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after another

박주연_오유영 설치展   2004_0302 ▶ 2004_0321 / 월요일 휴관

박주연.오유영_One after another_브레인 팩토리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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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인 팩토리 서울 종로구 통의동 1-6번지 Tel. 02_725_9520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제도적인 틀을 부여받는다. 예컨대 출생신고와 동시에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발급받는 주민등록번호와도 같이, 개인의 존재를 특정한 코드로 편입시키는 사회적 컨텍스트 속에 자동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국가라는 개념은 개인에게 규정되는 여러 규범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이다. 개인이 어떠한 국가에 귀속되는가의 문제, 그리고 내가 속한 그 국가가 전체 세계의 권력망 속에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가의 문제는 자율적인 선택의 범주로 환원될 수 없는 거대한 구조 속에 놓여져 있다.

박주연_elsewhere_혼합재료_2004

박주연과 오유영은 이와 같은 강력한 제도적인 기호들을 작업의 소재로 활용한다. 그들은 제도권에서 통용되는 기존의 기호들을 무효화하고 백지화한 후 그것을 개인적인 취향과 선택의 문제로 전치시키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인사미술공간에서의 지난 개인전에서 박주연은 사회적인 컨텍스트에서 이탈된 오브제들을 개인적인 감수성에 의해 재배치하는 작업을 보여주었고, 오유영은 인터넷에 공개된 공적인 정보를 자신의 미적 취향에 따라 순위를 매겨 다시 배열하는 작업을 보여주었다.

박주연_elsewhere_혼합재료_2004_부분

이번 전시에서 보여지는 박주연의 작업은 세계지도 위에 다이아몬드 게임(Chinese Checkers) 판을 만들어서 판 위의 말(checkers piece)이 상호위계적인 작용없이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자유롭게 이주할 수 있게 구성한 것이다. 이는 영토와 국경, 국적이라는 강한 경계들을 무화시키고 마치 유목민처럼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옮겨다니면서, 지속적으로 자신을 새롭게 포지셔닝할 수 있는 이동의 상태를 보여준다. 이러한 이동을 위해서 필요한 룰(rule)은 제도적인 정책이나 권력관계의 룰이 아니라 전시장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개인적이고 자율적인 게임의 룰일 뿐이다. 영토가 개인에게 구속하는 복잡한 망은 게임을 통해 무력화되고 그 의미의 공백이 지극히 개인적인 진로 선택의 문제로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박주연의 작업은 이처럼 최소한의 법칙과 보다 풍부한 자발성, 그리고 우연의 요소들로 이루어진 이동의 이야기이다.

오유영_NATO 국기 19선_혼합재료_2004

오유영의 작업은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19개의 연맹국가의 국기를 작가 자신의 '심미적인 판단(aesthetic judgment)'에 의해서 1위에서 19위까지 순번을 매긴 것이다. 여기서의 순위는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속한 국가들의 정치적 위계질서와 전적으로 무관한 것으로, 단지 각 국기들의 이미지에 대한 심미적 판단에 의한 것이다. 오유영이 '판단(judgment)'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판단'이라는 것은 권력의 주체가 그것의 대상에 대해 내리는 매우 위계적인 행동양식이기 때문이다. 오유영은 개인이 자신의 취향에 따라 매기는 '심미적 판단'을 통해서 이와 같은 권력관계를 미적 선호도의 문제로 전치시키면서, '판단' 자체의 객관적 위계성을 무화시킨다. 그의 작업을 통해 북대서양 조약기구가 가진 공권력의 포지션과 국가적 위상은 백지화되고, 국가의 상징인 국기는 마치 어디에나 부착할 수 있는 초등학생용 스티커처럼 하나의 장식적인 시각적 기호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박주연.오유영_One after another_브레인 팩토리_2004

이 전시에서 박주연과 오유영은 국가라는 개념이 가진 확고하고 단정적인 컨텍스트를 개인의 미적 취향과 게임의 문제로 가볍게 치환시키고 있다. 그 철저한 컨텍스트를 내 맘대로 뒤섞고 재편성한다는다는 것 자체가 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청와대 옆 브레인팩토리의 작은 공간 안에서 지극히 가벼운 취미활동으로 변성된 국기의 순번 매기기, 원하는 국가로 이주하기의 문제는 그 자체로 유머러스하면서도 제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 있다. 'One after another'이라는 전시 제목은 위계가 해체된 열린 공간 속에서 개인의 권한으로 배치하고 창조할 수 있는 새로운 컨텍스트를 암시해준다. 그것은 순간순간 이동하는 스텝처럼 외부에서부터 주어지는 포지셔닝이 아니라 개인의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서 결정할 수 있는 자존적인 권한, 그리고 제도와 실존의 경계면에서 '놀 수 있는' 여백에 대한 바램이다. ■ 이은주

Vol.20040301b | 박주연_오유영 설치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