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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1201_월요일_06:00pm
홍대앞 쌤쌤쌈지회관 서울 마포구 창전동 436-7번지 성산빌딩 B1 Tel. 02_3142_8571
펩시맨, 스파이더 맨. 코브라, 공룡, 원피스 만화의 루피, 바벨 2세 만화의 자이언트 로봇, 데블맨... ● 이들이 현실에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 꿈속에선 분명 존재한다. 이들을 통해, 어린 시절의 나는 웃음을 얻었고, 열광을 배웠다. 어른이 돼서도, 나는 이들을 통해 내가 꾸지 못한 꿈을 꾸는 걸까? ● 이들과 내가 만난 건 도쿄에 흔한 가게에서였다. 99년 3월 난 도쿄로 떠났다. 좀 더 사진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어서였다. 그때 이들은 도쿄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게에서 흔한 모습으로 과자 속에 들어있었다. 과자를 하나 살 때마다, 같이 따라오는 스파이더맨, 데블맨, 코브라... 펩시맨은 펩시콜라 병뚜껑 옆에 붙어있었다. 마치 그게 펩시콜라를 지키는 길이라도 하다는 듯이. ● 지금 우리나라에도 인형을 모으는 매니아들이 있다. 하지만, 일본은 그 시장부터 거대하다. 과자 회사가 과자봉지에 인형을 넣은 게 아니라, 거꾸로다. 장난감 회사가 과자를 만들었다. 장난감 부록으로? 『반다이』라는 장난감 회사는 많은 과자를 만들어 팔았다. 우리로 치면 뽀빠이 별사탕 같은 군것질류다. 거기엔 꼭 그 회사의 장난감들이 들어있다. 그들이 끼워주는 건 장난감이 아니라, 장난감에 과자를 끼워주는 격이다. 이런 과자들 가격은 200엔에서 300엔, 우리 돈으로 보면 2천원, 3천원이다.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다. 우리보다 훨씬 비싼 일본 물가를 생각하면, 우리 돈으로 봐선 한 천원쯤?
그렇게 도쿄에서 새롭게 사진 공부를 하면서 핀홀 사진에 눈떴다. 우연히 스즈카 유시아스의 사진을 본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교토 조형예술대 교수로 유명한 사진가인 그는 사진 전문가들이 흔히 쓰는 카메라를 쓰지 않는다. 그는 핀홀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최첨단 카메라의 본고장 도쿄에서 그는 최신 니콘, 캐논 카메라를 모두 두고, 렌즈 보드에 원시적이게도 사람 손으로 구멍을 퐁 뚫어 쓰는 핀홀 카메라로 자신만의 사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가 찍은 건 단순했다. 우리가 너무나 많이 보는 바다. 바로 바다였다. 그러나 그가 찍은 바다는 내가 아는 바다가 아니었다. 그 바다는 마치 유치환이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바위처럼 끄덕하지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라고 구멍 뚫린 가슴으로 조언을 구하던 그 파도가 숨어있는 바다 같았다. 그건 정말로 스즈카 유시아스의 바다였다. ● 핀홀 사진과의 만남은 또 찾아왔다. 도쿄에 있으면서도 간간이 서울에서 콜한 패션 사진을 찍는 일을 하던 내가 촬영차 어느 인테리어샵에 촬영 갔을 때였다. 거기 있던 소품 중에 독특한 사진을 발견했다. 5×7 사이즈에 작은 사진이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크기. 독일 어느 작가가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그것도 핀홀 사진이었다. 거기서 또 다른 매력을 만났다. 뭔가 미묘한 필 같은 걸 받았다고나 할까? 나는 그렇게 핀홀 사진과 사랑에 빠졌다.
핀홀 카메라는 렌즈 보드에다 구멍을 뚫어 쓴다. 카메라엔 보통 렌즈가 달려있고, 그 렌즈 조리개 크기가 정해져 있다. 그리고 셔터를 누르면 조리개가 저절로 열렸다가 닫힌다. 하지만 핀홀 카메라는 이런 첨단 테크놀로지를 거부한다. 렌즈보드에 수백만 원 하는 렌즈가 달려있는 게 아니라, 그저 렌즈 보드가 있다. 사진가는 여기에 원하는 크기의 구멍을 뚫는다. 바늘 같은 핀으로. 그래서 핀홀이다. 그건 기껏해야 검지로 충분히 가려질 만한 크기다. 따라서 손가락이 셔터다. 렌즈가 돼버린 바늘구멍을 손가락으로 막고 있다가, 찍고 싶은 풍경 앞에서 손가락을 잠시 뗀다. 그럼 그 작은 구멍은 세상의 모든 빛을 빨아들일 듯이 삼키기 시작한다. 그건 1초일 수도 있고, 5초일 수도 있고, 5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그건 사진가의 의지다. 내가 원하는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에 내 손가락은 핀홀을 막아버린다. 그것이 바로 필름에 담긴 피사체의 끝이다. 내 손가락이 바로 조리개 노릇을 하는 게, 바로 핀홀 카메라다. ● 카메라엔 초점 기능이 있다. 사진가는 렌즈를 움직여 앞에 물건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고 뒤에 물건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초점이 맞지 않은 공간은 뿌옇게 날아간다. 카메라는 그렇게 확실하게 물건들을 사람들을 차별한다. 그는 하나에 주목하지 모든 걸 주목하지 않는다. 마치 세상과 같다. 그러나 핀홀 카메라는 그 무엇도 차별하지 않는다. 핀홀 카메라는 찍는 이 맘대로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뚫어지게 바라볼 권리가 사진가에겐 없다. 핀홀 자기 앞에 펼쳐진 모든 것을 그대로 흡수한다. 펼쳐진 빛의 크기만큼, 펼쳐진 모든 것을 담는다. 바로 앞에 놓인 물건만 바라보지 않고, 저 뒤에 있는 조연들까지 영상으로 담는다. 바로 코앞부터 저 뒤에까지 세세하게 바라본다. 핀홀은 피사체를 차별하지 않는다. ● 그렇게 깨지기도 하고 독려도 받으며 도쿄에 있던 2년 내내 대학원 수업과 별도로 나만의 핀홀 사진을 찍었다. 처음엔 풍경만 찍었다. 핀홀 카메라로 찍은 풍경은, 액자 속에서나 비행기 기내 잡지에서 흔히 마주치는 풍경과 달랐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집에서 우두커니 있는데, 책상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장난감들이 눈에 들어왔다. 펩시맨, 공룡, 스파이더맨, 바벨2세... 본래 과자에 딸려오던 장난감을 재미 삼아 모으고 있던 것들도 있었고, 일부러 고르고 골라서 픽업돼온 치들도 있었다. 어릴 때 보았던 공상 속의 영웅들과 도쿄에 와서 발견한 새 친구가 뒤엉켜 있었다. 문득 그들을 찍고 싶었다. 사진 찍는 이의 본능 같은 걸까? 이들을 보고 있자니,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내게 어린이의 순수함이나 동심이 아직 남아서일까? 그들을 찍으면 재밌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찍으면서 즐거웠다. ● 이 만화 속 영웅들은 어린시절이나 다 자란 지금이나 우리에겐 꿈이다. 어려선 정말로 그들이 어딘가에서 짠하고 나타나 악당들을 물리쳐줄 거라 생각했다. 어른이 된 지금,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니지만, 가슴 한구석에선 그들이 어딘가에서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다. 누구나 영웅을 꿈꾸지만, 누구도 영웅이 될 수 없는 이 도시에서, 나는 사진으로나마 이들의 꿈을 눈앞에서 보고 싶었다. 이들은 만화가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악당을 무찌르고, 나는 그걸 사진으로 찍었다. 사진을 찍으며, 나는 현실 속에서 그들의 활약을 봤다. 이 즐거움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다. ■ 김상덕
Vol.20031130b | 김상덕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