 있는 것은 그런 연유에 있는 것이다. 이들이 사실상 박수근이 화가로 살아가면서 한생을 같이했던 면면들이다. 출품작 중 장발과 구본웅의 작품이 들어 있는 것은 박수근의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근대미술의 자료가 워낙 희귀한 상황에 용케 전해지는 작품이어서 그 실상을 보여준다는 의미로 함께 전시하였다. 이와 같이 「박수근과 그 시대 화가들」 전시회를 꾸미고 보니 박수근 시대의 화가들은 참으로 고단한 시대였고 화가들의 작품은 그 어려운 시대를 넘어서고 싶은 꿈을 그린 것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림의 소재가 무엇이고 그 형식이 어떠한 것인가에 관계없이 힘겨운 현실을 벗어나고픈 나름대로의 이상을 담은 것만 같다. 혹자는 편안한 풍경 속에서, 혹자는 서구적 예술사조에 동참해 보면서, 혹자는 전통 속에 깊숙이 침잠하면서 답답한 마음을 달랜 안쓰러운 몸부림 같은 것이다. 그런 중 박수근은 유독 자기 현실과 이웃의 표정을 선한 인간애로 담아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박수근의 유화 「굴비」는 그의 대표적인 정물화로 거의 모든 도록에 실려 있는 명작이다. 박수근의 정물화는 「굴비」, 「고무신」, 「복숭아」 등 그의 일상 속에서 그 소재를 찾은 것으로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당시 서민들의 밥상을 기름지게 해주었던 굴비가 그려진 것이다. ● 기증작품 중 이중섭의 은지화 「가족과 동네아이들」은 그의 은지화 중에서도 그리움의 감정이 절절히 베어 있는 명품이다. 장욱진의 「나무가 있는 풍경」, 장리석의 「주막」, 도상봉의 「복숭아」는 모두 작가적 특질이 강하게 나타난 전형적인 작품들이다. ● 김환기의 펜화 「달과 사슴」, 이대원의 유화 「정물」, 최영림의 「여심」 같은 작품은 각인의 특징은 특징대로 살아 있으면서 별격을 보여주는 사랑스런 작품들이다. ● 김기창의 「부엉이」, 이응노의 「인물추상」, 천경자의 「금붕어」, 박노수의 「산수」같은 작품들은 어느 모로 보나 그들의 같은 화풍 그림과는 다른 짙은 밀도를 갖고 있다. ● 이런 작품들을 보면 "아, 이래서 박명자 대표가 애장하고 있었구나"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 「박수근과 그 시대 화가들」 전시회 준비를 마치고 나니 박명자 대표께 새삼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깊은 존경심이 일어난다. 다시 한번 관장으로서 감사를 드린다. 양구군립 박수근미술관은 이런 기꺼운 마음을 갖고 있는 분들의 쾌거로 이제는 당당한 미술관으로 굳혀가고 있다. 나는 세상의 모든 분들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 유홍준
Vol.20040424a | 박수근과 그 시대 화가들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