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02_733_6469
스스로의 나이테가 된 그림들 ● 유지하의 그림은 신예답지 않은 잔잔하고 깊은 맛이 있다. 첫눈에 사로잡는 상큼한 화면질서보다는 관조와 응시를 더해갈수록 은근한 묘미와 신비감 같은 것을 준다는 것이다. 치열한 열기, 예민한 감수력, 가공할 상상력 등을 강점으로 하는 젊음의 에너지가 넘치는 시기의 화폭은 열정과 야심, 패기가 숨김없이 토설되는 亂場이 될 법하다. 그래서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종종 결핍보다는 과잉이 많은 편이며, 그 때문에 무한한 잠재력과 함께 한편의 아쉬움을 남기곤 한다. 그런데 유지하 작가의 경우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화면의 각 부분들은 상당히 분방한 붓의 궤적들이 유희적으로 구사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그 자유로움의 수위와 강도를 엄격하고 차분하게 조절해나가고 있음이 발견된다. 요컨대 작가는 지나침보다 모자람을 선택한 것이고, 그것을 통해 작가의 개성과 특징을 선명하게 각인시켜 나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한국화가인 그의 그림은 무언가 모호한 듯한 추상화된 이미지들의 명멸과 중첩들이 지배하고 있다. 그의 화면들은 사물에 대한 진득한 사유와 체험으로 시작된다. 어떤 사물의 정체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동기로서 여러 화면의 전개 과정 어딘가에 침전된다. 작가는 나이테의 이미지와 그것의 상징적 의미를 주목한다. 일련의 미의식적 취사와 선택 및 정제의 과정을 통해 재현적 이미지는 물질적 상태를 초월해나간다. 묽은 채색과정을 여러 번 반복, 집적해 가는 과정에서 기대되었던 이미지들은 서서히 퇴화되고 순수한 그리기의 행위와 시간적 과정들만이 의식의 몰입상태를 증거 하게 된다. 마르고 나면 여러 차례 계속 집적되어 가는 붓의 유희는 결국 나이테라는 대상이 드러내는 시간성과 원환성을 환원시켜 가는 상징으로 다가온다.
나이테가 크게는 원환의 구조를 띠고 있지만, 미세한 진동을 기록한 것 같은 자잘한 굴곡들로 점철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나무 스스로 자연의 여러 조건들과 치열하게 대결하여 얻은 생명의 기록을 스스로의 몸에 각인시켜 저장한 블랙박스이다. 누구나 그 모습을 통해 자기 생명의 단면에 나타난 나이테는 어떤 것일까를 상상해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작가는 그 치열한 생명 혹은 존재의 궤적으로서의 나이테에서 바로 이러한 사색과 경험을 계속 진전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그림이 바로 나무에 대입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 자신의 삶을 압축한 미의식과 행위는 화포와 안료 등의 물리적 조건 및 성질들과 대결적인 유희를 전개해나가는 것이 그것이다. 작가의 의식과 경험, 그리고 행위들이 나이테라는 피상적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워질수록 작품의 자기결정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수 차례 붓질로 표출 반복되면서 그림은 스스로의 나이테를 결정해나가는 것이다. ● 작가 자신은 전통적으로 많은 상징성을 갖는 오방색(적, 청, 황, 흑, 백)과 오간색(홍, 벽, 녹, 유, 황, 자)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가운데 그림은 반복의 집적을 통해 뉘앙스가 풍부한 색감을 자아내고 있다. 이 또한 작품 스스로가 갖는 나이테의 모습이다. 여러 차례 묽게 채색된 결과로 은유와 신비감이 풍부한 화면의 분위기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천연 염료가 가미되어 색감이 주는 자연스러움은 더욱 고조된다. 그림이 여러 겹의 칠을 해나갈 때 마치 화장기가 잘 받지 않는 것 같은 부자연스러움이 그의 그림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역시 농담이 잘 조절된 중색의 기교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천연염료 물성에 따라 무리 없이 융합을 시켰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이제 작가의 작품에 새겨진 작품의 나이테를 읽는 과정이 주어져 있다. 그것이 과제일 필요는 없다. 다만 작품의 자율적 결정성에 의해 이루어진 그 나이테를 읽고자 할 때 색다른 경험을 얻을 수 있음을 인지할 필요는 있다. 어떤 숨겨진 그림 혹은 이미지가 있지나 않을까 하고 찾아 나설 이유도 없다. 그저 작품이 나무와 같이 오랜 시간의 집적과 연속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습득한 작품의 나이테를 발견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자기 자신의 나이테를 중첩시켜 본다. 생명의 치열한 흔적인 나이테가 그동안 연상되지도 않았고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은 실망할 필요가 없다. 그 자리에서 찾아보려는 생각만이라도 갖는다면 그것은 큰 소득이 아닐 수 없다. ■ 이재언
Vol.20040420b | 유지하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