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3_1209_화요일_05:00pm
목금토갤러리 서울 종로구 동숭동 1-75번지 대학로 문화공간 3.4층 Tel. 02_764_0700
풀잎에 그려진 자연과 대화 ● 김호순의 근작 『초율(草律)』은 풀잎에 그려진 소박한 이야기들로 자연의 소리를 담고 있다. 그의 주제는 자연의 웅장함이 아니라 '자연의 있음'을 확인하려는 근원적 물음이며, 이름 모를 작은 들꽃과 풀잎을 통해 생명감을 담아내려 한다. 화면에 가득 찬 풀잎들은 생동감을 보여준다. 동적인 구성으로 개개의 풀잎들은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살아있는 자연의 소리를 담아내는 조화를 갖는다. ● 작가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보다 형상을 단순화시키고, 전체보다는 부분을 강조하면서 '자연의 있음'을 확인을 하고자 한다. 『초율』은 초기 작품과 달리 풀잎처럼 자연의 작은 부분이 반 추상적 형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는 내면의 소리를 강조하는 것으로 풀 향기와 바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의 탐구이다. 풀잎이 단순하게 그려지고 풀잎 화면 전체가 풀잎으로 가득 채우는 구성은 자연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최소의 형태이며, 마치 넓은 대지의 표면을 모두 담고자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풀잎 하나에 그려진 섬세한 묘사가 사물의 숨결처럼 우리로 하영금 숨겨진 자연의 신비를 응시하게 만든다. 작가는 근작 『초율』을 통한 자연과 대화로 무한과 영원성을 노래하고 있다.
20세기 이후 현대회화에서 자연 탐구는 모방과 재현에서 벗어나 형태를 파괴하면서 시작된다. 특히 대상과 사실적 형상을 무시하였던 오늘날 화가들은 자신의 내면을 통한 자연을 그리고자 한다. 이것이 곧 대상에서 벗어나는 비대상화, 비형상화로 양식화되고, 형태 파괴로 인한 추상화는 관객을 혼란스럽게도 하였으나 사물을 보는 고정된 시각에서 탈피하게 만든다. ● 오래 전부터 자연을 소재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었던 김호순의 경우도 내면을 통한 자연탐구 작업이다. 그는 먼저 자연과 대화를 생각하면서 자기만의 모티브를 찾아 나선다. 산과 들, 야생화와 풀잎 등 지극히 평범한 자연을 대상으로 찾아다니면서, 그는 이름 모를 대상들로 꾸며진 풍경 속에서 '자연의 있음'과 '생명감'을 담고자 한다. 여기서 작가는 자연 속에 묻혀 살면서 자연과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자연을 그리고자 모색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풍경을 넘어서』와 『모뉴먼트』 연작이나 2000년대부터 제작된 『소욕산방(小慾山房)』 연작 등은 대상과 비대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풍경화이다. 산과 강, 나무와 풀잎이 그려지고 있으나, 이는 자연의 '있음'을 확인하는 작업이며' 하나의 심상풍경으로 마음속에 비쳐지는 자연의 내적 모습이다. 작가의 자연에 대한 관심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대상을 재현하거나 사실적 모방에는 관심이 없다. 무엇보다 그는 자연의 분위기와 단편적 부분들인 작은 풀잎을 통한 자연의 존재확인에 노력한다. ● 『초율』의 조형적 특성은 콜라주와 뿌리기 기법을 통한 대상의 단순화이다. 콜라주의 뿌리기 기법은 형태를 공간 속에 정착시키면서 시간성을 부여한다. 영원히 움직일 수 없는 고착된 형태는 죽은 듯 정적인 외양이다. 그러나 이는 죽음이 아닌 생명의 표현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색채는 가을과 겨울의 대지를 나타내며, 봄을 준비하고 있다. 이를 확인해 주는 것은 풀잎의 파장이다. 정적인 공간에서 풀잎의 속도감은 생명의 삭처럼 보이지 않으나 살아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밝은 무채색과 갈색의 모노크롬은 콜라주와 뿌리기 기법을 통해 내면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초율』 연작은 보이지 않는 속도의 파장이라는 조형적 특성을 가지며, 자연의 생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 또한 『초율』은 풀잎이라는 대상의 사실성보다 익명성이 중요시되고 있다. 거리의 많은 사람들처럼 풀잎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마치 풀잎이 아닌 익명의 사람처럼 보인다. 풀잎 하나 하나가 사람이 되어, 삶을 그리고 있다. 동일한 형태와 단색조의 풀잎은 익명의 인간이 되어 현실과 연결시키게 된다.
결과적으로 김호순의 근작 『초율』은 풀잎의 소박한 표현을 통해 자연을 표현하며, 삶을 이야기하게 된다. 화면에서 보여주는 단순한 형상과 구성은 또 다른 미적 질서의 조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마치 작가가 작품을 통해 꿈꾸는 것은 혼란과 절망이 아닌 고요와 평온함처럼 화면이 정리되어 있다. 순수의 균형과 조형적 질서, 이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한 색채와 단순화시킨 형태로 자연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 무엇보다 대상의 단순화로 반복된 모티브의 구성은 공간을 화장시키면서 음악성을 갖는다. 바람 소리처럼 들리는 풀잎들의 움직임과 상상의 소리들이 아름다운 화음을 맞추고 있다. 대상과 비대상의 차이를 극복한 자연의 표현은 그만의 독특한 조형언어로 탄생된다. 추상 공간과 형태의 단순화로 작가는 자연의 '있음'과 '생명'을 표현하면서 자연 속에 감춰진 근원과 질서를 찾아 나서고 있는 것이다. ● 여기서 우리는 근작 『초율』 연작은 대상의 단순 묘사나 시각적 즐거움으로 그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자연주의가 갖는 모방의 문제에서 벗어나 자연과의 대화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있다. 절대적 형태로 초월적 공간을 탄생시켰던 모더니즘 화가들처럼 그 역시, 작은 화폭을 통해 미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한다. 이처럼 김호순의 풀잎에 그려진 자연과 대화는 고요와 평온한 느낌 속에서 정신적 삶의 풍요로움으로 비쳐지고 있다. ■ 유재길
Vol.20031209a | 김호순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