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리

권기수展 / KWONKISOO / 權奇秀 / painting   2004_0204 ▶ 2004_0217

권기수_꽃이나다/디지털 이미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0×132cm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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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04_0204_수요일_05:00pm

갤러리 피쉬 서울 종로구 관훈동 백상빌딩 1층 Tel. +82.(0)2.730.3280

동구리, 기호의 생명을 살아가는 귀여운 마술사_제3회 권기수展에 부쳐 ● 권기수의 동구리는 작년에 너무 바삐 지냈다고 한다. 작년에는 유독 미술의 문화적 외연을 확장해 가려는 전시회가 많아서였을까. 미술과 만화의 관계를 묻고 성찰하는 전시회를 비롯하여 미술과 놀이를 결합하려는 전시회, 이야기 구조를 갖는 미술을 탐색하는 전시회 등 순수주의 이념에 기반한 모더니즘의 규범과 가치를 벗어나 문화를 말하고, 문화에 개입하고 문화를 바꾸려는 시도들과 함께 노느라 바빴다는 것이다. 동구리는 엘리트주의 미술이 지극히 좁혀버린 언어, 혹은 미술관이라는 언어의 감옥에 갇혀있던 이미지를 탈출시켰던 귀여운 '범죄자'였을까. 최소한 모더니즘의 법을 위반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게다가 동구리는 말하고, 움직이며, 뛰어놀며, 이 곳 저 곳을 누비며 '예술'의 표정을 곳곳에 삐라처럼 뿌리고 다니지 않았는가. 그는 경범죄를 저질렀을까. 그의 동그란 얼굴과 몇 포기 안되는 머리카락, 가장 간략한 선과 점으로 형성된 얼굴 표정, 그런데 그 안에 깊고 그윽한 미소가 있어 결코 농담 같지만은 않은, 결코 억압적이지 않은 진지함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이, 그래서 그의 경범죄조차도 즐겁다.

권기수_꽃/디지털 이미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2×227cm_2003
권기수_붉은분수/디지털 이미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0×132cm_2003

동구리는 사실 이제 권기수의 분신과도 같은 또 다른 생명체로 보인다. 마치 인공생명의 원리처럼 자기 생성의 법칙을 가지고 활발하게 증식해 가는 듯하다. 처음에는 고무판에서 모양을 얻어 태어나더니,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로 무수한 동족을 만들어가고, 벽화로도 그려지며, 철판구조를 빌어 대형 조각으로도 모습을 드러내고, 모바일 폰 화면 안으로 조그만 방을 얻어 살아가더니 이제는 넓직한 캔버스 위로 따뜻한 색깔을 가지고 살포시 내려앉았다. 각각의 자리에 나타날 때마다 그는 말하기 방식을 달리한다. 때로는 약호처럼 즉각적으로 말하고, 때로는 기호처럼 의미를 담아내며, 때로는 숫자처럼 단일한 형상을 말하며, 때로는 자유자재로 자기 형상을 증식시키고 겹쳐내면서 기형의 어법을 구사하기도 한다. 동구리의 얼굴이 두 개로, 세 개로 겹쳐져도 그의 얼굴은 엽기가 아니다. 그의 얼굴은 본래 하나이지만, 그의 마음에서 두 번, 세 번의 웃음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들 마음을 담아 다른 모습으로 변형할 수 있는 아바타와도 같다. 그래서 그의 생명력이란 나이에 있지 않고, 우리들 마음과 생각의 모습을 닮아있다는 데 있다.

권기수_서커스_플래쉬 애니메이션_00:00:30_2003
권기수_낙하산/디지털 이미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27×182cm_2004

동구리는 정확히 기하 형태로 만들어낸 단순한 표상이다. 가볍고 날렵하며, 유연하고 자유로우며, 투명하고 발랄한 그 모든 느낌이 바로 그 기하형태의 단순함에서 온다. 단순한 것이 가장 명확한 언어여서 그럴까. 게다가 그 단순함에서 우리는 동구리의 속 깊은 모습을 본다. 살짝 웃는 모습이, 보일 듯 말 듯한 신호를 보낸다 싶게 묘한 깊은 맛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단순한 것이 본래 깊이를 갖는 것이어서 그럴까. 또 동구리는 몸이 가볍다. 그래서 움직임에 구애받음이 없다. 그는 하늘을 신나게 날고, 공처럼 튀어 올라 날아가 버리기도 하며, 높은 곳에서도 안전하게 서있으며, 머리에서 꽃을 피우기도 한다. 몸이 가벼워 그는 자신의 단순함으로 공간을 쉽게 점한다. 공간을 새롭게 만들고, 공간 속으로 점핑도 하며, 공간 밖으로 탈출도 서슴치 않는다. 그의 단순함은 일면 평면적으로 보이지만, 이렇듯 공간을 구사하니 그 단순함의 힘이 평면과 입체를 동시에 구사하는 듯 싶다. ● 이번 전시는 지난 해 동구리가 외출하며 나누었던 모든 대화를 결산하고, 또 다른 모색을 시도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그런데 애니메이션과 설치 등 예의 권기수의 작업방식과는 달리 캔버스라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 의미를 모았다. 캔버스 작업을 통해 동구리를 그리고, 색을 입히며, 또 다른 작은 마당처럼 공간을 만들어 보인다. 동구리가 그간 보여주었던 동선과 기동성 넘치는 활약을 보면, 실제로 캔버스 작업은 상대적으로 정적인 편이다. 오히려 그의 캔버스는 뭔가 평면의 조건을 즉물적으로 드러내고, 형상을 기호처럼 부각하여 동구리의 존재를 단일한 상황에 안착하려는 듯한 느낌을 갖게된다. 그래서 얼핏보면 동구리 초상화 같기도 하다. 여전히 그는 묘한 신호를 보내는 듯한 웃음을 머금고, 강아지 앞에서 분수를 만들고, 모자를 벗으니 머리에서 꽃이 피었다는 식의 마술사 같은 얼굴이다. 마술사란 얼마나 친절하고 놀라운가. 동구리가 갖고 있는 링은 강아지를 훈련시키면서 삼각형이 되고, 사각형으로도 된다. 강아지는 마술사를 따라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권기수_매화초옥/설중방문 test버전_플래쉬 애니매이션_00:01:00_2003
권기수_점프_철, 아크릴_설치_2004

그러나 마술사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혹여 기호라는 것이 여차하면 의미의 발생은 시들해지고, 도형의 껍질만 반복적으로 남기게 되는 경우 말이다. 그래서 기하 형태의 단순함이 어느 순간 긴장감을 잃고 무의미한 데코레이션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될 그 상황 말이다. 그렇다면 동구리가 진정한 의미의 기호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는 일이 최선이다. 동구리가 나이를 먹고 늙어가고 하는 그런 식의 생명은 문제도 아니다. 바로 그것이 갖는 기호적 생명, 다시 말하면 의미가 생성되고 증폭되는 그런 과정을 유지할 경우 갖게되는 생명력이다. 그럴 때 동구리는 '예술을 즐겁게 바라보세요'라고 말하게 되며, 우리들 삶의 모든 피곤한 질문들, 그러나 피해갈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수수께끼 풀 듯 즐겁게 그 매듭을 풀어가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그 귀여운 얼굴로 우리를 깊게 바라보며 말이다. ■ 박신의

Vol.20040204b | 권기수展 / KWONKISOO / 權奇秀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