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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1216_화요일_05:00pm
참여작가_박진하_손성진_심혜정_염중호_임선이_전상옥_전신덕
주최_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단 아트센터 제1전시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1116-1번지 Tel. 031_231_7200
욕망의 유토피아-낯선 천국 ● 경기문화재단에서 마련한 이번 '욕망의 유토피아'전은 동시대 삶의 환경과 문화 그리고 욕망과 이미지의 관계를 새삼 생각해보게 하는 기획전으로 보인다. 나로서는 다만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그 주제를 가만 유추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삶의 환경과 문화는 자본과 욕망에 늘상 겨냥되어있어서 흡사 거대한 구멍, 늪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미술(예술)은 시대의 바로미터나 리트머스 시험지 같아서 그 사회의 병적 징후에 가장 민감하다. 동시에 그 반작용으로서의 불안과 회의 또한 짙은 그늘을 우선적으로 남기는 분야다. 작가란 존재는 늘 이런 식의 삶에 대해 불평, 불만이 많아서 늘상 지껄이는 자들이다. 침묵하지 않는 나름의 미덕을 지닌 존재다.
90년대 들어와 우리 미술에서는 육체를 둘러싼 논의, 아울러 성과 욕망, 고도 소비산업사회의 여러 징후들에 대한 발언이 활발해졌다. 특히나 육체의 아름다움과 관능을 극대화하려는 등의 여러 욕망의 집결이 우리시대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화장, 패션, 피부관리와 성형에 대한 과도한 관심, 그리고 주거공간과 환경을 적극 지배하고 관리하는 인테리어와 디스플레이를 통한 시각적인 것, 감각적인 것이 가장 우선되고 있음도 흥미롭다. 그러니까 동시대 우리 문화가 가장 감각적이고 말초적이고 시각적인 것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우리는 시각적 소비에 탐닉하고 있는 이미지중독자로서 이미지세계, 오직 이미지만이 중요해진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보는 것'으로 존재하는 세상 말이다. 그것은 오로지 눈으로만 보고 이해하고 따라가는 전적으로 눈에 의존되는 문화에 다름 아니다. 이 속에서 미적 가공의 형태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면서 육체를 매개로 하는 소비욕구의 다양한 분화가 이루어지고 편인데 이러한 자신의 몸에서 미적 욕망을 느끼고 그 미적 가치를 가꾸고 변형하고 유지하고 싶다는 욕망은 미술품 향수, 감상과는 조금 다른 문화적 욕망을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단순히 아름다움에의 욕망뿐만이 아니고 한 개인의 삶의 방식을 조절하고 관리하는 체계의 변질로서 이해된다.
근대를 지탱한 사유, 그러니까 인간이란 존재를 주체가 지닌 이성, 정신이니 하는 가치의 측정으로 파악하려는 것은 이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되었고 인간이란 무엇보다도 부정할 수 없는 육체, 몸, 더 나아가 성기에 불과하다는 그 동물성의 확인에서 오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지배적인 것이 되었음도 우울하게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이상화된 육체(소비문화 속에서 표준화된 모델의 몸)에 대한 숭배와 물신적 경배가 하나의 강박적 종교로 굳어진 것을 만난다. 그것은 끊임없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모델들의 육체의 의해 강요되고 있고 그래서 오늘날 모든 미의 표준, 규범은 이들의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 아울러 우리를 둘러싼 모든 공간, 자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미지들이 그렇다.
오늘날 모든 이들은 타고난 미의 전도사들이고 미의 실행자들이다. 화장과 패션, 몸 관리와 아늑하고 뛰어난 장식성을 지닌 카페를 드나들며 팬시하고 '이쁘장한' 물건들을 병적으로 수집하고 두르는 이런 페티시즘/물신주의는 오늘날 다른 어떤 것보다도 삶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되었다. 사실 이 페티시즘은 가장 고대적이고 우주적인 숭배의 한 형태다. 요술, 기교를 뜻하는 이 단어는 일종의 수음에 해당한다. ● 온갖 매력적인 것들로 넘쳐나는 이 쾌락의 시대에 미술은 더 이상 아름다움을 구가하지 못한다. 미술은 그 쾌락과 감각, 육체의 문화가 주를 이루는 시대에 어떠한 힘도 기능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납작하고 정적인 사각의 화면은 비디오나 영화스크린, 멀티미디어의 화려한 주사선으로 대체되고 색상은 인조와 인공의 칼라에 잦아들며 활력없는 평면의 인물상 대신에 광고에 등장하는 팔팔하고 육감적이고 관능적인 육체가 대신한다. 부동의 죽은 화면 대신에 현란한 비디오화면과 영상이미지들이 파동치고 즉각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오늘날 누가 이 부동과 침묵과 적조한 화면 앞에 오래 서있을 것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의 사이버 망망대해를 누비는 동안, 아니면 M티브이나 광고, 패션잡지나 영화와 비디오를 보는 시간에 미술관과 화랑은 적막과 고요 속에 가라앉는다. 오늘날 '미술'이 시각이미지의 대표거나 아름다운 것의 대명사라고 생각하는 이도 별반 없을 것이다.
시각이미지가 우리사회에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 앞으로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도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이는 인류역사에서 이미지/회화의 등장 이래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치명적으로 겪게 되는 중대한 위기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해서 이즈음 새삼 이미지/회화에 대해 생각해 본다. 미술이 우리들의 삶에서 아름다움과 정서적 안정, 심미적 욕구를 은연중 충족시켜왔던 역사는 진작에 사라진지 오래다. 우리들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뭐라고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 는 없지만 대략 이런 식으로 말해볼 수 는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예술이 인간의 감정이나 지각을 통해 인식되는 세계의 모습에 대한 인간의 반성을 감각적으로 혹은 형상적으로 드러내는 일에 관계된다는 것으로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인간활동의 특수한 영역이고 자기 목적적인 활동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인간의 감정의 문제이고 이는 그 한 개인의 삶에서 파생되는 여러 감정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셈이다. 그의 감수성, 기질, 정서와 가치가 스스로의 삶을 살아내면서 읽혀진, 읽어낸 것들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는 것, 그것이 바로 그 작품일 수 있다는 얘기이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한결같이 도시문화, 소비문화 속의 현대인의 삶에 대한 일정한 비판적 거리 두기를 시도하고 있어 보인다. 무한한 욕망의 창출로 순화되는 도시공간과 그 공간 속의 인간군상에 대한 심리적 상처, 회의와 불안심리가 안개처럼 깔려있다. 기계부품이나 마네킹, 붙박이 인형, 획일화된 상품이미지에 불과한 인간군상들의 틀에 박힌 삶(전신덕), 다소 처연한 일상 아래 반복되고 닳아지는 상처들이 문신처럼 새겨진 몸(손성진), 유명 광고사진의 섹시하고 관능적인, 그러나 박제화 된 인간모델들의 사진을 참조로 해서 이를 커다란 화면에 옮겨 그려 놓고 그 물신주의, 페티시즘의 우상화를 기념비화 하는 그림(전상옥), 시멘트로 이루어진 도시 공간을 모태로 서식하는, 화석화되고 불임으로 시들어버린 식물들로 이루어진 초현실적인 풍경(임선이), 상점과 간판, 패스트푸드점과 유명 브랜드 점포 공간에 불현듯, 우연히 마주한 포르노 그래피, 그 욕망과 자본의 절묘한 상봉(심혜정), 질식할 것 같은 간판의 홍수, 메가폴리스 서울이란 공간, 혹은 대한민국 모든 소비도시들의 간판이 자아내는 그 욕망의 황홀경에 대한 보고서(염중호), 복제인간 문제를 디지털출력을 통한 설치작업을 통해 선보이면서 동시대과학기술의 힘과 역할에 대한 의문과 함께 인간 존재를 새삼 사유케 하는 한편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의 관계를 물어보는 작업(박진하) 등이 참여한 이번 전시는 오늘날 우리 시대를 '욕망의 유토피아'로 보는 공통된 관점이 내재해있다. 사실 유토피아란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뜻이다. 그것은 일종의 신기루, 환영에 불과한 가짜 낙원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욕망의 공간은 덧없는 환락이 먼지처럼 날리는 곳이다. 이 지옥 같은 가짜낙원에 속지 않고 그곳이 너무도 낯선 '유토피아'임을 작업을 통해 발언하고 있는 이 젊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풍경이 낯설면서도 친근하고 친근한 만큼 또한 기이하다는 생각이다. ■ 박영택
Vol.20031215b | 욕망의 유토피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