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1월 오진령 사진집 『곡마단 사람들』이 호미출판사에서 발행될 예정입니다.
초대일시_2003_1217_수요일_05:00pm
갤러리 룩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 Tel. 02_720_8488
스스로가 택한 광대라는 이름의 인생. / 1998년 써커스 그곳에서, 나는 동갑내기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 눈을 감고 생각해본다. / '이 세상 누구나 광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제각기 다른 광대역을 맡은 써커스의 어릿광대일 뿐이리라.'(오진령) ● 오진령의 서커스 사진을 본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그래서 기억이 가물한 한수산의 「부초」란 소설을 떠올렸다. 내게 부초란 소설은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과 함께 70년대의 가장 어둡고 슬프고 가슴아픈 소설로 다가온다. 해서 다시 「부초」를 읽었다. 다 읽고 난 후 잊어버렸던 애잔한 마음들이 키를 다툰다. 그리고 다시 오진령의 사진을 꺼내본다. 「부초」에는 일월곡예단이 나온다. 이를 동춘서커스단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긴 코로 하모니카를 불며 물구나무 서기로 관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동춘의 마스코트'제니'가 81년 겨울 영하21도의 혹한을 견디지 못하고 새벽에 죽었는데 그 시신을 박제 삼아 천막 옆에 매달려있는 모습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텅 빈 눈, 테이프로 대충 감은 코, 그 앞에서 손가락이 입에 가득 들어가 만큼 집어넣고 프링글스를 먹고 있는 여자아이는 이 코끼리의 죽음, 또 그 코끼리의 죽음이 상징하는 이 서커스단의 신산한 삶의 이력을 알지 못한다. 오진령의 사진은 일련의 시간적 배열에 기초한다. 우선 특정한 장소에 둥지를 틀고 그곳에 천막을 치고 기둥을 올리고 무대를 만들며 이후 간판과 매표소 등을 차리는 일들이 순서적으로 찍혀있다. 이 사진첩은 우리로 하여금 함께 서커스의 시작과 끝, 안과 밖을 함께 바라보게 한다. 시각적 여로를 부추킨다. 그 장면들을 보다 보면 '부초'에 나오는 인상깊은 말들이 몇 토막씩 진눈깨비 마냥 날린다. ● "그래도..우리야 직접 몸으로 하는 거 아닙니까. 그까짓 테레비 기껏해야 사진이죠. 그림자지 별겁니까. 진짜배기로 치자면 우리가 윗길이죠. 암요. 세상에 자꾸 진짜가 없어지니까....언젠가는 도리어 우리가 빛볼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 "천막 치고 무대 짓고 재주피며 사는 게 우리들만은 아니란 걸 이제 나는 안다. 저 하늘이 천막이고 이 바닥이 무대지. 저마다 목숨껏 재주 한번 피우고 떠나는게 그게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이었던 거야." ● "고속도로, 수출공단, 빌딩...그런 것만이 이 시대의 얼굴은 아닐세. 농촌이 차츰 근대화되면서 토속적인 의미의 땅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있어."
한 달만에 새로운 장소와 날짜로 바뀌는 서커스의 간판을 그리는 작업, 우뚝우뚝 솟아 있는 기둥들, 늘어진 안전 그물, 가로지르는 쇠줄 등이 있는 풍경(둥지를 트는 풍경)이다. 이제 한 곳에서 서커스를 시작하려는 순서가 그렇게 새겨있다. 단원들이 스스로 천막을 세우는 장면인데 그런면에서 서커스 단원들은 훌륭한 토목공사인부들이고 기술자들이다. 얼마의 시간 후 비로소 도시의 어느 빈 공터에 천막이 세워졌다. 공중에서 내려다 본 장면도 있다. ● 오진령은 서커스단원들의 삶의 이모저모를 시간이 흐름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무대가 아닌 무대 주변, 무대에서 배제되고 지워진 타자화 된 영역에 대한 임상보고서에 해당한다. 그것은 서커스를 구경하러 온 이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영역이자 공간이다. ● 오진령은 「부초」란 소설을 의식하고 찍었을까? 그녀는 "곡예사들이 별종이 아닌 특별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촬영하려고 했다"고 한다. 직접 그들의 삶의 공간으로 뛰어들어가 함께 하며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그 궤적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고 싶어한다. 사진들은 단지 창백하고 즉물적인 자료에 머물러있지 않다. 아마도 일정한 거리를 갖고자 했겠지만 오진령은 서커스단원들의 생애를 담은 이 흑백사진에는 어쩔 수 없는 감정들이 물처럼 스며들어있다. 곡예사 서정윤, 추연정 부부, 김장준비를 함께 하는 서커스가족, (나무 등걸에 기대고 서있는) 곡예사 연희양, 단짝 친구인 공주양과 꽃님, 서커스의 점심시간, 분주한 점심시간 후의 식당풍경 같은 사진들은 내겐 슬픈 사진이다.
더 없는 적막과 고독, 남루한 일생의 고단함과 스산함이 끈적하게 묻어 나오기도 하고 그렇게 저마다 열심히 생을 살아가는 모습이 저으기 감동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꾸만 그 아래에는 정체 모를 비애가 서식한다. '천막 안에서 장가들고 천막 안에서 애 낳고, 천막 안에서 죽어라'고 하지만 그렇기에는 현실은 그저 몰락해 가는 연희인의 비애만을 남길 뿐이다. ● 고무 코를 붙이고 두 볼에 빨간 점을 찍고 인생이 애환을 몸으로 그리는 서커스의 어릿광대,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목숨을 거는 이들, 살아 남기 위해, 먹고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극한으로 다스리는 이들의 육체는 단지 볼거리나 신기한 구경거리에 머물 수는 없다.
이 사진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어떤 일이 벌어지는 분위기의 발산 속에 위치해 있다. 사건이 활력이 감지된다. 그들은 줄을 타거나 분장을 하거나 혹은 공들여 기구를 만지고 수시로 연습을 한다. 그리고 우리와 또 같이 밥을 먹고(빈한한 식탁이지만)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고 살며 소박한 행복을 기원한다. 그리고 시골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저씨와 아주머니, 아이들의 눈앞에서 최선을 다해 연기를 한다. 작가는 그들에게 우호감과 친밀감을 통한 교감으로 참여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사진은 피사체에 대한 차분하고 진지한 접근을 보여준다. 소박한 프레밍이 긴장감을 누그려뜨리는 부분도 있지만 과정도, 격함도 없이 그저 서커스단의 일상과 삶을 자연스럽게 잡아나가고 있다. 따라서 이 사진을 보고 읽는 데는 특별한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 ● 오진령의 서커스 사진은 현재 서커스단이 처한 운명과 삶의 초상을 차분하게 들여다보게 해주는 일종의 보고서 같다. 그렇게 그녀는 공들여 그들의 생활을 찍었고 우리는 이들을 어떠한 편견없이 보아주어야 할 것이다. ■ 박영택
Vol.20031219c | 오진령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