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갤러리 가이아 홈페이지로 갑니다.
갤러리 가이아 서울 종로구 관훈동 145번지 Tel. 02_733_3373
'전통'과 '현대'의 경계에서 ● 박선희 작업의 중심은 그림을 통하여 자신의 실존을 찾아가는 정체성 탐구의 과정에 있다. 자신의 실존에 대한 물음은 동시에 '나'와 관계하고 있는 세계를 보는 눈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므로, 이는 곧 가치관의 문제로 귀결된다. 결국 크게 보면 세계에 대한 인식과 그것에 대한 표현의 문제로 환원할 수 있다. ● 자신의 실존을 규정하는 수많은 인식의 방법 속에서 박선희가 던지는 물음은 '전통'과 '현대'라는 화두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전통'과 '현대'의 문제는 끊이지 않고 제기되었던 가치 인식에 관한 문제이다. 특히 동양의 그림에 있어서 "옛 전통을 따를 것인가(師古)", "자연을 따를 것인가(師自然)", 즉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문제는 화론의 발전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의미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한대 금고문 논쟁이나 17세기 프랑스 신구논쟁 또한 고전과 현대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어떠한 시각으로 규정할 것인가하는 인식의 방법론으로써 제기된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 다만 박선희가 안고 있는 '전통'과 '현대'에 관한 문제는 과거 여러 논쟁들에 비해 보다 더 많은 사회적인 외부요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일어난 내면적 갈등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현재 우리 사회에서 사회구성원 모두 피해 나갈 수 없는 사회적인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우리의 근대화의 과정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근대화의 문제가 정체성의 문제와 결부하여 중시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우리의 근대화가 자각이 아니라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강요된 근대의 이면에는 우리의 전통이 서구의 인식론에 의해 도전 받고, 단절되면서 '나'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과정이 있다.
우리의 미술사는 근대를 거치면서 때로는 왜곡되고, 때로는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진행되어왔다. 이러한 문제의 근원은 역시 '근대성'의 규정에 있으며, 문제의 해결점은 '전통'과 '현대'의 경계에 있다. 특히 회화부문에서 '한국화'나 '동양화', '서양화' 같은 용어의 개념 문제뿐만 아니라, 작가의 내면의식마저도 이 '전통'과 '현대'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박선희는 근대이후 '미술'의 개념과 의식의 문제를 재료와 세계관의 문제로 환원하여 작품에서 상대적인 상징체계의 기호로 보여준다. 현대적인 삶과 의식을 물질문명에 기초한 상징체계로 이해하고, 딱딱한 사각형의 소지 위에 빨강과 녹색의 보색이 혼합하여 이루어낸 복합적인 색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세계는 스밈이나 여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느슨한 구조가 아니라, 수리적이고 논리적이다. 녹색의 바탕 위에 보이는 바코드나 숫자 등이 이러한 세계의 표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리적 세계가 언제나 명징하지는 않다. 인간관계와 삶의 오묘한 비밀이 언제나 명징하게 수학적인 계산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숫자와 바코드도 퇴색되고 부분적으로 탈락되어 있다. 이와 반대로 '전통'의 세계는 혼돈으로 가득 차 있다. 부드러운 한지 위에 먹과 채색이 스며들고 여백과 붓의 건담이 느슨한 세계를 만들지만, 이 세계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하여 실존의 부정은 아니며, 현재 '나'의 일부분을 이루기는 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세계로 이해된다.
박선희는 이 두 가지 세계의 표상을 서로 포개어 대비함으로써 현재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의도한다. 이러한 표현과정에서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반성에 의한 내면세계의 정화의식이다. 그의 '전통'과 '현대'의 변증법적 부정과 새로운 긍정에 의한 정체성의 규정은 자신의 의식을 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는 끊임없이 현재의 삶 속에서 확대 재생산되어 가는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비우기 위해 빈 공간을 만든다. 딱딱하고 간략하지만 보색의 복잡한 섞임의 과정을 통해 나온 현대적 삶의 공간과 먹과 채색이 만든 여백이 표상하는 전통의 대비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세계의 수직 수평의 나열 속에서 비어있는 공간은 박선희의 의식의 쉼터이자, 삶의 무게를 덜어내는 방식이다. ● 이러한 욕망의 제어로 이해되는 도덕적 의지는 그의 그림에서 '전통'과 '현대'에 대한 해석에 좀 더 공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사회적 가치로 환원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 김백균
Vol.20040315a | 박선희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