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4_0308_월요일_05:00pm
A.D갤러리 서울 성북구 삼선동2가 389번지 한성대학교 연구관 Tel. 02_760_4271
소통강박증 ● 알베르 까뮈의 소설 『페스트』는 전염병인 페스트가 발생함으로써 갑작스럽게 외부와 격리되는 알제리 해안의 평범한 도시인 오랑 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묘사한다. 오랑 시의 거주자는 물론이고 때 마침 그 도시를 방문한 사람들도 역시 일종의 감금상태를 경험하게 되는데 거대한 감옥이 되어버린 도시 속에서 그들이 견뎌내기 힘들었던 것은 아마도 죽음을 강요하는 질병에 대한 공포와 불안보다도 외부의 도움을 바랄 수 없는, 혼자서 겪어내야만 했던 극도의 고독감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 소설 속의 오랑 시와 같이 특수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고독감은 일상 속에서 누구라도 만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고독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고독은 모든 개인에게 부여된 근원적 성향이기 때문이다. 고독은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해로운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때때로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킴으로써 고독에 빠져들기도 하며 고독할 때 일에 집중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고독은 때로 필요하고 때에 따라서는 즐길만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기간 계속되는 고독이나 세상의 것들로부터 멀어지고 낯설어지는 소외의 경험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사람들은 고독하고 싶어하지 않으며 고독과 직면했을 때 고독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타인을 만나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는 것도 고독하지 않으려는 이유라고 한다면 억지일까? ● 우리는 각자 사소하고 임시적인 관계에서부터 아주 친밀한 관계까지를 포함하는 수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우리가 끊임없이 사방으로 얽힌 관계의 그물을 짜고 그 관계의 그물 속에 얽혀 있기를 바라는 것은 단지 고독하지 않으려는 이유만은 아니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의미를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 고독을 벗어나기 위해서든, 존재의미를 느끼기 위해서든, 어떠한 이유에서든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소통이 필요하다. 아무런 소통 없이 관계를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통은 가능한 일일까? ● 장 그르니에는 『일상적인 삶』에서 '모든 소통은 흔히 「인격」이라 부르는 것들을 전제한다. 그게 아니라면 거기에는 병렬이나 얽힘 혹은 상호침투는 있을지언정 결코 주고받음은 없을 것이다. 이 주고 받음은 결국 한 인격을 다른 인격으로 이동시켜서 그 인격은 자신이 아니라 타자 속에서 살게된다. 사람들이 사랑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타인을 사랑할 때 진정한 소통은 이루어질 수 있다. ● 그렇다면 타인에 대한 사랑만 있다면 소통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 소통은 주는 쪽과 받는 쪽 둘 사이의 왕래에 의한 것이므로 주는 쪽 혹은 받는 쪽 어느 한 쪽 일방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주는 쪽과 받는 쪽 둘 다의 노력이 있다해도 소통은 여전히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주는 쪽과 받는 쪽의 다름, 즉 자아와 타자의 차이 때문이다. 나와 타자는 절대적으로 다르다. 타자는 나 자신이 아닌 것이다. 내가 타인이 될 수 없고 타인 또한 내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절대적 차이를 가진 존재로서의 타인과 내가 소통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여진다. ● 소통은 근본적으로 불통이 전제되어 있으며 타자의 타자성 자체에 대한 인정만이 유일한 소통의 조건이 될 수 있다. ● 한편 기호학의 입장에서 보면 소통의 실패는 없다. 송신자가 목표했던 의미작용이 수신자에게 일어나지 않더라도 의미작용은 어떤 식으로든 항상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며 오히려 송신자의 의도가 얼마나 잘 전달되는지에 대해서보다는 얼마나 많은 다른 의미를 수신자에게 일으킬 수 있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 기호학은 우리에게 소통의 실패는 무의미한 것이고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하는 것은 의미의 재생산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소통이 실패하는 운명에 처해있고 소통의 실패는 무의미한 것이므로 소통의 실패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해도 소통은 결과와 상관없이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여전히 시도되어야할 어떤 것이다. ●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 나에게는 많지는 않았다 해도 이런 저런 만남이 있었고 앞으로의 시간동안에도 계속 나는 누군가와의 만남을 가지게 될 것이며 자의든 타의든 그들과 관계를 맺게될 것이다. 나는 타인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고 늘 누군가와 소통하지만 동시에 아무와도 소통하지 못한다. ● 그렇게 아무와도 소통하지 못하는데 나는 자꾸만 소통을 꿈꾼다. ● 소통에 대한 욕망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 소통에,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할수록 더욱 더 소통은 나로부터 멀어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소통과 정물 ● 수많은 다툼과 소란, 분주함의 한가운데에서 조용히 침묵을 지키는 정물, 그들만의 세계가 있다. 정물이라는 이름에 이미 정지된 시간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정물에는 움직임이 없다. 정물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갖가지 흥미진진한 사건들처럼 우리의 관심을 끄는 힘을 가지지도 못한다. 정물은 우리의 주변에 널려있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의 한 부분이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 정물은 어떠한 특정한 장소와 상관없이 전혀 극적이지 않은 일상적 현실의 단편을 재현한다. 그들은 그저 누군가의 식탁 위에, 어딘가의 사무실 탁자 위에, 먼지 쌓인 방의 한 구석에 언제나처럼 묵묵히 있다. ● 옥스퍼드 사전에서는 정물화(Still Life)를 "탁자 위에 배열되어 있는 과일, 꽃 또는 용기와 같이 움직이지 않는 사물의 그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정물화가 인물화, 풍경화와 더불어 전통적인 미술의 한 장르로서 꾸준히 다루어져 온 것은 손쉽게 소재를 구할 수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계를 재현하지만 작가가 화면을 마음대로 구성할 수 있는 자유로움에 있을 것이다. 정물은 인위적인 배치가 가능하므로 조형적 연구에 유리하다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단지 소재를 구하기 쉽다는 것과 화면구성이 자유롭다는 것만이 정물을 선택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정물은 우리가 손을 내밀면 닿을 거리에 항상 존재하는 사소하고 권태롭기까지 한 일상의 모습에 불과하고 사람을 포함하지 않는 사물의 세계이지만 나는 인간의 삶의 한 단면을 그 속에서 본다. ● 정물은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연의 조작에 의해 위치가 부여되었다. 그리고 또한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변경시킬 수도 없다. ● 어떠한 상관관계도 없이 놓여지고 이동하지도 못하는 정물들 상호간에는 아무런 소통도 없어 보인다. 물론 이러한 시각은 사물에 대한 나의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해석일 수 있다. ● 르네 마그리뜨의 1935년 작 「Portrait」은 여러 가지 해석의 여지가 있겠지만 사물의 시선을 보여주는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주 간소하게 차려진 식탁을 그린그림이다. 식탁 위에는 술병, 유리컵, 포크와 나이프, 접시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접시에는 고기조각 같은 것이 담겨 있는데 그 고기조각에는 우리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가 그려져 있다. 인간의 눈을 달고 있는 고깃덩어리라니! 섬뜩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우리가 흔히 보여지는 대상으로서만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마그리뜨의 그림처럼 사물들이 실제로 인간의 눈동자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사물도 똑같이 우리를 본다. 사물과 나는 나의 시선에 의해서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사물의 시선에 의해서 나 역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 사물의 시선이 있고 나와 사물 사이에 연결 통로가 있다면 사물과 사물 사이에도 분명 연결 통로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물들은 자신만의 세계에 너무 열중한 것인지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고 서로에게 너무나 무관심해 보인다. 침묵 속에 놓여진,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정물들의 그러한 관계가 나에게는 소통하고 싶어하지만 끊임없이 소통에 실패하는 나의/사람들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요즘 석고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나의 작업의 주된 재료는 천이다. 나의 천은 2차원의 세계인 캔버스에서 벗겨져 나와 3차원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것은 단지 입체물로서의 3차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3차원의 실제 현실로 뛰어들려는 욕망을 담고 있다. ● 천과 석고, 종이로 만들어진 정물이나 식물들은 대부분 배경과 분리되어있지 않다. ● 부동의 정물들, 자신의 의지로는 어디도 갈 수 없고 일정한 한 장소에만 머물러야하는 운명을 타고난 정물들이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얼마쯤은 닮아있는 것 같다. ■ 이정희
Vol.20040307a | 이정희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