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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420_화요일_05:00pm
참여작가 Antoine d'Agata_JerOme Brezillon_Jean-Marc Bustamante_Fabien Calcavechia Florence Chevallier_Stephane Coutuier_Thibaut Cuisset_Nicolas Descottes Alain Flerischer_Thierry Girard_Benjamin Henon_Valerie Jouve Bernard Plossu_Paola Salerno_Klavdij Sluban_Gerard Traquandi
주최_경기문화재단 / 후원_프랑스예술진흥협회(AFAA)_주한프랑스대사관
관람시간 / 10:00am~06:00pm / 금요일_10:00am~07:00pm 전시설명 / 수요일/금요일_01:00pm/04:00pm
경기문화재단 아트센터 전시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1116-1번지 Tel. 031_231_7200
이미지 생산현장으로서의 풍경 ● 산업혁명과 함께 출현한 사진은 후기 산업사회라고 할 수 있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든 변화를 동반해왔다. 사진을 '사진'이라고 명명하기도 전, 즉 사진의 공식적 발명을 위해 실험을 하던 시기에, 니엡스(Niepce)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관점'을 자신이 살고 있는 집 주변에서 본 시골풍경을 찍으면서 실현시켰다. 다게르(Daguerre)의 경우 그가 전시할 정도로 만족스럽다고 느꼈던 결과물들은 'View of the Boulevard du Temple, Paris(1839)' 이었고, 이것은 기술적 이미지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시골에서 도시, 자연에서 도시생활로 가는 이 통로 속에서, 카메라 렌즈에 제공된 수많은 공간들의 광범위한 스펙트럼이 있을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사진기술로 인해 세계는 재발견되어졌고, 또 세계는 사진이 되었다.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진가들은 가시화 된 세계의 각 부분들을 재생산하게 되었다. 미술로부터 물려받은 장르 가운데, 풍경(landscape)은 중요한 사진 장르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사진이 산업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산업화와 갖는 이러한 밀접한 관계에 의해서, 사진은 계속되는 변형의 풍경을 기록해 왔다. 우리는 화가들의 상상에서 유래한 부동적 풍경에서부터 끊임없이 변화하는 풍경으로의 변천을 보아 왔다. 속도의 개념은 이렇게 해서 풍경사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가 되었다. 산업화시기에 발명된 풍경사진은 움직이는 기차와 자동차 혹은 창문과 비행기에서 내다본 것들이었다. 속도의 가속화는 셔터 스피드의 가속화와 마찬가지로 빠른 속도로 분리된 공간의 파편들은 잡아내게 해준다.
풍경이 하나의 장르로 확장되면서, 사진은 인간과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적 세계의 잠정적 소멸을 보여주었다. 산업화, 탈산업화 그리고 경제활동의 탈영역화의 시기를 연속적으로 거치면서 사진은 사진 고유의 역사를 형성할 수 있는 풍경 이미지 생산해 내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러한 풍경은 자연의 개념을 극단적 순수성의 관점으로 수용하는데 심각한 문제제기를 했다. 또한 이렇듯 변화무쌍하게 전개되는 풍경 안에서 문화와 자연의 대립보다 더 심각한, 즉 풍경 안에 공장이 들어오게 되면서 자연과 산업화의 혼동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공장지대와 거주지역, 도시와 시골의 전통적인 구분이 와해된 컨텍스트에서 오늘날 우리는 동일한 이미지 안에 공장, 자연, 주택 그리고 도시들이 공존하는 현상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00년대의 사진들은 일상생활의 풍경, 그것의 교차상황, 일시적이고 물질적인 만족감, 시각적 압축 등의 이미지 재현을 제안하고 있다. 모든 무질서와 함께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은 바로 그것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 장르들 간의 차단과 그것의 서열화는 당연히 극복되었다. 현재 '풍경'에 해당하는 일사불란하면서도 확장된 카테고리를 지명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오래된 하지만 저항력 있는 개념에서 보면, 마르셀 뒤샹의 1920의 작품인 'l'Elevage de la poussiere에서 카페트의 미세한 먼지를 확대해서 찍은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작품(무제,1993)에서와 같이 우리는 모든 사진은 풍경일 수 있다는 패러다임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 까 한다. 또 풍경의 위기상황은 레이몽드 러셀의 움직이지 않는 여행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인 요하킴 모가라의 부엌 바닥에 놓여 있는 화분들로 이루어진 풍경들에서 볼 수 있는 독창성의 신화의 위기와 동일하게 언급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한스 피터 펠드만과 그의 제자들은 -우치 휴버와 호르게 폴 한카가 창립한 오하이오 그룹으로 구성된- 우리시대의 풍경은 미디어뿐만 아니라 기업과 애호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익명의 이미지들의 거대한 아카이브로 구성되었으며, 그들은 이 익명의 이미지들을 재활용할 것을 결심했다.
이러한 극단적인 예술적 견해에 직면하여, 우리는 전통적 의미의 풍경사진이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시대 작가들의 관련된 작품들을 보면, 풍경은 재현의 영역에서 지속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사진은 풍경을 통해서 현실을 끊임없이 재현하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우리는 풍경의 가능한 한 다양한 범위를 인정하기 위해서, 개인적 풍경에서 정치적 풍경까지, 일반적 풍경에서 은유적 풍경에 이르기까지, 주관적 풍경에서 객관적 풍경에 이르기까지, 사진에 의해 창조된 세계와의 관련성과 총체적인 양 그리고 가능한 다른 모든 범위를 수용하고 있다. ● 오귀스탱 베르크는 '실제 풍경'과 '풍경 이미지' 사이에 존재하는 혼동에서 오는 '풍경' 이라는 단어의 애매모호함을 강조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재현된 사물과 그것의 재현은 그것이 현실과의 관계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효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관계' 그 자체가 모호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는 우리가 실제 환경에서 인식하고 있는 것, 즉 풍경은 완전히 우리가 그것을 묘사하는 방식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풍경으로 규정되어진 삶은 풍경사진과의 관련성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풍경사진이 풍경을 재현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두 가지가 상호동화 하면서 구성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 이러한 기본적인 전제에서 시작하면, 우리는 사진이 풍경을 생산하는 아주 뛰어난 기계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장면을 현실적으로 거의 자동적으로 재생산하는 능력과 적절한 도구의 사용을 통한 풍경의 기술적인 묘사를 떠나서, 무엇보다도 사진은 세계와의 주관적 관계를 생산해 낼 수 있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 파스칼 보스
Vol.20040420a | 이미지 & 풍경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