情精

홍은희 수간채색展   2004_0414 ▶ 2004_0420

홍은희_情_장지에 수간채색_70×70cm_200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공화랑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4_0414_수요일_05:30pm

공화랑 서울 종로구 인사동 23-2번지 Tel. 02_735_9938

'풍경(화)'을 바라 보다 ● 풍경을 바라봄 또는 바라보는 풍경. 풍경을 바라보는 일반적 관점에는 어쩔 수 없는 분리가 나타난다. '바라봄'의 의미론적 분절로서 바라는 것과 보는 것 그리고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로서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것으로서의 풍경... 이렇듯 이원화된 풍경은 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장대한 파노라마이다. 그 파노라마의 한 단면인 '풍경-그림'은 원근법이 함의(含意)하고 있듯이, 바라보는 나와 그것으로부터 멀리 사라지는 지점으로 구성된, 고정되어 있는 두 점의 사이에 놓여져 있다. 풍경의 물리적 양단(兩端)인 두 점은 비가시성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그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감관적 인식대상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따라서 그 두 점의 사이를 점유하고 있는 '풍경-그림'은 가시성의 세계, 곧 시각적 인식가능성의 체계로서 약정된 일종의 장막(帳幕)이다. 이러한 장막으로서의 풍경과 그것을 바라보는 나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距離)가 놓여져 있다. 그리고 그 거리에 의해 풍경은 비로소 우리에게 관찰과 분석의 대상으로서 그 곳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단순한 물리적 성질의 범주에 국한되어 기능하지는 않는다. 그것은(주체의) 선뜻 다가설 수 없는 망설임과, 동시에 어떤 기대나 소망 또는 그 자체에 대한 충족이나 만족을 모두 내포한다. 풍경의 아름다움은 이렇듯 멀리 서 바라보는 것, 즉 어떤 외적 상황을 관(觀)하고 망(望)하는 심적 태도에 의해 구현된다.

홍은희_情精_장지에 수간채색_41×53cm_2003
홍은희_情精_장지에 수간채색_41×53cm_2003

풍경들이 펼쳐져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것은 풍경을 그린 '풍경-그림'들이다. 낮고 쇠락한 슬레이트 지붕과 돌담이 어우러진 집, 그 옆으로 아스라이 보이는 야트막한 산. 막 가을걷이가 끝난 듯 한 논과 밭 너머로, 야산과 야산 사이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그만 농가들. 산정(山頂)의 능선들 위로 하얗게 뭉개 구름이 피어오르는 하늘. 꽃이 만개한 도라지 군락. 어느 봄날, 들판에 소담스럽게 돋아난 한 무더기의 이름 모를 들풀. 돌담 너머로 노란 꽃망울들을 활짝 터뜨린 산수유 등등... 그림 속의 풍경들은 한결같이 한적한 농촌이나 그것이 그려내는 산야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미지들을 얻기 위해 홍은희는 시간이 날 때마다 각지의 구석구석을 답사한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는 여느 풍경화가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그녀의 시선이 흔히 일컫는 목가적 전원이나 명승고적의 수려한 풍광에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그저 우리들이 여행의 길목에서 한번쯤은 우연히 지나치며 보았을 것 같은 또는 우리가 이미 떠나 와 버린 예전의 고향에서 흔하게 접했을 어떤 소박한 정경(情景)을 추적한다. 그것은 인위적 위압감이나 장엄함을 보여 주기 보다는 아직 기계 문명이 채 미치지 않은 농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므로 그 '바라봄'은-그러한 정경이 도시의 주변에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이미 선택적이다. 따라서 그녀가 그리는 정경은 '꾸밈이나 거짓이 없는 수수하고 순박한' 것에 대한 향수나 동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향수나 동경은 그녀가 바라보는 현실이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치닫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의 반영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그림에 나타나는 풍경은 단순한 개인적 차원의 심미적 가치를 넘어 동시대인으로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비유이며 암시라고 할 수 있다. ● 이것은 '재현'이 부재를 증명하는 기호로서 기능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 이미 상실했거나 소멸될 것을 '보충'하고 '대리'하는 것으로서의 '재현'. 이런 관점에서라면 홍은희의 '풍경-그림'은 우리가 잃어 버렸거나 앞으로 잃어버릴 어떤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픔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속의 풍경은 구체적으로 무엇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일까? 이미 언급했듯이 그것은 일관적으로 자연에 속해 있거나 자연과의 친화적 관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삶의 흔적들에 관한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그 이미지들은 기실 그것의 일차적 지시작용 그 자체로서 자연이 주는 생명의 경이로움과 충만함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일까? 또는 자연에 순응하는 삶의 태도에 대한 긍정을 표현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풍경을 아름다움의 한 전형으로 인식하는 미적 정관(靜觀)의 세계관을 구현하려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문명이라는 거대한 기류에 밀려 이제는 관심 밖의 영역으로 추방된, 자연에 대한 향수(鄕愁)와도 같은 그리움의 진술일까? 그 외에도 화가의 시선을 관류(貫流)하는 사유에 대한 다양한 해석적 관점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모두 그 당위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러한 관점이 그것에 반영되면 될수록 그 모든 것들의 원천적 부재나 상실의 예감을 역설적으로 반증한다는 것이다. 무엇이 홍은희의 시선을 이미 중심적 삶의 형태로부터 소외된, 그래서 반드시 정겹고 아름답다고 만 말 할 수 없는 풍경으로 향하게 하는가? 정작 그녀의 '풍경-그림'에서 부재 하는 것은,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비대할 대로 비대해 진 도시들로 대변되는 물질 문명이다. 이런 측면에서 홍은희의 '풍경-그림'은 존재하는 것으로서 부재를, 또한 부재 하는 것으로서 존재를 암시하는 은유적 기호로 작용한다.

홍은희_情精_장지에 수간채색_53×72.7cm_2002
홍은희_情精_장지에 수간채색_60.6×72.7cm_2003

잘 알고 있듯이 산업화에 의한 급속한 도시의 팽창과 물질문명의 발달은 우리들 인간의 삶의 형식을 뒤바꾸어 놓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은 점차 황폐화되고 고갈되었다. 자연의 파괴를 통한 보상으로 우리들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보다도 과거 그 어느 시대에도 경험하지 못한 물질의 풍요와 육체적 안락 일 것이다. 그러나 근대화의 과정을 통해 인간의 주된 삶의 터전이 된 도시는 그것이 아무리 안전과 편의를 제공한다고 할지라도 인위적으로 형성된 구조물로 가득 찬 공간이다. 그곳엔 자연이 부재하며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인공적으로 조성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또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구성하는 사회적 체계에 의해서 커다란 상실과 소외를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상실과 소외를 위무(慰撫)하기 위하여 인간은 도시 속에 자연을 이식(移殖)시킨다. 여기 저기 산재하는 도시민의 휴식을 위한 공원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거대한 규모와 시설을 과시하는 동물원들과 식물원들은 이러한 이식된 자연의 대표적 전형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존과 부재의 관계에 있어서 '보충-대리'의 논리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그곳에 지구촌 곳곳에서 옮겨놓은 온갖 종류의 희귀한 동ㆍ식물들은 도시 공간에 부재 하는 자연을 '보충'하고 '대리' 하지만, 그것의 지속적 유지와 관리를 위해서는 포획과 남벌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자연적 상태의 소멸과 상실을 초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자는 사육과 육종(育種) 등의 방법을 통해서 앞에서 지적한 자연의 훼손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지만 그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관리 하에 조작되는 자연이 어떻게 본래의 자연이 갖는 의미와 같을 수 있겠는가? ●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문화와 예술의 영역 또한 위와 같은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문화와 예술 역시 도시라는 인위적 환경 속에서 자연을 '보충-대리'하는 것으로 기능한다. 문화와 예술은 애초에 인간의 사회가 자연으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전제로 형성된 것이므로 그것은 자연을 살해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부여받아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문화와 예술이 제공하는 '의사(擬似)-자연'에 익숙해지면 질수록 자연은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나투라 모르타 natura morta'. 정물(靜物) 혹은 죽은 자연. 생각해 보면, 살아 있는 생명의 움직임과 모든 가변적인 상태의 정지를 의미하는 이 개념은 예술과 자연과의 관계를 암시하는 적절한 예임을 알 수 있다. 자연은 문화와 예술에 생명의 원천으로서 영감(靈感)을 제공하지만 문화와 예술은 그것의 영역이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자연의 소멸 또는 죽음을 야기 시킨다는 역설이 가능하게 되는 지점이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주장 역시 더 이상 가능할 수 없는 지경에 우리의 현재는 봉착해 있다. 자연이 예술적 영감의 원천을 제공하지 못하는 시점에 이르렀다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기류에 관한 진단이 바로 그것이다. '제일의 현존'으로서, 자연은 이제 아스라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회상의 현존이다. 왜냐하면 「시뮬라크라크늘의 자전」이 시사하는 대로 이미지의 대량 복제 시대인 오늘날의 재현은 그것의 원상인 자연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으며, 그 수단 역시 직접적 모사의 방법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 삼의 현존'이라고 일컬어지는 오늘날의 재현은 원상과 관계없이 스스로 돌고 도는 '초과-자연'이고 '잉여-자연'이며, '파생-자연'이다. 무한복제와 증식에 의해 봇물처럼 쏟아지는 이미지들의 범람... 이러한 상황에서의 재현은 자연에 내재한다고 믿어 온 순수함이나 소박함을 지향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을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가장(假裝) 등과 같은 허위적 인식과 관계할 뿐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끊임없이 유혹하기 위한 자극 또는 도발을 획책한다. 이와 같은 관점의 진단에 의하면 우리가 처한 현실은 가상적 이미지가 실재를 뒤덮어 버린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의사-실재'이며 심지어 관계의 전도(顚倒), 즉 그러한 '의사-실재'의 전염적 중독에 의해 실재인 자연이 해부되고 성형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이미지는 단순한 관조의 차원을 넘어 이미 우리들 삶의 깊은 곳까지 침투해 들어와 있으며, 우리의 (무)의식을 구속하고 조종하는 지배적 위치에 군림하고 있다. 이미지의 부유(浮遊)... 그러나 떠도는 것은 비단 이미지만이 아니다. 명멸하는 이미지의 유전 속에서 우리들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표류하고 있다.

홍은희_情精_장지에 수간채색_40×100cm_2003
홍은희_情精_장지에 수간채색_70×100cm_2004

화가의 작업실. 아니 그 곳은 일상의 생활과 뒤섞여 있으므로 작업실이라는 구분이 오히려 무색하다. 그 공간의 한 구석에 도무지 그림을 그리는 곳의 상황이라고 생각 할 수 없는 정갈하고 단아한 장소가 눈에 띈다. 조그만 서안(書案)과 그 앞에 놓여진 방석-두터운 방석이 두 장 겹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좌정(坐定)의 시간이 범상한 것이 아님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서안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한 권의 책,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과 그 옆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붓글씨로 가득한 한지들... 사경(寫經). 홍은희는 시간을 나누어 온갖 잡념을 떨구고 불경을 옮겨 적는다. 그것은 조그만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집중의 시간이며 들숨과 날숨의 호흡조차도 느낄 수 없는 정적의 순간들이다. 홍은희가 풍경을 그리는 태도도 사경을 행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경이 한 획, 한 획 불경을 옮겨 적는 것이듯, 그녀의 그림 또한 한 점, 한 점 수없이 많은 점들이 겹쳐져 하나의 이미지를 이루어 낸다. 특히 최근의 작업에 이를수록 이러한 점묘의 경향이 강해지는 데, 이는 지켜보는 사람이 숙연해 질 정도로 인내를 요구하는 작업이다. 이미지를 재현하는 홍은희의 접근방법은 이미 지적한 것과 같은 빠르고, 쉽고, 편리한 최근의 이미지 생산방식에 역행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랜 시간과 지난(至難) 한 집중 그리고 그것에 상응하는 육체적 노동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그녀의 작업태도는 화면의 표면처리에 있어서 독특한 밀도를 형성한다. 그녀가 그리는 풍경은 주제의 중심적 위치가 확연하게 구분되지만 묘사의 상태에 있어서는 주제와 비주제의 차별이 없다. 즉 화면의 구성 상 비교적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을 수 있는 부분조차도 생략이라는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치밀하고 세심하게 묘사함으로써 화면 전체의 채색 밀도를 균일하게 유지시킨다.

홍은희_情精_장지에 수간채색_41×53cm_2003
홍은희_情精_장지에 수간채색_58.5×70.5cm_2003

대상을 묘사하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대하는 홍은희의 심적 태도를 엿 볼 수 있다. 그것은 곧 구석 진 곳이나 그늘진 곳이라 할지라도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각각 제 몫의 역할을 다 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그 존재를 소흘이 다룰 수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이런 관점을 확대한다면 그녀의 '풍경-그림'에 등장하는 중심 소재 역시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구석'이고 '그늘'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역설을 제공한다. 소외되고 주변화 된 것에 대한 애정... 이러한 인식은 중심과 주변, 가깝고 멂, 양지와 음지, 아름다움과 추함 등등 모든 이분법적 구분이 특정한 일방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분별일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러한 분별을 없애지 않는 한 모순과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이치를 다시금 일깨운다. 하지만 그러한 분별의 원인을 다시 한번 반추(反芻)해 보면 그 근저에는 동일화의 논리가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그것은 결국 지배력을 구축하기 위한 인간의 욕망과 관계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욕망의 문제로 회귀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러한 욕망의 소거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이에 관한 모든 논의와 그것의 합의적 결론 또한 공허한 추상적 관념의 형태로 머무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고자 한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초과-잉여-파생-증식-재현물'들에 의해 도리어 우리 스스로가 사로잡힌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어느 순간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우리들 자신의 자화상 속에서 우리가 자연을 훼손시킴으로써 겪었던 황폐함과 고갈을 다시금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홍은희의 '풍경-그림'은 우리 모두가 곰곰이 되새겨야 할 의문의 단초(單礎)를 제공한다. 이제 우리는 자연과 예술의 관계에서, 또한 예술과 우리의 일상적 삶의 관계에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에 와 있다. 그리고 우리가 희망의 전언(傳言)으로서 예술을 통해 여전히 기대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위기나 난관(難關)의 순간에 봉착했을 때마다 자기부정이라는 회의(懷疑)를 통해 스스로의 정당성과 급진성을 유지해 왔다는 사실이다. ■ 정길수

Vol.20040414a | 홍은희 수간채색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