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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310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김기일_김미형_김영길_김춘수_박기원_박유아 박은선_박현주_변선영_이계원_최욱_한은선
전시진행_박부경_최재승
작가와의 만남 2004_0313_토요일_11:00am_김기일_이계원 2004_0317_수요일_03:00pm_최욱 2004_0318_목요일_01:00pm_박현주_변선영 2004_0319_금요일_02:00pm/04:00pm_박은선_한은선 2004_0320_토요일_11:00am_김춘수 2004_0322_월요일_03:00pm_김미형
선 아트센터ㆍ선화랑 서울 종로구 인사동 184번지 Tel. 02_734_5839
觀照의 작가들 ● 현대미술을 지탱시켜주고 있는 여러 가지 개념과 명제들 중 '觀照'(Contemplation)는 우리 공동체의 유전자 속에 있는 원형적인 요소가 아닐까. 주지하는 바와 같이 지난 7, 80년대이래 현대미술의 일각에서 '우리'의 원형적 미감과 현대미술의 양식들을 접목시키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있었다. 특히 단색의 모노크롬 회화는 '순수' 혹은 '무관심성'으로 회자되는 관조의 미학을 표방하는 가운데, 전통적 미의식과의 공통점을 이론적으로 정립함으로써 비로소 현대미술의 주체적 수용을 거론하게 되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그러한 미학적 탐구의 과제들이 현실 참여의 테제와 곧 이어 쇄도하기 시작한 포스트모던 이슈들에 의해 매몰되고 만다. 90년대 이래의 우리 미술은 일정한 이슈가 주도하는 미술의 질서에서 벗어나 개성과 방언적이고 작은 담론들이 할거(割據)하는 혼돈의 상황으로 치닫는 듯했다. ● 아이러니라 해야 할까, 과거 여러 가지로 경색된 상황 속에서는 반항적이고 격정적인 양식과 담론들이 표출되다가, 그것들이 이제 어느 정도 주류를 이루어갈 때쯤엔 다시 이전 혹은 억압을 당했던 양상들이 고개를 들게 된다. 어느 시대나 예술을 역사적으로 조망해 볼 때 다소 변증법적인 리듬을 띠고 있는 것은 자명한 이치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관조의 미학은 다시 부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관조의 미학은 어떤 시대적인 사조나 유행으로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담론 속에서 표방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유행에 따라 명멸하는 성질의 것으로 파악하기를 거부하고, 그러한 표피를 넘어선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공동체적 원형의 것으로 간주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관조라는 개념을 조금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선 관조는 동양사상에서나 서양 근대미학에서 공통적으로 예술의 중요한 중추적 개념으로 간주된다. 사유 행위든 혹은 지각행위든, 관조는 주관적인 요소들 혹은 외부적 조건들을 가급적 배제한 상태에서 대상에 접근하는 태도이다. 서양미학, 특히 근대미학에서의 순수 혹은 무관심성, 자율성 등의 개념과 비교적 밀접한 개념이다. 특히 유미적, 신비적인, 그리고 심적 거리(Psychical Distance), 고상함, 지성 등과 동반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미학적 개념들이 우리에겐 더욱 친숙한 것으로, 그리고 선천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의 생활 속에서 굳이 예술이 아니어도 종교적, 도덕적 행위들 안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터이다. 바로 이러한 양상이 오늘의 미술에서 양식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 다양하게 포착되고 있다. 수다스런 잡음들을 제거한 단색조의 양식이나, 절제된 형식 내지 구조의 양식, 대상의 물성과 주체의 행위 및 의식의 자연스런 흐름을 존중하는 양식 등이 그것이다. ● 그러나 이 자리에서 보게 될 작가들의 작품세계에서 확인될 수 있는 바와 같이 적어도 오늘의 관조적 미학은 과거의 양식처럼 유니크한 혹은 전형적인 것은 오히려 드물다. 관조를 위한 관조, 순수를 위한 순수란 없듯이 오늘의 작가들이 관조라는 개념 그 자체를 의식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관조가 아닐 수도 있다. 따라서 관조는 교조적으로 표출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행위 속에서 드러남 혹은 엿보임을 통해 확인될 뿐이다. 적어도 오늘날의 작가들에게서 발견되는 관조의 미학은 어떤 전형으로 양식화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 구가되고 발현되는 것으로서 말이다. 여기 모인 작가들 어느 누구도 관조에 대해 의식적으로 고집하고 있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그들의 자기 세계와 자기의 언어에 몰입한 결과가 관조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나친 감정만의 몰입이나 기술적인 몰입이 아니라 이성적 사유가 조화적으로 삽입된 몰입이다. 이러한 관조적 양상들이 오늘날 가장 왕성하게 활동중인 우리 작가들의 작품세계에서 여러 가지 양상으로 발견되고 있다.
아무리 관조가 우리 공동체의 원형적인 미의식의 부분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왜 오늘날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8,90년대 우리 미술의 상황이 어떤 집단적인 논리들이 충돌하고 있는 때는 관조라는 개념이 마치 계급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처럼 매도될 수도 있는 때였다. 그런데 90년대 중반부터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 불붙으면서 알게 모르게 출처 불명의 새로운 논리와 양식들이 포스트모던의 이름으로 넘치게 된다. 그러나 최초 탈 모던의 논리가 근대주의의 거대화, 체계화 및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역사적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이라는 과제와는 달리 어떤 변질된 변종들이 허다하게 목격되고 있는 것이다. 감정 과잉의 표피적인 문화만이 성행하는 변질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소개하는 '관조'의 작가들은 이런 양상에 대한 모종의 반성 혹은 비판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모던에 대한 복고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탈 모던' 속에서 발견되는 관조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모노크롬 작가들에게서 보는 엄격한 양식과는 차이가 있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작가들마다 자유롭고 유연한 개성과 독특한 경험, 그리고 자기만의 창조적인 방법들이 이전의 세대들과는 다른 차별의 단서가 된다. ● 이 작가들의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동세대의 다른 작가들에게서 보는 소음과도 같은 군더더기나 수다스러움의 요소들을 배제하고, 보다 대상과의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경험들을 추출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그것은 더러 절제적인 간결구조, 물성, 사유, 행위, 역설, 은유 등의 양상으로 압축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참고로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유형적으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절제와 반복(박기원, 김미형), 2) 물성과의 상호작용(김기일), 3)사유와 행위(김춘수) 4) 물성과 리듬(한은선), 5) 간결 구조와 역설(이계원, 박현주), 6) 반복 속의 변화 (김영길) 7) 절제 속의 은유(변선영, 박유아), 8) 재현 속의 은유(최욱), 9)환영과 사유(박은선). 이들의 면면은 대부분이 이미 잘 알려진 작가들이다. 또한 이들의 작품세계가 우리 미술의 특징을 결정하는 데도 적지 않은 비중을 가질 것이다. 바로 그러한 작가들에게서 발견되는 관조의 미학이 이제 실험적인 차원이 아니라 자연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향유되고 있다는 것은 오늘의 현대미술사에서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이상의 내용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관조의 개념 자체를 작가 주체와 대상간의 문제로만 설정하는 데 머물지 않고, 관객과의 상호작용 내지는 대화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관객과의 상호작용이라는 것 자체도 '근대 이후'의 예술, 특히 아방가르드 미술이 추구해 온 패러다임 중의 하나다. 미술의 개방성이 소통의 개방을 지향하는 오늘의 보편적인 추세임에는 분명하다. 관객의 참여나 대화가능성의 여지를 위해 많은 방법들과 장치들이 고안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12인의 작가들도 궤를 함께 하고 있기는 하다. 다만 그것이 작위적인 제스츄어에 의해 이루어지기보다는 관객과의 자연스러운 만남 속에서 교감되는 것, 즉 작은 계기를 통해 보다 큰 경험과 만족을 얻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 우리의 현대미술이 가지고 있는 양상은 이데올로기나 양식, 방법, 세대 등의 요소들이 다양하고 다층적으로 혼재하고 있어, 한 마디로 그 특징을 요약하는 것이 쉽지 않다. 다만 다른 나라의 미술과 비교하여 얻은 인상만큼은 주관적이기는 하나 기술 가능하다. 그 인상들을 표현한 말 가운데 '선이 굵다'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다. 비단 미술만이 아니라 음악 등의 분야를 통해서도 잘 확인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말이 가지는 의미는 자명하면서도 막상 어떤 특징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 앞에서는 약간 모호해지기 쉬운 데가 있다. 하지만 선이 굵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우회적인 서술보다는 단도직입적이고 간명한 핵심, 요령보다는 원칙과 기개, 자잘한 현상보다는 본질, 우유부단 보다는 단호함을 특징으로 하면서도, 명예를 소중히 여기며 보다 시야가 넓고 호흡이 긴 것을 말한다. 그것은 단순히 스케일이나 에너지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의식이나 미감으로 환원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미술에서 볼 때 화면에 그려진 물리적인 선 그 자체를 말함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잔 기교가 없이 투박한 형식 속에서도 호흡이 길고, 대체로 직관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여유가 넘칠 때를 두고 일컫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인상을 심어주는 데 결정적인 것이 바로 '관조의 작가들' 바로 그들의 작품세계라 믿는다. 작가들 전체를 관조라는 개념을 공통분모로 묶어 보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전모를 말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전제한 바 있다. 다만 오히려 자기 세계에 대한 선이 비교적 굵고 곧은 정도의 인상에서 이루어진 집합으로 괄호가 쳐진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들의 작업은 대체로 관조를 의식한 바도 없을 만큼 자기 세계에 충실히 정진하고 천착해간 결과일 뿐이다. 道가 말로 할 땐 이미 도가 아니듯, 관조 역시 그들을 기술하기에 족한 용어가 아님을 안다. 그저 에너지가 넘치고 꿈꾸기를 좋아하는 선 굵은 작가들의 무리 정도로만 기술하는 것이 좋았을 일이다. 그러기에 '선이 굵다'는 기술도 역시 수다스런 사족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 이재언
Vol.20040314a | 예감 2004 '관조의 기쁨'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