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은...

김지원 사진展   2004_0421 ▶ 2004_0427

김지원_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은..._컬러인화_각 96×64cm_2004

초대일시_2004_0421_수요일_06:00pm

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특관 Tel. 02_733_6469

부엌에 있는 행주를 본다. 행주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그리고는 지나쳐간다. 그렇다. 행주는 그게 다다. 밥을 먹고 밥상을 닦는 것 이외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어딘가에 구멍이 나기만 하면 아무런 고민 없이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그렇게 매일 매일을 사용하면서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 어느 날 이런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을 보면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있듯이, 물건 또한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는 것들이 있다. 아무렇게나 버려졌다가 막상 필요할 때는 어디 갔지? 하면서 찾게 되는 물건들. 우리가 생활하면서 없어서는 안 될 물건들은 항상 옆에 있어서 오히려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특별한 날 또는 전환을 위해 사는 꽃이나, 예쁘게 치장해주는 화장품이야말로 선물을 받으면 행복해한다. 혹은 꽃병의 물을 갈아주거나 케이스 위의 먼지를 터는 행위로 하여금 그 물건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이렇게 너무나 일상적인 물건들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지금의 바쁜 생활이나, 무엇인가를 빠른 속도로 만들려고 하는 현대인들의 삶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을 때 가능한 시선들이라 생각한다. ■ 김지원

김지원_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은..._컬러인화_각 96×64cm_2004

일상과 무의미의 파토스 ● 오늘날 시각 예술 영역에서 설치(installation)라고 하는 중요한 재현 방식이 있다. 설치는 흔히 1960년대 이후 전통적 공간 구성 방식인 조각 특히 미니멀 아트의 확장이 설치의 형태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외형적인 형식을 중요시하는 형식적 관점에서 본 단순한 설명이다. ● 설치는 오히려 형식과 의미 파괴를 위한 예술적 제스처로 엄밀히 말해 시공간의 조건을 요구하는 일종의 무언극으로 볼 수 있다. 거기서 작가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의도는 대상의 상징이나 아이콘(양식과 형식)적인 의미의 재구성이 아니라, 그것이 지시하는 상황적인 무엇을 관객 스스로의 경험 속에서 찾도록 하는데 있다. 예컨대 여기 설치된 이것들은 "무엇이구나" 또는 "무엇을 말하는구나" 하는 기능적이고 의미적인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경험적인 영역에서 확인되는 어떤 상황 즉 이상한 "조짐"을 호출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설치를 이해하는데 있어 사실상 특별한 시각적 개종이 필요하다.

김지원_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은..._컬러인화_96×64cm, 60×40cm_2004

결국 설치 작품의 예술적 메시지는 설정된 대상 자체가 함축하는 해석학적 논리가 아니라 신호와 그 지시대상과의 상황적 원인관계에 있게 된다. 이는 곧 사진이 가지는 고유의 특성인 지표적인 원리(photo-index)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사진을 찍는다는 것, 그것은 상황을 설정하는 일종의 설치-행위(사진적 행위 l'acte photographique)임과 동시에 상황 그 자체에 내재된 무엇 혹은 조짐을 암시하는 탁월한 예술적 행위가 된다. ● 그런데 설치나 포퍼먼스 특히 사진과 같은 행위적 예술(장르로서 행위미술이 아니라 결과보다 그 과정에 작품의 의미를 두는 지시론적 예술을 말한다.)의 정당성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문화적 코드의 진술이 아니라, 그 이면에 감추어진 것, 특히 일상이라는 누명으로 소외되고 억압되고 하찮은 실재의 누설(행위 acte)에 있다. 오랫동안 사진가는 그의 필름에 예외적인 것, 드문 것, 예견치 않은 것 그리고 결코 재현되지 않을 사건-이미지를 담아 왔고, 또한 사진가는 보이는 세상에서 가장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암시적인 이미지 즉 특별한 의미(sens)를 지칭하는 상징-이미지를 만드는데 집중해 왔다. 그때 좋은 사진은 언제나 일상의 평범이 아닌 변사의 웅변과 같은 사진이었다. ● 그러나 전혀 사건이 없는 일상 이미지 역시 무의미(non-sens)의 사건-이미지를 담고 있다. 오히려 익숙과 무감각 그리고 무관심으로 위장된 거대한 일상은 또 다른 현실을 누설하는 엄청난 존재의 보고(寶庫)가 될 수 있다. 프로이드 용어에 "친숙함(heimlich)"과 "오싹함(unheimlich)"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말들은 서로 반대되는 말이 아니라 대립적 용어로 출발하여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끝나는 용어들이다.

김지원_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은..._컬러인화_각 60×40cm_2003,4

이는 곧 우리들 의식이 가지는 평범과 진부 그리고 무의미는 상대적인 관점에서 단지 반복과 익숙이라는 문화적 풍화에 의해 진화된 것이고, 그 결과 관심과 무관심 혹은 가치부여와 무가치는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길들려진 의식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둘러 싼 현실은 원본과 복사본의 관계에서 하나의 분명한 대칭 세계가 아니라, 니체의 시각에서 마치 뫼비우스 띠의 양면처럼 언제나 우리의 의식에 따라 변하는 크라틸과 크라틸로스의 이중적인 현실 효과(l'effet de reel / 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계열 1,2 참조)라고 한다. ● 그와 같이 오히려 좋은 사진은 가장 평범하게 시행된 지극히 진부한 사진(평범 미학)일 수 있다. 말하자면 전혀 우리의 관심을 끌지 않는 하찮은 일상 용품이나 어딜 봐도 전혀 특이한 것이 없는 진부한 닮음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적어도 문화 이전의 어떤 상황적 특이성(아우라 푼크툼 등)이 드러날 수 있다. 그때 사진을 찍는다는 것, 그것은 보이는 세계에서 자기 과시적이고 장관적인 것이나 어떤 새롭고 특이한 의미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그 목적론적인 관점에서 서로 다른 두 가지 측면 즉 의미와 무의미를 동시에 가지는 사건-이미지를 포착하는 행위이다.

김지원_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은..._컬러인화_각 96×64cm_2003,4

여기 전시된 사진들은 바로 이러한 무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사건-이미지들이다. 작가가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하찮은 것들, 예컨대 다리미 이불 상자 옷걸이 고무장갑 등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용품들은 그 지시적인 상황이외 어떠한 의미적인 해석을 부인한다. 만약 이러한 대상들을 우리가 오랫동안 익숙해 온 의미-메시지로 읽는다면 그것들은 아마 해석 불가능한 수수께끼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사진의 주제로서 해석학적 대상이나 상징이 아니라, 설치나 연극의 상황적 지표와 같이 혹은 미궁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아리아드네의 실과 같이 우리를 집단적 맹신 그리고 문화적인 판박이로부터 이탈하게 하는 일종의 무의미의 지시소(deictique)로 간주된다. ●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일상의 모든 하찮은 것들은 처음부터 진부했던 것이 아니라 개체의 특수성에 의한 특이성(실재적 혹은 내재적)이 박탈되면서, 집단적 가치에 의해 획일화된 것(실제적)으로 볼 수 있다. 사실상 오늘날 엄청난 정보홍수 속에서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집단적인 익숙과 반복이 만드는 개체의 무감각과 무관심이다. 작가는 자신의 노트에서 "현재 사용하고 있는 모든 일상의 물건들이 아무리 중요한 필수품이라고 하더라도, 그 누구도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라고 말하듯이 우리들의 관심은 언제나 익숙하지 않은 일상 밖의 어떤 특별한 것에 두고 있다.

김지원_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은..._컬러인화_각 96×64cm_2004

결국 작가가 일상이라는 면죄부로 만들어진 무광의 밋밋한 현실에 의심의 추파를 던지는 것은 사진이 외시하는 일상용품 그 자체에 대한 의미 부여나 가치 상승의 목적이 아니라, 맹목적이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흑백 논리, 다시 말해 특별한 상황과 평범한 상황, 관심과 무관심 그리고 소중한 것과 하찮은 것에 대한 절대적이고 분명한 경계선이다. 그때 사진들은 일상에 은닉된 무의미의 기표로서 언제나 이중으로 순환하는 의식의 뫼비우스 띠가 된다. ■ 이경률

Vol.20040423a | 김지원 사진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