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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414_수요일_05:00pm
후원_한국문화예술진흥원
덕원갤러리 dukwon cube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5층 Tel. 02_723_7771
육태진의 '자기애적 자살공격'을 위한 장치들 ● (심적 발달의 출발점에는) 본질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원초적 자아와 본질적으로 자살적인 원시적 희생, 이 양자가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연관성이 바로 광기의 근본구조이다. (쟈끄 라깡) ● 육태진은 87년 이후 지금까지 유사한 작가를 찾기 힘든 매우 특이한 작품세계를 보여 온 작가이지만 이러한 작업내용이 면밀히 분석되었던 적은 아직 없었던 것 같다. 시각기호를 촉각적으로 읽도록 유도하는 80년대 말 - 90년대 초의 작업들('Conceptual Box'로 대표되는 시리즈), 범람하는 광고영상이 주체에게 가하는 인식론적 폭격(동시에 에로틱한 폭력)을 다룬 '광고발칸포' 작업, 그리고 한없이 걸어가는 남자의 영상을 모니터 자체의 중첩된 운동을 통해 보여준 95년 전후의 '보행자 시리즈', 마지막으로 어두운 터널 속에서 출몰하는 모호한 자신의 영상을 다룬 최근의 '터널 혹은 튜브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나에게는 그의 작업들이 '대상에 대한 성애적(에로틱) 읽기'와 '자기애적 상황'(나르시시즘)이라는 두 가지 핵심적 축 위에 놓여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축이 포스트모던 비평은 물론 최근의 가장 진보된 전자매체예술이론이 향후의 중요한 예술적 면모로 내세우는 것들이란 점을 생각하면 육태진의 작업이 지니는 독특함과 독창성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느끼기' 보다 '읽기'가 예술에 대한 가장 진보적 접근방식으로 통용되던 시기에 -이를 나름대로 표현하자면 '포스트모던 기호학주의'(Postmodern Semiotism)가 행패를 부리던 시기- 육태진의 초기 작품인 'Conceptual Box' 시리즈는 기호란 읽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올라타는 하나의 장치'여야 하며, 결국 기호란 "나의 생리학적 몸을 경유해서 읽는 것이다"라는 가장 전위적 독해 방식을 예증해 주었다. 그것은 기호에 대한 에로틱한 접근방식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뒤집어 풀이하면 육신적 에로티시즘이란 '감각'과 '괴성'의 문제가 아니라 '읽기'와 '기호', '새로운 맥락(context)의 창출의 문제'이다 라는 정의로 귀결되는 것이다 (기호를 단지 텍스트 적으로만 읽으려고 하는 쟈끄 데리다_Jacques Derrida의 입장에 대해 이것이 '형상'(Figure)이라고 하는 신체적 차원을 누락시키고 있으며, 그러한 누락은 기호학과 해체론 모두의 치명적 맹점이라고 비판한 쟝-프랑수아 리오타르_Jean-Francois Lyotard의 주장을 상기하자). 이러한 에로티시즘은 육태진이 이후 전개한 영상매체작업에서도 일관된 형식적 특징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회전, 왕복운동, 진동하는 튜브와 같은 주변장치를 통해 관객에게 신체적 생리적 몰입을 유발하는, 그럼으로써 영상을 수동적으로 해독되는 기호로서가 아니라 관객에게 생리학적 피드백을 유발하는 에로틱한 관계설정 속에서 제시한다는 것이다.
육태진 작업의 두 번째 축인 '자기애적 상황'은 작품의 정의를 '작가의 내적 상상을 표현한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작가가 지닌 정신병리를 재연하는 장치'로 변환시킨다. 그러한 '정신 병리적 위상'은 창조주로서의 '작가적 위상'과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라, 이 양자가 하나의 단일한 연속체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이로부터 예술가의 전통적 정의에 대해 병리적 증상의 보유자라는 새로운 대체적 정의가 제안 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작가-병자'(artist-patient), 그리고 '예술-병리'(art-pathology) 정도가 될 것이다. 스타일, 즉 형상의 체계를 발명해 내는 창조적 주체로서가 아니라, 주체의 균열로 인해 발생하는 독특한 '증상'의 보유자로서의 예술가 말이다. 자기애는 육태진의 '가장 독보적이고 창조적인 증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정신병리가 작업의 주요 동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그는 그만큼 독특한 작가적 위상을 가지게 될 것이다. 96년 개인전에 대한 평문에서 나는 그의 「보행자」시리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보행자」에서는 시간의 흐름과 역류, 통합된 자기의 전진과 후퇴가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의 이중성과 반복의 맹목성에 의해 모호한 '복수적 複數的 자기'들의 증식과 종말 없는 시간의 감옥이 생겨나는 것이다." 여기서 '복수적 자기'의 이미지, 그리고 역사적 시간의 흐름이 와해된 '시간의 감옥'(즉 한없이 반복되는 현재)는 바로 자기애적 정신병리의 가장 전형적인 증후이다.
이제 '에로틱한 읽기'와 '자기애'라는 두 가지 축이 그의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시화되고 있는가를 「숨」(1999)과 「튜브」(2003) 이 두 작품을 통해 기술해 보자. 「숨」에도 물론 자기애의 병리적 특성이 나타나 있지만 그보다는 특히 영상매체의 공간을 관객과의 에로틱하고 생리학적인 교환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관객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는 남자(작가 자신의 영상)을 대하기 전에 일단 아무 영상도 없는 거의 완전한 어둠 속에서 얼마간 대기해야 한다는 점을 주목하자. 대기하는 동안 관객은 어둠과 정적에 포위된 채 멀리서 개 짖는 소리, 라이터를 켜는 소리, 헛기침 소리 등을 듣게 된다. 이러한 어둠과 음향은 일종의 몰입의 효과를 지닌다. 그것은 관객을 생리학적으로 그에 동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은 주체와 외부공간 사이에 '생리학적 근접성과 내밀성'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앞서 말한 '대상과 세계에 대한 에로틱한 읽기'(몸으로 읽기)가 개시되는 순간이다. 어둠 속에서 관객은 자신을 영상 속으로 빼앗기고, 영상은 관객의 주체 내부로 엄습하기 시작한다. 즉 일종의 '탈주체화'의 상황인 것이다. 스크린 속의 남자가 담배연기를 들이마시면 이와 동시에 그의 영상 역시 클로즈업되고, 그가 숨을 내쉬면 영상은 후퇴해서 멀어져 가는데, 이는 달리 말하면 공간 전체의 순간적 수축/팽창 같은 것이다. 여기서 인물은 담배연기 뿐만 아니라, 공간 전체(스크린 내의 가상적 공간과 우리가 서 있는 실제공간 모두)를 호흡하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위상은 그러한 수축되고 흡입되는 공간 전체 중 '일부'에 불과하게 된다. 스크린 속 남자의 이러한 들숨과 날숨은 육태진과 관객, 가상공간과 실제공간을 하나의 축으로 연결시키며(즉 '육태진-관객', '가상-실제'), 이 전체를 하나의 '생리학적 맥동(pulse)의 공간'으로 변환시킨다 (이것은 바로 가상공간에 대한 나의 정의이다).
이러한 맥동의 공간에서는 주체와 객체(스크린 영상) 사이에 일종의 내밀한 상호교체가 일어난다. 그것은 외부공간과 내 몸 사이의 '스와핑'(swapping, 교환) 같은 것으로서 가상현실이론에서는 그것을 소위 '몰입'(immersion)이라고 칭한다. 이러한 스와핑 상태에서 스크린 속 인물의 호흡에 따라 덩달아 흡입되고 배출되는 관객의 주체는 실제적 단단함을 상실한, 모호하기 짝이 없는 '비정형적 주체'(sujet informe/formless subject)의 양상을 띄게 된다 (혹자는 그걸 발전시켜 cybersubject라고 한다). 우리는 육태진의 그 혼령 같은 영상에 귀신 들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육태진의 영상은 한번의 깊은 날숨에 의해 어둠의 저 깊은 소실점을 향해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우리도 함께 '죽는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일종의 '동반자살기계'이다. '육태진-관객'의 영상 (육태진이 관객의 주체 일부를 대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엄밀히 말하면 '퇴행'한다. 관객이 처하게 된 이 어둠, 영상이 사라진 이 공간은 '무'가 아니라 '꿈꾸는 공간', '퇴행의 공간'이다 (장-루이 보드리_Jean-Louis Baudry의 유명한 영화이론의 기본전제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영상이미지를 경유한 나(또는 육태진-관객)의 자살은 그 자체로서 끝이 아니라, 퇴행이라는 또 다른 원초적 삶의 개시가 되는 것이다. 숨의 마지막 종결 부분은 실은 이 영화의 진정한 시작이 되는 셈이다. 라깡을 따르자면 이러한 자기 이마고(imago, 자신의 거울복제영상)의 반복적 파괴는 실은 강렬한 '공격욕'에 기원을 두는데, 이것은 자기애적 정신병리의 핵심을 점유한다 (육태진에 대한 96년의 평에서 나는 그것이 공격욕 보다는 질병의 표현이라고 기술했었는데, 이러한 기술은 지금 수정될 필요가 있다. 그 질병은 바로 '반복적 공격을 증상으로 하는 질병'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작품으로서 「튜브」(2003)를 보자. 알미늄으로 제작된 대형 튜브(소형터널이라고 해도 좋다), 모니터, 그리고 튜브를 진동시키는 모터장치로 구성된 이 작품은 작품 「숨」에서의 생리적이고 맥동적인 공간특성 그리고 자기애적 정신병리, 이 양자 모두를 더욱 심화시킨 작품으로서 이미 98년에 대형 설치로 보여준 바 있는 「터널」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모니터 영상은 관통되고 있는 터널 내부의 상황을 컴퓨터 동영상으로 재현한다. 기차소리, 알루미늄 튜브 자체의 기계적 진동이 증폭되면서 튜브 내부로의 진입속도 역시 점점 더 빨라진다. 그리고 곧이어 우리는 잠시 완전한 어둠에 대면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튜브를 통해서 우리는 지금 어디를 지나고 있는 것일까? 그러한 침투는 일종의 '존재하지 않은 곳을 향한 침잠' 즉 앞서 말한 '퇴행'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무의식 깊은 곳으로 데려가는 일종의 '최면장치'이다 (전자매체문화이론가 마가렛 모스Margaret Morse는 "남자아이는 공간을 어머니의 몸으로 간주한다"는 멜라니 클라인_Melanie Klein의 이론을 빌어, 가상공간 속으로의 비행이나 침투 같은 행위가 퇴행과 공격욕에 연관됨을 시사한 바 있다). 이 퇴행적 터널 속에서 관객이 곧이어 마주치는 것은 희미하고 위태롭게 흔들리며 정면을 바라보는 육태진 자신의 영상이다. 여기서도 역시 「숨」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상과 관객과의 생리학적 스와핑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육태진의 영상은 곧 '육태진-나'라는 이마고의 위상을 갖게 된다. '육태진-나'의 영상은 기차소리와 함께 근접하고 멀어져 가기를 반복하다 충격적이고 공포스런 클로즈업과 함께 소멸해 버린다. ● 여기서 '육태진-나'의 이마고가 제시되는 방식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반복'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이란 다름 아닌 그 이마고를 살해하고 파괴하려는 공격욕에 의해 지속된다. 즉 반복은 엄밀히 말하면 '반복적 공격', '반복적 자살'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라깡은 자기애란 것이 성애적 특성과 공격적 특성 양쪽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자신의 이마고는 주체를 매혹시키면서도 동시에 주체와의 차이(간극)로 인해 주체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한다. 결국 자기애는 동시에 자기에 대한 파괴를 수반하게 된다. 이를 라깡은 '자기애적 자살공격'(agression suicidaire narcissique 또는 agression suicidaire du narcissisme)이라고 부른 바 있다. ● 육태진이 보여주는 자기애적 상황은 결코 어떤 '종결'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종결될 수 없음, 종결의 반복적 시작, 종결의 반복으로 인해 얼어붙은 시간, 현실의 단선적이고 역사적인 시간으로부터 고립된 퇴행적 자기애의 차원인 것이다. 자신의 이마고는 아무리 공격해도 죽지 않으며 (이미 죽어 있으므로) 육태진의 튜브는 바로 그 이마고를 강박적으로 무한히 죽여 나가는 자동장치(automaton)이다. ■ 김원방
Vol.20040414b | 육태진 영상설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