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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310_수요일_05:00pm
금산갤러리 서울 종로구 소격동 66번지 Tel. 02_735_6317
'긋기'의 해체와 전통의 재창출 ● 80년대 후반부터 한국화분야에서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현상 중 하나는 전통이 형식의 고정적인 틀로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유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전통의 재창출'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몇몇 작가들에 의해 전통적이라고 여겨지는 새로운 매체의 개발로 이어지고 새로운 형식의 작업들이 시도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에는 없던 형식이지만, 전통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매체들이 발명되고, 이를 전통의 맥락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전통의 창조와 날조라는 양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 곽혜원의 그림 또한 표현의 형식면에서 전통적인 '긋는' 선조나 '선염'을 기초로 하는 수묵의 전통에서는 벗어나 있는 것으로 전통의 새로운 창출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된다. 그의 그림은 닥을 주원료로 두텁게 겹쳐 요철의 효과를 이용한 종이 저부조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에게서 종이는 이미 먹의 미묘한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정신적 영감의 표현을 위한 의식의 동시표현이라는 전통적 재료의 의미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이러한 형식의 작업은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시 여겼던 농담건습 같은 먹선의 골기나 선의 흐름이 작품의 품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조형적인 조화와 구성이 그림의 성패를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이미 '선의 예술'이라고 하는 '동양화' 또는 '한국화'의 주된 표현 특질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 것이다.
동양의 회화에서 '선(線)'은 위진시기 예술의 자각시대를 거쳐 당 중기 이후로는 '화가 자신의 정신적 표현'이라는 그림에 대한 개념의 변화와 함께 그림이란 선의 형식이 만들어내는 사상이나 정감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매우 중시되었다. 그림을 인간의 시각적 감각기능에 의존하여 세계를 파악하는 수단의 하나로 '예술'의 영역에서 논의할 때, 그림이란 전적으로 '긋는다'라는 인간의 실천행위 속에서 이해되는 문화현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물론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그림이 단순히 대상의 외형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으며, 나아가 그림이란 객관적인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주관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라는 성격이 부여된다. 또 '선' 중시 사유는 동양의 그림을 '시간이 공간을 주도하는' 회화의 근거가 된다. ● 그러나 곽혜원은 그의 작업에서 '긋기'를 통한 시간성을 드러내는 '선'라는 전통적인 표현방식을 뒤집어, 전통적 의미의 '선'의 해체를 의도한다. '선적' 요소의 '긋는' 성질의 해체는 곽혜원의 작업의 핵심이다. 곽혜원은 '긋기'의 해체를 통하여 자신의 작업을 전통적 회화와는 매우 다른 근대적 의미의 '미술'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도록 만들었다. 선의 '긋기'가 허물어진 사이를 곽혜원은 닥종이의 물성으로 채운다. 닥의 부드러운 물성에 철판을 오려 만든 조형적 선이 붓으로 '긋는' 선을 대신한다. 이때 조형화된 선은 '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면으로 인식된다. 전통회화의 정신성을 드러내는 시간적 속성은 붓이 지나가는 선의 건습과 속도가 아닌, 철판의 부식에 의한 녹물의 맺힘을 통해 드러난다. 이처럼 그는 닥종이의 물성이나 철판의 부식 같은 자연적인 물질의 특성을 최대한 이용함으로써 화면의 구성은 의도된 우연성에 더 많이 좌우되는 셈이다.
그의 작업에서 보이는 서예적인 요소 역시 그 형상적 특성과는 다르게 필선의 해체라는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그림의 선은 '물상의 구획'과 피차 사물간의 다름에 대한 표현형식으로 여겨졌으며, 본질적인 의미에서 글자의 선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림과 글씨는 근원이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서화동원론(書畵同源論)'은 주로 『역』의 '도(圖)'를 근거로 성립한다. 장언원은 『역대명화기』에서 안광록(顔光祿)의 말을 인용하여 회화가 '도'의 하위 개념으로 글자와 같은 원리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도(圖)에는 세 가지의 의미가 있으니 하나는 '도리(圖理)' 즉 괘상(卦象)을 말하는 것이고, 둘째는 '도식(圖識)' 즉 글자를 아는 것이며, 셋째는 '도형(圖形)' 즉 그림을 말하는 것이다." 즉 '도'는 괘상과 글자, 그림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으로 글자와 그림의 상위개념이 된다. '도'는 대상의 총체적인 형상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물론 여기에서 '도'는 구체적으로는 '하도(河圖)'를 일컫는 것이지만 '하도'가 세상의 원리와 모든 삼라만상을 내포하는 하나의 상징체계이므로 '도(圖)'가 구현하는 것은 시각적인 구현으로서 '도(道)'가 된다. 결국 그림이나 글씨나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고 표현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지만, 『역』의 시간적 변이(變易)의 법칙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그림이나 글씨 모두 '긋기'가 전제되는 것이다.
곽혜원은 '선'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 관념의 해체를 통하여 자신의 근대적 정체성을 확보한다. 예를 들어 곽혜원의 작업 중에서 「일ㆍ월(日ㆍ月)」이나 「산(山)」등의 작품들은 한자(漢字)의 시간 속에서 이해되는 상형성을 필획의 원리에 의하여 차용하고 있지만, 이미 구성된 틀에서 조형화된 선을 만들에 낸다는 점에서 전통적 필획의 시간적 속성을 논리적 공간의 조형 속에서 다룸으로서 전통적 서화동원론(書畵同源論)의 해체를 시도하는 것이다. 또 이러한 해체의 이면에는 근대적 사유체계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삶의 규칙을 투영하고자 하는 의도와 전통의 계승을 형식이 아닌 작가가 새롭게 구성해낸 세계관 속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스며있다. ■ 김백균
Vol.20040311a | 곽혜원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