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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414_수요일_07:00pm
후원_한국문예진흥원_파라다이스문화재단_(주)세기판매_신씨화로
관람시간 / 11:00pm~06:00pm / 월요일 휴관
브레인 팩토리 서울 종로구 통의동 1-6번지 Tel. 02_725_9520
지향성-무소불위의 왜곡된 질서 ● 이번 개인전에서 김태준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인간적 삶의 역정 가운데 자의적, 또는 타의적 힘에 의해 진행되는 삶의 방향성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토대로 한 사진작업이다. 후설(E. Husserl)은 '의식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라는 말로 지향성(intentionality)을 정의함으로써 의식은 코기토(cogito)가 아니라 하나의 지향이라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지향성은 지시작용을 통해 대상들과 관계를 맺고 그 대상들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주어진 의미를 왜곡하기도 한다.
이에 작가는 자신의 신체를 약호로 하여 일정의 방향성을 표상하고 있다. 카메라에 포착된 그의 몸은 하나의 신체적 기호로써 마치 교통경찰과 같이 지시작용을 담당한다. 현대사회에서 경찰관의 수신호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명한 것이라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바르트(R. Barthes)식으로 말하자면 '현대의 신화' 같은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바르트에게 '현대의 신화'란 현대 부르주아 사회에서 '자명성'이라는 가치 뒤에 숨어있는 이데올로기적 작용이다. 즉 현대사회에서는 부르주아지의 규범이 자연적인 질서의 법칙으로 인정된다.
또 부르주아사회에서 자신의 표상들을 선전하면 할수록 스스로 더욱 자연스러운 것으로 정초된다. 이를테면 근대 국가에서 다수당은 선이고 소수당은 악이며, 국가와 국기는 경배의 대상이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타국의 안녕은 무시된다. 또 시민들은 신호등, 횡단보도, 공중도덕, 통행방법 등 행동 전영역에서 질서라는 미명 하에 통제되고 있다. 그러나 이 질서라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을 가진 하나의 통제수단에 불과하다. 이에 김태준은 이러한 모순적 사회체계에 주목하고 부르주아 사회의 숨은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들춰내어 고정된 위계질서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그것은 맹목적인 방향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선 김태준은 교통경찰의 수신호를 메타포로 이를 무의식적으로 맹종하는 현대인을 환기시킴으로써, 오늘날의 왜곡된 질서체계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통제받는 자아의 모습을 각성한다. 자신 스스로 하나의 주체로서 방향성을 제시하는 사진 속의 자아는 그러나 도시, 건물, 자연에 둘러 쌓여있는 왜소한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가 지시하는 방향에 복종하는 대상은 아무도 없고 그의 수신호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허공을 맴돌다가 소멸된다. 그 역시 무기력한 익명의 존재로 사라질 것 같이 위태롭다. 이윽고 그 역시 또 다른 주체에 의해 하나의 객관적 응시대상으로 간주되어 어떤 방향성에 의해 통제받을 수밖에 없는 객체로 전락한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유형·무형의 상징, 또는 기호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유한과 무한, 시작과 끝, 또는 0, 1과 같은 디지털 시대의 기호들은 우리를 무한한 의미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해석의 출발점이라기보다는 의식과 대상사이의 단절을 통하여 끊임없이 경험을 증폭시키는 사물의 가장 순수한 형태로 보여 진다.
한편 작가는 명증성의 영역에서 질서(방향성)를 관장하는 절대자로 군림한 것 같았으나 어느덧 그 스스로가 통제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소멸된다. 여기에서 방향성이라는 것은 명증성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신화에 의해 조작되고 왜곡된 불순성의 영역일 뿐 아니라, 질주하는 자동차에게 천길 낭떠러지를 지시하는 신호체계와 다름 아닐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의식은 물론 의식주체들까지 감당해야할 삶에 있어서의 숙명과도 같은 여건이다. ■ 이경모
Vol.20040412a | 김태준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