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갤러리 라메르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04_0211_수요일_06:00pm
갤러리 라메르 서울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 홍익빌딩 Tel. +82.(0)2.730.5454
1. 신체와 정면성의 자화상_body and full face portraits ● 티치아노의 그림 중에는 한 아이를 중심으로 양옆에 두 여인이 등장하는 그림이 있다. 한 여인은 옷을 입고 정면으로 관객을 바라보고 있으며 다른 여인은 누드로 시선을 피하며 관람자들이 마음껏 그녀의 몸을 음미하도록 하고 있다. 티치아노의 그림에서처럼 몸을 표현하는 과정이란 결코 순수하지가 않다. 신체를 어떻게 보여 줄 것인가 하는 것은 내게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신체에 대해 '누가', '무엇을', 그리고 '왜' 묘사하는지 질문해야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예술사를 통해서 볼 때 특히 사진술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고 사진에 찍힌 인물들을 대표적인 이미지로 규정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몸을 상징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도구로써 식민정책의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또한 미술사에서 여성 누드는 티치아노의 그림에서처럼 남성의 탐욕스런 시선을 위해 헌신해왔고, 전통 서술영화에서 미장센mise-en-scene처럼 여성모델은 보여지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역할도 행동도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여성의 신체는 다른 사람의 삶, 본질이나 영혼은 없지만 남자의 시선이 만들어 내는 여성의 신체의 대상화를 문자화시키면서 남자들의 설명 안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피사체로서 환상적이고 여성스러운 형태를 만드는 대상화의 심리적인 과정이 되어왔다. ● 여기서 나는 모든 것을 있게 하는 근원으로서의 몸, 에너지의 원천으로서의 몸 등 몸은 정신과 분리되지 않은 합일의 위치를 일찍부터 부여받아온 동양의 전통적 몸에 대한 인식의 실체와 서구의 사상과 미술 경향이 빠르게 수입되는 오늘날 문화적 정치적 발언으로서 신체의 문제를 혼란스럽게 동시에 직면하고 있는 세대로서의 나의 위치를 재차 확인하면서, 오늘날의 몸이 보여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본다. 이러한 동기에서 우선 나는 나에게 가장 쉬운 것이 몸의 영혼인 얼굴! 을 그려보는 것이었다. 그것도 매일 드로잉처럼 가볍게 시작한 것이다. 이년 전부터 나는 나의 얼굴을 마치 일기처럼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매일 반복되는 같은 시선의 자화상은 매일 다른 느낌의 아우라를 지니고 있다. 점차 나는 어떤 문자 기록들을 이 나의 초상들에 새기게 되었는데, 생각과 느낌들 그리고 내가 읽은 글이나 시들을 빨간 실로 나의 자화상 위에 바느질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이미지와 문자가 만나는 지점에서 존재하는 어떤 문학적 힘을 느끼게 되면서부터 이다.
때로 나는 대중가수 K.D 랭의 여성들에게 던진 "대담하게 행동하며 상처받지도 말고 상투적인 성적 매력대신 힘을 가지라"는 설파를 무의식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대담하지 못하며 쉽게 상처를 받곤 하지만 어쨌든 그녀의 설파 탓일까 아니면 나의 본성의 불의를 참지 못하는 탓일까 한마디로 정면으로 "째려보기"는 나의 자화상의 특징이다. 이 "째려보기" 시선의 문제는 미술사나 사진사 등 예술사를 통해 다루어진 대로 눈높이 보다 좀 더 높은 위치에서 촬영하여 피사체와의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거리를 만들어 내는 그리기나 사진 촬영 방법에 대한 나의 의도적인 계획이다. 이는 남성화가나 사진가의 실험대상이나 시선을 외면함으로써 모델의 몸을 훑는 침 흘리는 관객의 눈에 대항하기 위함이다. 소재로 나의 몸과 얼굴을 사용했기 때문에 사실적인 것을 추구했으며 상징적으로 나는 나 자신이 스스로 나의 몸과 얼굴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나의 몸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을 탐구하는데 째려보기 시선만으로 남성의 응시를 온전히 피하고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나 자신의 나르시즘을 넘어서고 싶어한다. 그것은 Niego, SiNo라는 시각시 Niego는 「나가르준나」사상을 시각화, 나를 부정하는 것은 허무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충만한 빈 마음을 이룬다. 그리고 SiNo(기호 또는 운명의 뜻, Si(이다) No(아니다) 이지도 아니지도 않은 어느 곳에 길이 있다._Niego는 「나가르준나」사상을 시각화, 나를 부정하는 것은 허무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충만한 빈 마음을 이룬다. 그리고 SiNo(기호 또는 운명의 뜻, Si(이다) No(아니다) 이지도 아니지도 않은 어느 곳에 길이 있다. ● 가 바느질된 초상에서 특히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동양세계관에서 볼 수 있는 인간과 자연의 합일하면서 이루어지는 중용과 도의 세계와도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공허한 도시의 피폐화되고 상처 입은 신체가 가능한 범위가 어디인지는 의문이다.
2. 아라크네와 자궁_Arachne and womb ● 아라크네(Arachne 거미)는 염색물의 고장인 리다이에 사는 염색의 명인 이드몬의 딸로 베짜는 솜씨가 아주 뛰어났다. 그녀는 직물의 여신 아테나보다도 자기가 훨씬 낫다고 뽐냈고 이 소문을 들은 아테나 여신은 노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아라크네를 찾아가 신을 욕보이는 언행을 하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결국 아라크네는 아테나 여신에게 짜깁기 시합을 도전하게 된다. 아라크네는 올림포스의 12신과 신들의 벌을 받은 인간의 이야기 및 신들의 겁탈과 비행, 실패와 과오를 나타내기 위해 고의로 선택된 소재들을 내용으로 천에 수를 놓았다. 그녀의 작품은 아테나 여신조차도 흠잡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하였다. 이에 질투한 여신이 베를 갈기갈기 찢자 비탄에 빠진 아라크네는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아테나 여신은 아라크네의 자살마저 허용하지 않고 그녀를 뱃속에서 줄을 뽑아 베를 짜는 거미로 둔갑시켜 자자손손 실을 잣는 벌을 내렸다. "내게 행운을 가져오는 거미여, 저 텐트 위에 줄을 쳐다오!"_에즈라 파운드, 칸토스
여성 신체를 주제로 내가 보여주는 자화상의 반복되는 이미지들에 바느질되는 소재들은 문자 텍스트 외에 외부 생식기에 집중되기보다는 내부 기관 주로 자궁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동양의 오랜 여성에 대한 인식이 외부 생식기의 성적 이미지보다는 주로 모성 즉, 생산성 fertility에 달려 있다는 것과도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나는 구약성서 창세기 편의 자손을 전하기 위해 딸들의 아버지와의 동침 사건을 다루기도 하였다. ● 모성의 공간으로서 자궁, 크리스테바는 모성을 의미화에 적합하지 않은 것, 매력과 혐오의 핵심으로 정의하면서, 모성의 이중성을 강조한다. 모성은 생명의 부여자이자 숭배와 고통의 대상으로서 신성한 개념은 바로 이 매혹과 혐오의 혼합으로 인해 생겨난다는 것이다. 더불어 실내 공간, 집이 보여주는 가정 예찬론은 여성스러움을 관능과 모성으로 간주한다. 오늘날 여성의 활동영역은 가정에 제한되거나 이전의 남성들의 활동무대인 도시 중심가와 단절되고 여체를 연약하며 보호와 안식처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틀 하나보다는 도시 중심가의 주변부에서의 노동과 가정에서의 틀 모두가 요구되어지고 여성의 몸은 그 생산력이 예속의 관계에서 최대화가 되며, 몸이 유순해졌을 때 가장 유용하게 되고 있다.
때로 나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만나는 지점의 공간을 탐구하고자 한다. 그 중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 오는 중국 한자의 상형문자의 구조를 해석하고 이용하는 것은 나에게 아주 흥미로운 일이 되고 있다. 그것은 문화적으로 정의된 성차별과 구별, 인습적으로 여성 신체에 특징 지워지는 점들을 조사하게 한다. 매일매일 자화상을 그려 나가는 것, 글을 읽고 골라내는 일, 그러한 텍스트들을 나의 자화상에 세기는 것, 그것은 또한 나의 삶을 사는 것이며 시간을 붙잡는 방법이다. 그것은 안개가 짙게 덮인 레테의 망각의 강으로부터의 수집이다. 바느질은 무료한 일이 아니며 그것은 정신, 끊임없는 사고, 의식의 되새김이며 끝없는 이야기이다. 곧 그것은 치열한 삶이다! ● 나는 나의 초상을 그리는 동안 모순적일지 모르지만 거울 앞에서 또한 연기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보다도 자연적인 존재이고 거울은 그 뒤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체란 영혼의 적이 아니며, 신체인 영혼은 오직 그 높이에서 오르락내리락 한다. 과연 누가 내 영혼인 내 몸을 통제하겠는가, 내가 내가 아니고서 ■ 오미경
Vol.20040211a | 오미경展 / OHMIKYUNG / 吳美京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