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4_0310_수요일_05:00pm
인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비움을 형상화한 조각 ●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상(색)은 공이다. 형상은 일시적인 모습일 뿐 실체가 없다. (고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참모습은 공이지, 실체가 아닌 것이다. ● 비우다. 어떻게 비움을 형상화할 것인가. 어떻게 비움을 실천할 것인가. 공간적 개념으로서의 비움은 공(空)이다. 존재론적 개념으로서의 비움은 부재이다. 그리고 언어의 형식으로서의 비움은 침묵이다. 침묵은 말이 사라지는 지점, 의미가 소거되는 지점, 내가 지워지는 지점이다. 나의 존재를 원초의 상태, 백지 상태, 제로 지점으로 되돌려놓는 것이 공이고, 부재이고, 침묵인 것이다. 이는 단순히 세계가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는 부정의 논리가 아니라,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진정한 세계가 내 눈앞에 오롯히 떠오르게 하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편되게 하는 절대 긍정의 논리이다. 비움은 공이고, 형상은 공에서 탈(脫)하기이다. 그러므로 비움을 형상화한다는 것은 그 자체 모순율이며, 이러한 모순율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원경의 조각은 이러한 모순율을 매개로 해서 조각의 이유, 존재의 이유를 찾는 과정에 맞춰져 있다. 조각은 형상을 만들어내는 일이고, 이원경의 조각은 형상을 비워내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의 조각은 사실은 탈조각이다. 최초 형상을 만들어내기, 그리고 그렇게 만든 형상을 비워내기, 그럼으로써 형상으로부터 형상이 빠져나가고 형상 대신 형상의 흔적이 남겨지게 하는 것이 그의 조각이다. 이처럼 형상을 내포하고 있는 형상의 흔적은 존재를 포함하는 부재, 의미를 포함하는 침묵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탈조각은 미니멀리즘에서의 탈조각과는 다르다. 다시 말해서, 미니멀리즘에서의 탈조각은 재료의 물성과 구조만을 조각의 요소로 보고, 이를 실천한 모더니즘적 환원주의의 논리적 귀결이 낳은 산물이다. 그 속에는 그 논리를 훼손할만한 어떠한 최소한의 감각적 요소도 없거니와, 심지어 조각의 주체인 개성마저도 끼여들 여지가 없다. 미니멀리즘에서 공공연히 주체의 상실이나 저자의 죽음이 논의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미니멀리즘은 철저하게 조각의 본질에 대한 물음인 것이지, 조각과 존재와의 관계를 묻는 관계의 미학이 아닌 것이다. ● 이와는 다르게 이원경의 탈조각은 어디까지나 조각을 만들고, 그 조각으로부터 조각을 비워내는 식이다. 말하자면 비워냄으로써 조각하기, 형상의 흔적으로써 형상을 대체하기,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말하기, 침묵으로써 의미를 생산하기와 관련이 깊다. 보기에 따라서 작가의 조각은 존재와 부재, 형상과 흔적, 침묵과 언어(의미) 사이의 관계를 탐색하는 일종의 간(間) 텍스트성의 실천에도 접맥돼 있다.
그리고 이는 근대적인 사유의 산물인 주체에 대한 회의에 바탕을 둔 해체론과도 통하는 것이다. 주체는 의미의 산물인 것이고, 해체론에서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의심은 곧 주체에 대한 의심인 것이다. 그러니까 해체론에서 궁극적인 의미는 계속 덧칠되고 연기될 뿐, 끝내 붙잡을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궁극적인 존재는 끝내 붙잡을 수 없다는 것, 이는 본질주의와 실체론 그리고 주체론에 대한 회의의 공공연한 표명이며, 그 자체 형상과 탈(비)형상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본 불교의 교리와도 일맥상통한다. 불교에서 존재에게 주어진 과제는 다름 아닌 주체를 지우는 것이다. 이는 그 자체 형상과 비형상에 대한, 관념상과 감각상에 대한 무차별성의 논리와도 통하는 것이다.
먼저 이원경의 작업 「游泳의 꿈」을 보면, 반구의 원반을 물 삼아서 그 위에 각각 양각된 그리고 음각된 물고기를 형상화하고 있다. 여기서 양각된 그리고 음각된 물고기들은 있음과 없음, 형상과 공, 존재와 부재, 관념상과 감각상이 무차별적으로 공존하는 존재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양각된 물고기는 형상으로써, 그리고 음각된 물고기는 형상이 빠져나간 형상의 흔적으로써 물고기의 존재를 증명한다. 여기서 물고기는 그 실체가 있는 것이면서, 이와 동시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물고기의 유유자적함을 안다고 한 장자의 사유는 장자로부터 물고기로, 그리고 재차 물로 탈존재를 진행시킴으로써 마침내는 장자와 물고기 그리고 물이 하나의 존재임을 인식한 결과일 것이다. 있음과 없음이, 존재와 부재가 하나로 연속된 것임을 인식한 결과일 것이다. ● 이 작업에서도 그렇지만 물은 흔히 자기반성적인 사유에로 이끄는 강력한 기제로 작용한다. 이를 좀더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업이 「우물」이다. 사각의 프레임 속에 얼굴을 음각한 움푹 패인 원호는 이러한 자기반성적인 사유의 계기로서의 우물을 거의 직접적으로 암시한다. 이 작업에서 얼굴은 그 실체가 없다. 대신, 그 흔적만이 남아 얼굴을 증명해준다. 그것은 얼굴이 아니라 얼굴의 흔적인 것이다. 얼굴의 부피와 표면적만큼 비어있는 깊이를 즉 우물을 만든다. 이때의 우물은 자기 자신을 투사하는 내면의 거울, 나르시스의 샘이다. 자기와 사랑에 빠져 죽는 나르시스의 자기애(自己愛)는 주체로서의 자기를 죽이는 탈주체를 실천할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자기를 얻을 수 있다는 존재의 아이러니를 말해준다. 그러므로 나르시스의 신화는 엄밀하게는 주체의 논리인 것이지, 탈주체의 논리가 아닌 것이다.
여타의 작업들에서도 그 방법이 다르지 않은데, 이를테면 두 손을 모은 손바닥 안에 얼굴을 음각한 「즐거운 異夢」이나, 인체 좌상을 점토로 소성한 후 이를 사각의 입방체로 떠내고, 최초의 점토 소성 부분을 비워낸 「채우다」에서도 이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특히 「채우다」란 제목은 「비우다」라는 이번 전시의 주제와 부딪치면서 미묘한 울림을 발생시킨다. 결국 앞서 말했듯이 작가의 작업은 비워냄으로써 채워진 것을 증명하는 방법인 것이며, 진정한 존재는 부재나 다름없음을 증명하는 방법인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채우다」에 나타난 속이 텅 빈 존재는 진정한 존재로서의 큰 빔(太虛)에 대해서 말해준다. 이는 타자론과도 통하는 것으로서, 나라는 존재는 한낱 허명(虛名)일 뿐 이질적인 존재들이 드나드는 통로인 것이다. 나의 몸은 부재의 벽돌로 축조된 존재의 집이며, 이질적인 타자들이 드나드는 통로이며, 낯선 신들이 거주하는 만신전인 것이다. ● 그리고 밀랍으로 주조한, 머리가 없는 3 좌상을 대비시킨 작업에서 소재로 도입된 밀랍이 부재로서의 존재, 빈 것으로서의 형상을 또 다른 형태로 변주해내고 있다. 그 자체 밀랍은 쉽게 녹아 없어지는 박약한 소재로서 덧없는 형상, 빈 형상을 암시한다. 또한 머리가 없는 형상은 인간이 정신적인 존재이기보다는 육(肉)적인 존재임을 보여준다. 그의 몸은, 엄밀하게 감각적인 형상으로서의 몸은 모든 덧없는 것들의 운명을 말해준다. 특히 이 3 좌상 중에서 상(像) 전체를 음각으로 처리하고, 그 가슴 한가운데로부터 양각으로 돌출된 머리가 이러한 육적인 존재를 강하게 환기시켜준다. 이는 말하자면 정신의 도구로서의 머리가 아니라, 가슴과 몸에 연장된 머리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원경은 이러한 여타의 형상들과 더불어 베개를 소재로 도입하고 있다. 「들어가다」 연작과 석고 베개에 잠자는 사람 얼굴을 음각한 일련의 작업들을 보면, 작가는 소재 고유의 본성을 거스르고 있다. 그러니까 원래 베개란 애초의 상태를 회복하려는 자기 회생력을 갖는 소재인데 반해, 작가의 작업에 나타난 베개는 그것에 가해진 존재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여기서 존재의 흔적은 그대로 존재의 무게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베개에는 거기에 기대어 잠이 든 존재의 무게와 표면적만큼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것에서는 시지각적 감수성을 넘어 촉각적인 감수성마저 느껴진다. 부드러운 베개의 표면적에 오롯이 남겨진 존재의 흔적, 여전히 깊은 잠에 빠진 그것은 부재하는 존재를 손에 잡힐 듯 극명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잠은 부재로써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도입된다. 자기에게 가해진 모든 역학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베개의 부드러운 촉감과 포용력, 그리고 자기를 완전히 포기한 나른한 잠이 현실과 비현실의, 현실과 꿈의 문을 열어 놓는다. 하얀 석고가 주는 가벼운 질량이나 베개의 부드러운 촉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잠의 철저한 방기가 현실에 붙박이로 사는 치열한 존재와는 다른 차원의 존재를 예시해준다. 이를테면 꿈, 몽상, 몽환과 더불어 사는 비현실적 존재를. ■ 고충환
Vol.20040309b | 이원경展 / LEEWONKYUNG / 李嫄景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