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ro-scape/proto-scape

2004 마로니에미술관 기획 중진작가 홍명섭展   2004_0326 ▶ 2004_0425

홍명섭_running railroad_테이프_340×1400×900cm_1982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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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갤러리 홍명섭展 2004_0319 ▶ 2004_0402 poison/toxication & horizontality shadowless/artless/mindless 서울 강남구 신사동 532-6번지 Tel. 02_543_7337

마로니에미술관 서울 종로구 동숭동 1-130번지 Tel. 02_760_4726

horizontality ; para-site ; instal-scape / shadowless/artless/mindless 수평에의 의지 ● 물이 흐르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수평에의 의지를 가졌기 때문이리라. 물의 속성은 수평에 도달하기 위해 어딘가로 흐르게 되어있다. 나 또한, 작업을 통해서 나의 예술적 욕구를 가라앉히는 평정을 찾아 흘러가고자 하였다. 시각적으로 "미미한 예술"의 한계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내 작업은 공기 속의 먼지처럼 희미하게 위축될 대로 위축되게 내버려두어야 할 듯 하다. 이를 일러 "미시예술(마이크로 아트)"라 불러야 될지?-마치 빛이 머물렀든 흔적이 없듯 나의 작업도 자꾸 전시적 속성을 취하기가 어렵게 되어간다. ● 하나의 예술적 감수성이 기념비처럼 세월을 지배한다는 것은 이미 나에겐 뻔뻔하게 보였다. 예술은 골동품적 가치를 가져선 안 된다고 본다. 나의 작업(예술)은 자꾸만 지속적 풍모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어간다. 물론 어떤 작업으로 세상과 교감하고자하는 염원과 전시장을 의미나 가치의 속성물로 채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 현상과 인식의 미분화의 위상을 無記性으로 불러본다.

홍명섭_running railroad_테이프_340×1400×900cm_1982
홍명섭_running railroad_테이프_340×1400×900cm_1982_부분

일시적 관여로서의 아트웍스 ; post-studio works ● 나에게는 일정하게 작업 스튜디오가 따로 있지 않았다. 형편도 그랬지만, 나의 작업은 스튜디오에서 되는 성질의 것도 아니거니와, 스튜디오에서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 대부분이었기도 하다. 이를테면, 나의 작업은 생활 환경이나 작업현장, 또는 발표장에 당도하여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그것은 대체로 보존 될 개체성의 의미가 없는 것들이어서, 생활을 궁리하듯 끌어나가고 용변 보 듯 수월히 행하며, 집착 없이 끝나며, 쓰레기처럼 결과물들은 해체되고 사라진다. 이런 일시성-temporality-의 생태와 함께 형식의 파기 역시 흥미로운 것이다. ● 나는 어려서부터 나의 개성과 같은 본성을 믿지 않았고 어떤 지속적인 개성을 갖기도 바라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나의 모습을 헐어내고 싶고 헐어버리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은 형이상학적 문제가 헐려나가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문학은 인생의 갈등에서 나오며 그것 없이는 의미를 지닐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내가 아는 예술은 적어도 인생의 갈등을 가지고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세간의 갈등을 벗어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따라서 세간의 갈등과는 오히려 무관하게 돌아가는 셈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믿는 예술은 무기력한 것으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바라는 예술적 감성은 현실의 어떤 갈등도 해소 할 수 없게끔 무기력함을 바로 소중히 다루지 않으면 안되는 곳에 애증의 지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홍명섭_de veloping / level casting_끈과 돌맹이_600×800cm_1988
홍명섭_de veloping / level casting_고무판에 황동막대_1200×198cm_1987

중력과 암암리 싸우고 있는 우리 몸의 직립적 상승감은 생태적인 것 뿐 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조차도, 말하자면 가라앉음(죽음, 해체감, 무기력)과의 상대적 극복의 의지들의 발로 행태라고 볼 수 있다. 즉, 중력권에서 직립적 상승감의 결여는 생명력의 탄력을 상실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실 죽어가는 사람은 땅에서 몸을 일으키기가 어렵게 중력에 치이고 숫가락조차 들 힘이 없게 된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은 중력을 극복할 기력이 쇠진한 동물성의 종말을 뜻한다. 그러나 수평은 생명을 해체하는 것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과 삶 사이에서, 삶의 의지의 상승적 전투성만을 옹호하지 않고 그 상승감의 고조(동물성)에 대한 대지와의 실물성의 친화적 공간을 깨우치게 한다. 대지로부터 일탈하고자하는 모든 동물적 몸씀과 마음씀의 일변도에 또 다른 측면의 화해의 덕성(삶의 욕구와 죽음의 기피 사이의 틈)을 열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물의 의지는 수평의 표면을 찾아 흐르고자 하기 때문에 물성의 덕성과 생명성의 덕성을 대립으로 보는 입장은 결국, 흔히 물성의 파괴, 폐해로 나타난다.

홍명섭_poison / toxication ; mimic after the mimic_캔버스에 에나멜_각 100×100cm_2004

또 하나, 직립문화는 시각중심(자기중심, self-affection) 문화를 창출하지만, 앉음뱅이 문화 생태는 자기자신의 시점을 분열시키는 문화 생태를 보인다. 즉, in-dividual, 더 이상 개체화로 나누어질 수 없는데 까지 쪼갠 개인의, 개인으로 단일화된(unify) 인간관과 다섯 장기로 불열된 오행적 인간생태(머리중심이 아닌, 또는 심장중심이 아닌)의 인간과는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분열되고 있는 인간은 시각중심의 의식의 소유자가 아니라 몸감의 느낌으로 퍼져나가는, 대지를 더듬는, 중심이 분열된 감성의 소유자가 된다. 이를테면, 우리 삶의 절반을 형성해주는 잠자리는 대지 표면과의 친화력으로 생명의 부활을 돕게 되는게 아닌가.

홍명섭_cordyceps project_제봉된 천과 식물_가변크기_2000

수평의 신비 ● 물론, 삶도 죽음도 수평성에의 귀의의 한 형태일 수밖에 없다. 서서 굽어보는 자기중심적 방어적 시선이 아닌 무엇, 방안에 앉아서 울타리 밖의 세상을 감지하는 시선, 조짐의 시선, 반사시키는 시선, 꿈꾸는 시선, 즉 직선적이지 않는 시선이라면 맵핑시선, 토포로직컬한 시선-민화나 전통산수화의 시선- 이를테면, ana의 시선, meta의 시선, 어떤 속도가 실린 시선,-서구적 직립 시선의 문화생태를 분열케 하는 시선은-■ 홍명섭

Vol.20040329a | 2004 마로니에미술관 기획 중진작가 홍명섭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