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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317_수요일_05:00pm
갤러리 아트사이드 서울 종로구 관훈동 170번지 Tel. 02_725_1020
정신의 섬광, 몽상의 체화로서의 회화 ● 몽상들은 엄청난 권태에서 태어난다. 그것은 자신의 열정과 믿음을 위하여 하나의 대상을 요구하는, 너무나도 신비주의적인 영혼의 동경을 나타낸다. 때때로 그런 몽상이 좌절을 만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그 열정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 몽상이 때때로 부정적이 되는 것은 사람들이 그 긍정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알베르 까뮈, 『작가수첩』) ● 드로잉은 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형태를 보는 방법이다. 여기에서 형태를 사물 혹은 상황으로 바꾼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주홍미의 드로잉 회화 역시 사물을 보는 그녀의 시선 그 자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녀의 회화는 형태, 선묘, 색면, 어느 것에도 집중되어 있지 않다. 추상적 색면이 드러나는가 하면, 동물과 인간 등 다소 구체적인 형상이 드러나고, 그런가 하면 전혀 맥락에 없는 거칠고 어렴풋한 선들이 드러난다. 예의 드로잉이 그렇듯 주홍미의 작업 역시 결과보다는 프로세스가, 완성보다는 비(非)완성이, 필연보다는 우연이, 명확한 메시지보다는 모호한 메시지가 중요하다. 이렇듯 형식적 완결성보다는 회화 자체의 프로세스를 즐기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그녀의 작업에서 완성이란 어차피 상대적인 것으로, 그것은 순전히 작가의 정감을 만족시키는 수준에서 재단될 뿐이다.
주홍미는 사물을 미적으로 재현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러니 재현을 통한 일루전의 공간을 창출하는 데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것 또한 당연하다. 그녀의 작품에는 섬광과도 같은 직관 그리고 감성의 극단적 방기와 유출로부터 생성된 다양한 이미지들이 부유한다. 거기에는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고, 정연한 서사가 없을뿐더러 어떤 절제나 규제와 같은 금기의 것들은 들어설 틈조차 없어 보인다. 그녀의 작품에는 일상과 일탈의 경계 위에서 줄타기를 하는 듯 아슬아슬해 보이는 자의식이 엿보인다. 어떤 극단적 경험도 그녀에게 오면 손바닥 뒤집듯 유연성을 위한 하나의 동작으로 느껴질 뿐이다. 이처럼 철저하게 체화된 내적 고백으로서의 드로잉 회화는 작가만의 은밀한 심적 상태 혹은 감성의 절대화로 설명할 수 있다. 이 감성의 절대화는 자연스럽게 자동기술적 기법과 만난다. 그녀는 특유의 연상성과 즉흥성에 근간한 자동 기술적 표현을 통해 느슨하고 자유로운 화면을 구사한다. 때로 자신만의 감정적 가치를 위해 의도적인 조야함과 생경함을 추구하기도 한다. ● 그렇다면 주홍미의 회화작업은 어디쯤 서있는 것일까? 얼마 전 미술잡지에 70년대에 태어난 젊은 작가들의 '회화의 지형도'에 관한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나는 그들의 작업의 공통적인 경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보다 그들이 좀처럼 개진하지 않는 작업경향을 언급하는 것이 수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예컨대 요즘 추상표현주의적 회화 혹은 미니멀 회화와 같은 형식주의적 작업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뿐더러, 혹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좀처럼 주목받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 그것이 가지는 회화사적 레퍼런스와 컨텍스트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선정된 회화작업이 회화의 복권이나 부활이라는 테제로 복귀하고 있는 세계적 추세와 어느 정도 맞물려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자생적이고 근원적인 선택이라고 언급했다. 선정된 작가들을 포함한 젊은 작가들의 회화작품을 하나의 코드로 단순화시킬 수 없지만, 일단의 형식적·내용적 특성은 형상과 서사가 부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유머와 위트라는 재미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런 관심은 최소한 우리의 현대미술사의 맥락에서 필연적임을 강조했다.
내가 주홍미의 회화를 두고 다소 장황한 예를 드는 이유는 이렇다. 비슷한 세대에 속하는 그녀의 작품 역시 그들처럼 자생적이고 근원적인 선택에서 비롯되었지만, 그들의 회화적 경향과 공통적인 맥락에 놓여있지 않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예컨대 그들이 밀도 있는 형상을 회복하고 그런 만큼 세부적 서사구조를 견지하는 데 비해, 그녀는 적극적인 형상의 도입도 내러티브의 부활도 의도하지 않는다. 그녀의 작업은 전적으로 형식주의적이지도 전적으로 표현적이지도 않은 어중간한 지점에 있다. 어쩌면 그녀의 작업이 지나치게 자의적이며 자조적인 그라피티처럼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로써 그녀의 작품은 충분히 지적이고 상징적인 추상활동이며 개념적 표현활동으로서의 드로잉의 가능성을 간과하게 된다. ● 바로 이 지점이, 그녀의 작업이 타자와의 적극적인 소통의 모색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다소 시대착오적 발상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닌가 회의하게 하는 대목이다. 사실 소통에 대한 의식이 부족할 때 설득력 있는 조형언어를 가지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드로잉을 통한 신체적 감각의 진폭이 타자에게 파장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형식과 내용 면에 있어서 훨씬 더 디테일하고 정교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물론 소통이라는 함수는 반드시 적확한 메시지나 정교한 화면구성에만 있지는 않다. 예술작품이라는 것이 작가의 사소하고 내밀한 심리적 기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당연한 이상 어쩌면 그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예컨대 자폐적일 정도로 진정한 몰입과 유희가 심화되면, 타자와의 소통이 모색되는 접점이 마련될 수 있고, 그것은 다시 사회적 본질로까지 확산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이기적 욕망의 배타적 실천이 결국 공존의 윤리로 성숙할 수 있다는 헤겔의 논리와도 통한다.
오해할만한 소지에도 불구하고 그녀 작업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기묘한 미감을 포착하게 된다. 그것은 매우 유치하기도 하고 원시적이기도 한 형상 혹은 그것들의 무질서한 배열로부터 오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자연스러움이야말로 자생적으로 획득한 미덕에 속한다. 이런 맥락에서 어떤 주제도 그녀에게 오면 경쾌함과 반전 그리고 특유의 아이러니와 패러독스라는 연금술 적인 변이를 갖는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직관을 중심으로 기교보다는 자발성을 존중하고, 즉흥적으로 일어나는 생각과 충동을 내밀화 하는 그녀만의 탁월한 조형감각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 회화의 존재론적 근거가 회화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인식론적인 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이상 그것은 사물과 몸의 전일 적인 떨림에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나는 그녀의 작업이 신체적 감각의 최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처절한 자기 치유에 대한 갈망이고 수단이며, 최소한의 숨통이고 실존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알 것 같다. 더불어 아직 서랍 속에서 나오지 못한 그녀의 독설 적인 작업들이 밀도 있는 형상성은 물론 다층 적인 수사학적 구조를 가지고, 불쑥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게 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 유경희
Vol.20040316a | 주홍미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