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19990831a | 최민화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03_1210_수요일_05:00pm
대안공간 풀_이전 ALTERNATIVE SPACE POOL_Moved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21번지 B1 Tel. +82.(0)2.735.4805 www.altpool.org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기 ● '한 이미지는 또 다른 이미지를 가리고 감출 수 있다' (르네 마그리트) ● 꿈을 이야기할 수는 있어도 꿈을 그릴 수는 없다. 꿈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꿈을 해석 즉 말로 바꾸어 우회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지 꿈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림을 통해서 꿈을 보여 줄 수도 없다. 꿈의 소재는 그림의 소재와 다르기 때문이다. ● 21세기에 살면서 까마득한 상고사(上古史)의 이야기를 형상으로 그리는 것이 가능한가. 과연 어떻게 그려야 할 것인가. 한번도 보지 못한 것을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이미 그 시대의 가시적 흔적이 거의 다 사라져 버리고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해보았자 무덤 속의 벽화나 부장품 등 고고학적 유물에서 그 편린을 겨우 찾아 볼 수 있는 상고시대의 설화(說話),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화를 '그럴듯하게' 그리는 일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참고할 시각적 원형(原型)이 없기 때문에 '그렇듯함'의 기준도 없다. 사실상 원형이라는 생각 자체가 터무니없는 것이다. 모든 신화는 잘 알지 못하는 근원에 대한 신화이고 따라서 최초의 형태 즉 원형이라는 관념을 중심으로 생성된다. 그러나 근원 또는 원형이라는 것 자체가 비판적인 의미에서 또 하나의 신화, 즉 상상에 의해 가공적으로 구축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숙명적으로 순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이미지 또는 형상이라는 관념에도 원형이라는 관념이 유령처럼 뒤따라붙는다. 그림자의 모습. 거울 속에 비친 상(像) 등등의 일상적 경험 탓일지 모른다. 특히 서양말의 '이미지(image)'는 어떤 원형 또는 모델이 있을 것이라는 미신적 사고와 은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즉 이미지라는 단어는'그 무엇'의 이미지 즉 파생적인, 이차적인 형상이라는 의미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실체', '원형' 또는 본래의 진짜배기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사람들을 계속 유혹한다. 원형이라는 관념을 떠난 이미지 그 자체의 영역에 있어서도 최초의 원형이란 없다.'있는 것이라고는 그 이전에 그려진 이미지의 역사뿐이다. 이미지는 단지 일정한 관습을 형성하면서 변화할 뿐 맨 처음의 '오리지날(original)' 이미지라는 것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기원의 신화에 얽매여 어떤 원초적 이미지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원형도 없고 원초적 이미지도 없다. 다만 이미지 제작의 관습적 전통만이 있을 뿐이다. 소위 성상(icon) 즉 종교적 도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원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제 모든 것은 화가의 자의적 상상에 달려 있다. 상상의 자유, 아니 자유의 상상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신화를 그리는 일은 상상하는 즐거움, 경우에 따라 그 즐거움을 집단적으로 공유하려는 희망 이외에는 동기가 없고 그 외의 대가를 바라지 않는 그야말로 무상적(無償的) 행위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고대 설화를 그리는 일은 어떠한가.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최민화의 이번 전시회는 각 작품마다 독특한 제목이 붙어 있다. 작품의 주제 즉 그림에 담겨진 이야기의 출처를 알려주는 것들이다. "웅녀", "해모수, 유화를 만나다", "공무도하가 I, II", "조선진 I, II, III. IV", "서동요", "타사암", "식적", "에밀레", "동동", "회소", "정읍사", "구지가", "금척 I, II, III, IV, V" 등등. 이 제목들이 말해주는 고대의 역사적 텍스트에서 나온 설화들은 역사적 사실유무와 관계없이 우리 민족의 신화를 구성하는 것들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신화나 고대 중국, 인도의 신화를 그리는 것과 한국의 고대 설화를 그리는 것은 분명 어딘가 다른 차원의 일처럼 생각된다.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어릴 때부터 주입 받은 민족주의적 교육의 기억과 관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비록 역사시대라고 할지라도 그 윤곽이 분명하지 않은 시대, 단편적 자료나 기록 밖에 남지 않아서 추측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시대의 경우는 역사와 신화가 구분되지 않는다. 국수주의적 발상의 과장과 억지도 가능하고, 허무맹랑한 가짜 신화가 진짜 역사로 둔갑할 수도 있다. 여기서 신화냐 역사냐 하는 것은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다. ● 작가가 형상화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적 고증 따위는 문제되지 않는다. 그 존재를 암시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보여줄 수 없는 것이 신화의 세계다. 따라서 동서고금의 모든 신화가 의인화(擬人化)를 거의 인류학적 공식처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의 모습, 그 자세와 동작, 그 표정처럼 인류가 보편적으로 잘 알고 있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가 그리고자하는 고대의 설화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현대의 복제이미지로 된 인간형상을 변용시켜 고대의 신화적 장면을 그리려 한다. 브로마이드의 인간 이미지와 아직 구체적으로 형태를 갖춘 것은 아니지만 그가 상상하는 고대의 인간 이미지 사이의 동떨어짐과 간극이 오히려 회화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모델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을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철저하게 상상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상상적 비약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미 인쇄되어 주어진 기성의 복제 이미지다. 원형이나 모델이 아니라 반(反)모델, 반(反)원형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형상을 고안해 내는 데 있어서 제약이나 구속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가이드라인이며 동시에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밑그림으로 기능한다.
가상적인 원형을 찾아서 나섰건 아니건 작가의 조형적 탐구는 일종의 즉흥적 리모델링 작업에 비유될 수 있다. 작가는 자신에게 주어진(또는 그 스스로 부과한) 브로마이드 이미지를 응시하며 그의 상상이 지향하는 방향을 거스르는 것,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즉 지워서 없애버린다. 그런 다음 필요한 부분만 남겨 주제에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개조한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애초의 주어진 형상 전체 중 극히 일부분 밖에 남지 않을 경우도 있다, 그나마 그것도 크게 개조, 변형되어 원래의 모습을 짐작하기 힘들 정도에 이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브로마이드의 원래 이미지는 이러한 작업을 시작하기 위한 핑계나 빌미에 불과한 것인가. 단지 상상의 단초를 마련하기 위한 발판인가. 꿈을 꾸는 주체는 외부 대상이나 자극을 꿈의 소재로 변화시켜 활용한다. 비슷한 이유에서 화가의 상상력은 이미 주어진 형상에 대면하여 이를 소재로 활용한다. 주어진 현실의 어떤 요소나 양상을 변용시키는 힘이 바로 상상력의 핵심이다. 일찍이 막스 에른스트나 앙드레 마쏭 등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시도했던 회화적 자동기술이나 자유연상도 이와 비슷한 것이었다. 덧그린다는 것은 원래 있던 것을 부분적으로 말소하는 행위다. 기존의 이미지를 일부 지우고 다른 것을 덧그리는 그 과정 자체가 일종의 꼴라쥬다. ● 작가는 한반도 상고시대(上古時代)의 신화를 그리기 위해 그 바탕으로 각종 브로마이드 및 비슷한 크기로 확대 복사한 쿠델카(Koudelka), 살가도(Salgado) 등 유명 서구 사진가들의 사진을 선택했다. 그 둘 사이의 충돌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 제 삼의 것을 느끼고 발견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그저 색깔과 형태가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가. 경우마다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인 해답은 있을 수 없지만 그 선택 자체가 의미심장한 제스쳐라고 판단된다. 소위 브로마이드라는 싸구려 복제도판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흘러 넘쳐나고 있는 광고 이미지들 가운데 하나다. 대량으로 복제 인쇄 배포 소비되는 광고 이미지는 롤랑 바르트가 말한 바 '현대의 신화' 즉 자본주의 대중소비사회의 꿈과 이데올로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표상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그 위에 서양 근대미술사의 가장 애호 받는 매체인 유화(oil painting)로 한국 고대의 신화를 그린다는 행위는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여기에는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의 신화, 유화, 사진, 다량복제인쇄 등 상이한 매체들 간의 혼합과 충돌이 있다. 이미 우리의 형상적 사고와 상상은 다양한 방식의 이종교배(異種交配)가 원칙으로 되어버린 혼성적 문화의 지배를 받고 있다. 최민화는 이를 기정사실, 오늘의 화가에게 주어진 현실적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작업을 한다. 현대의 서구적 복제이미지에서 거슬러 올라가 고대의 한국적 이미지를 발굴해내는 것, 또는 상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과연 얼마만큼 가능한 일인지 그는 시험하고 있다.
물론 이야기는 이미지와 존재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고대의 역사나 설화가 그대로 시각적으로 번역될 수 없다. 영화나 만화가 아닌 그림이기 때문에 이야기 줄거리를 따라 옮겨놓으려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비효과적이다. 이 점에서 레씽이 '라오콘'에서 말한 시간적 예술과 공간적 예술의 낡은 구분이 여전히 유효하다. 작가는 그가 그리고자 한 이야기의 줄거리에서 핵심적이거나 전체의 정서를 압축해서 보여 줄 수 있는 한 장면을 선택한다. 다시 말해 끊임없이 지우고 덧칠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낸 그의 그림들은 모두 고대 설화의 한 부분을 취한 것이다. 설화에서 주제를 택한 그림 이미지와 그 배경이 되는 설화 텍스트 사이의 이와 같은 관계는 부분과 전체 사이의 관계, 즉 부분을 통해 전체를 말하는 일종의 제유(提喩)다. 모든 제유는 생략 위에 기초한다. 언어적 텍스트가 이야기 전체를 말해주는데 비해 그림은 그 중 한 대목만 단일한 장면으로 보여줌으로써 보여지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통해 이미 알려진 나머지 대목들은 마치 시각적으로 생략된 것처럼 느끼게 된다. 따라서 단지 보여진 부분만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지 않고 생략된 부분 역시 우리의 상상적 관심사가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후자가 중요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보여진 것은 보여지지 않은 더 커다란 부분을 상상하기 위한 실마리로서 기능할 수도 있다. 성공적인 서사적(敍事的) 회화에서 우리는 이미지와 이야기 즉 형상과 서사의 이와 같은 절묘한 만남을 볼 수 있다. 삽화(揷畵)와 도해(圖解)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닌 소위 '일러스트레이션'에서는 이런 효과를 구경하기 힘들다. 그리고 대부분의 서사적 회화는 일러스트레이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80년대 서구 인문학계의 발터 벤야민 신드롬 이후 소위 '아우라(aura)'라는 것이 매우 신비스런 개념으로 자주 논의되어 왔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벤야민이 이 말을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상관없이, 나는 '이야기'의 배경에서 독립된 이미지가 원래 '이야기'와의 맺는 제유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특별한 효과를 가리키는 뜻으로 '아우라'라는 단어를 쓰고 싶다. 이때 '이야기'는 흔히 '역사', '문화', '전통', '시대정신' 등의 범주에 속하는 이야기들이다. 신화, 전설, 민담 등 설화는 그중 아주 중요한 품목이다. 즉 아우라는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부분, 가시적 영역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를 내세움으로써 보이지 않게 된 부분, 즉 은폐되었거나 생략되었다고 생각되는 비가시적인 영역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에 있어서 아우라의 유무(有無)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지각과 상상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에 달린 일이다. 나는 최민화의 이번 작품들에서 고유하게 느껴지는 정채(精彩), 즉 아우라의 정체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브로마이드 영화 포스터, 상품광고 포스터, 거칠게 확대복사한 현대사진작가들의 사진들이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고대설화 속의 상상적 장면으로 변환된다. 이 이미지의 변용(變容) 과정들이 흥미롭다, 작가는 이를 숨기려 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마치 그가 정작 보여 주려한 것이 이러한 변용의 움직임이었다는 듯이. 지워버림으로써, 기왕에 존재했던 무엇을 없애버림으로써 드러나는 새로운 틈새, 예기치 않았던 공백, 그것은 절대적 자유의 공간이다. 이 자유는 공포와 닿아 있다. 상상력은 이 자유와 대결하여 이를 전유(專有)하고자 시도하면서 스스로 독특한 형태를 갖추고 변화한다. 그것을 우리는 창조라고 부른다. ● 이번 최민화의 경우 이렇게 지우고 덧그리는 행위가 처음부터 끝까지 회화적이다. 이 '회화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는 '이미지'의 힘을 믿고 동시에 '회화'의 미덕을 믿는 작가다. ■ 최민
Vol.20031211a | 최민화展 / CHOIMINHWA / 崔民花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