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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작가 김경선_김두섭_김수정_김재훈_민병걸_심완섭_안병학_안삼열_이관용 이기섭_이세영_임정혜_조현_최병일_최준석_한명수
후원 / 한전프라자 갤러리 협찬 / 이미지 속닥속닥_designNET
한전프라자 갤러리 KEPCO PLAZA GALLERY 서울 서초구 쑥고개길 34 (서초동 1355번지) 전력문화회관 1층 Tel. +82.2.2055.1192 www.kepco.co.kr/gallery
1994년 디자인 그룹 '진달래'가 결성되었다. 아직 80년대의 뜨거운 열기가 가시지 않은 남한사회에서 '진달래'의 출현은 다소 이른 감이 없지 않았다. 당시 남한의 시각 이미지는 새로움과 낡음 그리고 제도와 비제도의 갈등을 겪고 있었고 '진달래'의 구성원들은 그 틈에서 자유로운 사고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지금은 많이 희석되었지만 당시의 시각으로 '진달래'가 보여준 이미지들은 너무나 유치하고 생경한 것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달래'는 달아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기에 너무나 젊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한의 디자이너로서 컴퓨터의 혜택을 받은 처음 세대로서 그 혁신적인 기제가 만들어낼 시각 이미지의 무한한 가능성에 흥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진달래'는 design으로부터 출발한다. ● '진달래' 출발당시 아직 충무로에는 몇 군데 커다란 식자집이 있었으며 대부분의 기성 디자이너들은 날카로운 식자칼로 허연 대지를 따내고 있었다. 남한에 컬러티비와 컬러판 신문이 1980년대에 들어서야 가능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진달래'가 쿼드라 내지 엘씨 시리즈로 만들어낸 시각 이미지들은 다분히 도발적이었다. 물론 컴퓨터라는 기제를 사용하였다고 하여 형식의 생경함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용에서도 '진달래'는 단순한 흑백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화려한 컬러피플을 꿈꾸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이 고민했던 것은 시각 이미지의 리얼리티를 기반으로 한 무한한 소통이었다. 과거의 이데올로기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시각 이미지의 힘이 디자인 그룹 '진달래'를 디자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진달래'는 화가도 도안사도 아닌 시각 이미지 생산자로서 디자이너라는 꾀 만만치 않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 아무리 '진달래'의 개별 회원들이 시각 이미지 생산자의 몫을 담당하더라도 '진달래'의 뿌리는 디자이너 그룹이다. 그것도 남한에서 컴퓨터의 혜택을 받은 첫 세대의 디자이너들의 모임인 것이다. 언제나 처음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그저 막막하였던 것이 새롭다는 이유로 주목받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희석되면서 흩어져버린다. 마치 언젠가 우리의 주머니 속을 차지했던 삐삐 호출기, 그리고 조금 지나서 문자전송기, 이도 얼마가지 않고 시티폰, 그래도 비교적 오래갈 것처럼 보이는 핸드폰, 아직은 좀 어설퍼 보이는 PDA... 이렇듯 현실기제들의 발전처럼 디자인 기제들의 발전은 한해를 짧다하며 발전해 왔다. 여기서 디자인 그룹 '진달래'의 기제들에 대한 함정이 있다. 다행이 한동안 남한에서는 기제들의 발전과 더불어 거의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디자인 역량은 성장해 왔다. 이는 각 디자이너들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수용자 또는 현실조건의 발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 그래서 '진달래' 초기 멤버들은 대지와 컴퓨터 작업을 병행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들이었는데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일러스트레이터, 영상감독, 만화가, 웹디자이너, 넷아티스트 등으로 변신하였다. 물론 이들은 어느 장르에서 자신의 활동반경을 구축하더라도 최신 버전 컴퓨터의 힘을 빌리곤 했다. 현실 시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기제들과의 견줌 또한 디자인 그룹 '진달래'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던 까닭이다. ● 점점 구성원들의 관심분야가 차이를 보이면서 디자인 그룹 '진달래'는 한번의 해체를 경험한다. 아마도 '진달래' 해체기였던 1996년에서 2000년에 이르는 시기가 현장 각 분야에서 디자인 그룹 '진달래' 멤버들의 활약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달래'는 해체되었지만 각 개별 멤버들의 시각 이미지 생산은 무척이나 경이로운 것이었다. 심지어 몇 안 되는 디자이너들의 역량이라고 보기 힘든 세대감각 또는 시대감각마저 넘나드는 시각 이미지들을 생산하였던 까닭이다. 물론 이들이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닌 디자인이다. 그러나 그 결과물들은 예술 어느 분야의 성과보다 더 커다란 것이었다.
'진달래'는 보다 강력한 post를 원한다. ● 2000년 다시 디자인 그룹 '진달래'가 모였다. 그리고 이들의 발언 매체로 포스터를 선택하였다. 어찌되었거나 무목적으로 만들어지는 순수예술에 비해 디자인 그룹 '진달래'는 제작/소비과정에서 명확한 컨셉을 설정하곤 하였다. 특히 보여지는 것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디자인 그룹 '진달래'는 그들만의 독특한 전시방법을 만들어 왔다. 처음에는 개인 또는 공동으로 제작한 시각 이미지들을 갤러리에 전시하다가 디자인 그룹으로 포스터에 집중하였던 것이다. ● 이제 '진달래'는 스스로 클라이언트가 되어 포스터를 제작한다. 일단 만들어진 포스터들은 일상의 공간에 무작위로 붙여지거나 우편으로 발송되어 많은 사람들의 시지각을 자극하게 된다. 굳이 자신들의 생산물들을 무성격의 전시공간에 가두어 놓을 이유가 없었던 까닭이다. ● 물론 '진달래'의 각자 성원들은 서로의 작업에 대해 내용과 형식의 규제를 두고 있지 않다. 다만 공동으로 활동할 때만 디자인 그룹 '진달래'로서 포스터라는 하나의 매체에 서로의 힘을 모은다. 인쇄로 제작되기에 복수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우편으로 발송되는 '진달래'의 포스터 작업은 굳이 벽에 붙여지지 않더라도 그 크기와 이미지에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매우 강력한 시각적 소비를 일으키게 만든다. 시각 언어의 집약태로서 과거에는 적극적인 알림 또는 계몽의 기능을 담당했던 포스터가 영상매체 시대에 디자인 그룹 '진달래'에 의해 다시 그 효용성의 범위를 검증 받고 있는 것이다. ● '진달래'가 만드는 포스터라는 매체가 지니는 힘은 사뭇 다르다. 여태껏 남한에서 제작된 포스터의 대부분은 상업용이거나 정치선전용일 것이다. 그것도 내용만큼이나 천편일률적으로 유사한 형식을 지니는 포스터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을 담당하는 디자이너의 역량에 의한 것도 있겠지만 더 크게는 클라이언트의 욕심을 빗겨갈 수 없었던 까닭이다. 당연히 '진달래'는 자신 스스로 클라이언트가 되려는 꿈을 꾸어왔다. 이제 '진달래'는 주문에 의한 피동적인 가공자가 아니라 스스로 발신과 매개의 몫을 걸머진 생산자가 되려 한다. 그래서 좀더 적극적이고 효율적인 시각매체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
'진달래'는 xxx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 '뼈' '집단정신' '대한민국' '도시와 영상' '저공비행' '호호'. 그동안 디자인 그룹 '진달래'가 참여/제작했던 전시 또는 포스터의 키워드들이다. '진달래'는 디자인 그룹으로서 어떤 정신을 꿈꾸고 있다. '진달래'에 의하면 '끌려가며 버티는 생활 속에서 디자인의 본원적 문제의식이나 창조정신은 사치로 취급되고 적당한 안일함이 늘 곁을 서성인다'고 한다. 너무나 분주하게 디자인 일만 하다보니 정작 가장 중요한 디자인에 대한 생각들을 빼놓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되돌아 볼 여유가 필요하다. 일에 쫓기다보면 꽉 짜여진 그리드에서 몇 미리도 벗어나지 못하는 상상력과 제작단가를 셈하는 계산기로 디자이너의 삶을 버티게 된다. '진달래'는 삶에 찌든 경직된 디자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 뭔가 다른 생각 그리고 그 생각들이 만들어낼 다른 시각 이미지들을 '진달래'는 xxx라 칭한다. xxx는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주워진 여건에서 빠져 나와 처음부터 다시 따져보면 자연스럽게 xxx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xxx를 사치다 외설이다 하며 위험의 눈초리로 볼 것이다. 물론 '진달래' 또한 아직 확연한 xxx가 아니다. 단지 xxx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몇몇 xxx가 허용되고 있을 뿐이다. ■ 최금수
Vol.20040104a | 發-디자인 그룹 '진달래'의 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