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4_0407_수요일_06:00pm
인사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29-23번지 Tel. 02_735_2655
비어있는 열매주머니에 매료되어 겨울 남산의 아카시아를 그렸다는 그의 나무들에는 비어있음과 다시 잉태할 생명의 전망이 담겨있다. 분채를 사용한 그의 나무들은 얼핏 보아 몰골화를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전통적인 몰골 작품에서 보이는 미묘한 먹톤의 변화, 또는 적절한 색채의 대비로 탄생되는 대상물의 입체감이 배제되어 있다. 이러한 의도적인 평면성은 얼핏 보면 서양화에서 추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 단계인 단순화 작업의 시작인 듯 하다. 그러나 김은지의 작품은 작가가 주관적으로 개입하는 단순화의 과정을 의도적으로 차단한 대상에 대한 리얼리티의 세계이다.
작가 김은지를 만났을 때, 손에 작은 사진기를 들고 있었다. 사진기로 대상을 찍고 이를 계속적으로 확대해 가는 과정을 자신의 작업과 연관시키는 것은 척 클로스(Chuck Close)를 비롯한 여러 서양화가들이 이미 선택하고 있는 과정과 유사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척 클로스와 같은 작가들이 이러한 과정을 굳이 선택하는 이유는, 사진기라는 과학기기를 이용하여 사물의 대상을 끊임없이 확대하였을 때 드러나는 대상물의 새로운 이미지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눈으로 사물을 인식하였을 때 인간이 만나게 되는 형상에서는 도저히 추론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미지가 갖고 오는 충격, 아름다움 그 마이크로의 세계에 대한 찬미이다. 그러나 김은지의 close-up은, 기존 화가들이 탐닉한 마이크로의 세계와의 만남을 철저히 거부한다. 무엇이 리얼리티인가? 대상의 본질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형상이란 무엇일까? 그러면서 회화의 본질을 동시에 드러낼 수는 있을까?
그는 해질 녘의 시공간을 선택한다. 이 시간 자연이 그에게 제공하는 빛 아래서 사진기의 셔터를 누른다. 역광을 통해 그의 인화지에 찍혀 나온 대상은 실루엣으로 드러난다. 화면을 계속적으로 확대하여도 변화하지 않는 실루엣 형상을, 지금 이 시각 내 눈앞에 존재하는 바로 이 대상의 본질로 삼았다. 이러한 실루엣의 평면성은, 이를 회화 평면 위에 그대로 올려놓을 때 발생하게되는 일루젼을 없앤다. 주관적 왜곡이 배제되는 것이다. ● 그의 작품은 흡사 전통시대 절지화(折枝畵)를 보는 듯도 하다. 나무의 한 가지를 잘라 그것을 표현하는 것만으로, 그 나무와 그 나무가 처한 환경의 시정을 온전히 담아내고자 하였던 절지화와 그 역사의 끈이 닿아 있다. 그러나 전통시대 절지화에서는 그리려고 하는 자연물과 그리고자 하는 주체와의 소통, 합일의 단계가 작업의 전제가 된다. 그 주체와 객체와의 소통과 합일을 통해 시정의 공감이 화면에 투영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김은지의 절지화에는 의도적으로 주관성을 배제한 차가운 객관적인 시선만이 읽힌다. 주관에 대한 극도의 절제를 이루어내기 위해 그가 선택한 첫 도구는 사진기였다.
그의 관심이 대상의 마이크로의 세계에 대한 추구가 아니기 때문에 굳이 사진기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사진기라는 렌즈를 통해 대상을 바라보고 기록하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배경색에서도 사진기 렌즈에 잡힌 바로 그 순간의 색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그에게 자연스럽다. ● 사진과 다른 회화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선택한 돌가루는 마띠에르 효과와 더불어 도시의 손때묻은 콘크리트의 체취를 드러낸다. 도시 나무의 본질을 왜곡 없이 회화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그의 실루엣 작업은, 그래서인지 도시의 실루엣으로 드러났다. 콘크리트의 삭막함, 그 마티에르에서 묻어나는 인간의 흔적, 돌가루의 반짝이는 찬란한 도시의 이미지가 교차한다. ● 그림자가 아닌 실루엣을 고집하는 작가의 절제가 역설적이게도 그만의 실루엣으로 드러났다. 무엇이 리얼리티인가? 대상의 본질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형상이란 무엇일까? 그러면서 회화의 본질을 동시에 드러낼 수는 있을까? 라는 그의 화두가 갖고 있는 힘일 것이다. ■ 박계리
Vol.20040405a | 김은지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