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조각과 그 밑그림

김종영 조각展   2003_1128 ▶ 2004_0425 / 월요일 휴관

김종영_Work78-16_돌_28×17×5cm_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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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1128_금요일_05:00pm

김종영미술관 서울 종로구 평창동 453-2번지 Tel. 02_3217_6484

사유의 지속성-김종영의 조각과 에스키스 ● 1. 『김종영의 조각과 에스키스』전은 완성된 조각 작품과 그것을 위한 초벌단계로서의 드로잉을 같이 보여주는 자리다. 한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구상단계와 퇴고의 과정이 완성된 작품과 나란히 놓임으로써 작품을 이해하는데 더 없이 좋은 기회로 보인다. ● 에스키스(esquisse)란 불어로 사전적 의미로는 초벌그림, 소묘, 스케치 등으로 나와 있다. 유사한 개념으로 드로잉(Drawing)이 있는데 불어의 데생(Dessin)에 해당되는 것으로 역시 소묘, 도안, 설계 등 초벌단계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렇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작업상에 적용될 때 에스키스는 좁은 의미의 초벌그림, 밑그림에 해당되고 드로잉은 그린다는 행위전체를 아우른 넓은 의미로 사용될 때가 많다. 에스키스가 완성된 작품과 연계되는 일종의 연작개념에 수렴되는 반면, 드로잉은 반드시 완성된 작품과 연계되지 않는 그 자체로서 독립되는 경우가 많다. ● 70년대 후반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드로잉에 대한 관심은 드로잉의 영역을 상당히 폭넓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지금까지 생각해오던 좁은 의미의 소묘의 영역을 벗어나 모든 기술(記述)을 드로잉의 범주 속에 넣고 있다. 미술가가 그리는 소묘 외에 작곡가가 오선지 위에 메모한 구상-콩나물- 스케치나 건축가의 설계메모 등 속이 다 드로잉으로 포괄되었다. 그러니까 드로잉은 작품의 완성을 위한 단순한 준비단계에 국한되지 않는 모든 창작가의 일종의 사유의 메모로서의 기록성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널리 인식되기에 이른 것이다. 반드시 밑그림이 아닌 그 자체로 독립될 수 있는 여지가 여기서 비롯된다. ● 드로잉이 그린다는 행위자체의 순수성을 강조한 것은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전반에 걸쳐 풍미한 개념예술, 미니멀리즘에 대한 강한 도전의식의 결과였다. 그리지 않는 개념의 자립성이나 최소한, 극소한의 표현을 지향한 미니멀리즘에 대한 반발이 다시 그리기의 제고(提高)로 이어졌으며 그것이 드로잉에 대한 폭넓은 인식을 낳은 것이다.

김종영_Drawing_종이에 먹과 펜_35×24.5cm_1977

그리기의 회복은 어떤 대상을 묘사한다는 지금까지의 목적론적인 그리기에만 국한되지 않고 그린다는 행위자체에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서 완성에 앞서 진행의 순수성을 강조한 것이다. 결과로서의 작품이 갖는 유물성보다 진행자체의 정신적 불꽃이 실은 작품에 우선한다는 관념이 전반적으로 강하게 대두됨으로써 드로잉은 생생한 정신의 편린으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드로잉은 언제나 진행으로서 생생한 현재에 머문 것으로 이해되었다. 많은 드로잉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지속으로서의 창조적 순간을 경험하려는 의식의 반영에 다름 아니기도 하다. ● 한 작품을 위해 일정의 에스키스(또는 드로잉)를 하는 작가가 있고 전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바로 제작에 임하는 작가가 있다. 어느 쪽이 바람직하다든지 바람직하지 않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다. 작가의 성향에 따른 문제이고 작품의 제작성향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을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과거의 작가들에 비해 현대로 오면서 에스키스(또는 드로잉)를 하는 작가들이 줄어들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만큼 작품의 성향이 준비단계란 항목을 거치지 않은 채 바로 제작에 임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준비단계 자체가 직접적인 제작의 수순에 수렴되어지는 경우가 그만큼 늘어났다고 할까. ● 예컨대, 수영을 배운다고 하자. 물에 들어가는 방법, 팔, 다리 움직이는 방법 등을 수업한 후 최종적으로 물 위에 떠가는 일련의 훈련을 거치는 것이 수영법의 터득인데, 모택동식의 『수영을 하면서 수영을 배워라』는 방법도 있는 것이다. 일정한 예비단계를 거치지 않은 채 물에 뛰어 들어가 허우적거리면서 방법을 터득한다는 것이다. 예비단계가 이미 직접의 과정 속에 수렴되어진 상태이다. 예비과정을 지니는 경우는 철저한 방법적 퇴고를 지칭하는 것이고 예비과정을 뛰어넘어 바로 제작에 들어가는 경우는 방법적 퇴고를 제작의 진행상태에서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비단계를 거치지 않는 경우가 예비단계를 거치는 경우보다 훨씬 위험부담을 안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수영을 전혀 못하는 사람이 바로 물 속에 뛰어들어 허우적거리게 되면, 스스로 수영법을 빨리 터득하게도 되지만 동시에 빠져 죽을 확률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상당한 모험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조심성 있는 사람이면 충분한 예비단계를 거치는 방법을 택할 것이다. 기초적인 예비과정을 거쳐 점진적으로 숙달된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 합리적이요 그만큼 물에 빠져 죽을 염려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경우에도 이를 적용시켜 볼 수 있다. 철저하게 준비단계를 지니는 작가의 경우, 진행이나 완성도에 있어 무리가 없고 안정감을 주는 반면, 준비단계를 거치지 않은 채 바로 제작에 들어가는 경우는 긴장이 동반되는 만큼 불안감을 주는 예가 적지 않다.

김종영_Work81-6_나무_30×21×13cm_1981
김종영_Drawing_종이에 먹과 펜_24.5×35cm_1970년대

2. 우리 현대미술에서 특히 에스키스(또는 드로잉)를 많이 한 작가들로 서양화에 김환기, 동양화에 이응로, 그리고 조각에 김종영을 들 수 있다. 이들에서 공통되는 점은 동년배의 작가들보다 작품 양에 있어 단연 앞서 있다는 것이다. 에스키스(또는 드로잉)를 많이 한 작가들이 하필 많은 작품을 남기게 된 요인은 무엇인가? 는 참으로 흥미로운 단서가 아닐 수 없다. 많은 에스키스(또는 드로잉)가 그대로 작품으로 이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 김환기는 그 제자들에게 손장난으로서 드로잉을 많이 할 것을 독려하였다. 실지로 본인도 엄청난 드로잉을 했다. 한 작품을 위한 에스키스가 수 십 점을 상회하는 것이 예사다. 이응로는 잠시도 손을 쉬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남긴 드로잉도 엄청난 양에 이른다. 조각가 김종영이 이들 못지 않게 드로잉을 남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의 가족이나 가까운 제자들만 알 뿐 밖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필자 역시 김종영이 드로잉을 즐겨 한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전시를 통해 여러 차례 대한 적은 있었지만 현재 김종영미술관에 수장되어 있는 드로잉이 자그마치 2,900여점에 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조각가로서 이렇게 많은 드로잉을 남긴 작가가 또 있을까. ● 대체로 김종영의 스케치북에 담겨 있는 드로잉은 구체적인 작품을 위한 밑그림으로서의 에스키스에 해당되는 것과 순수한 소묘나 스케치에 머문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소묘나 스케치는 인물드로잉, 풍경드로잉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들 드로잉은 구체적인 작품을 위한 초벌단계라기 보다 그 자체로 독립되는 것들이다. 인물드로잉은 유연한 선감으로 대상을 파고드는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이 같은 표현상의 특징은 대상을 평면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볼륨이나 매스로 파악해 들어가게 함으로써 입체로의 단계를 암시해주고 있다. 화가가 그린 드로잉과 다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 인물의 대상은 자신을 포함한 가족과 주변 인물들이다. 주변인물의 드로잉이 다수를 이룬다는 것은 관찰자로서의 의식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변에 대한 관찰은 곧바로 자신에의 성찰로 이어지는데 자화상을 적지 않게 그렸다는 사실이 이를 시사한다. 밖으로 향한 눈이 안으로 향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자의식의 발로가 자화상으로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 김종영의 드로잉은 40년대부터 시작되는데 그 내용은 앞서 지적한 바대로 소묘로서의 드로잉과 작품의 준비단계, 퇴고 과정으로서의 에스키스로 대별된다. 40, 50년대가 주로 주변인물을 드로잉한 것, 주변 풍경을 드로잉한 것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반면, 60년대 이후는 작품을 위한 초벌단계와 퇴고과정으로서 에스키스가 상회됨을 엿볼 수 있다. 어쩌면 이와 같은 변화의 추이는 인물 중심의 조각에서 점차 추상으로의 진입과 연관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50년대 후반부터 추상조각이 시도되는데 이에 따른 에스키스가 단순한 드로잉을 앞질러 나타나고 있음은 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김종영_Unititled_돌_22×26×11cm_1970년대
김종영_Drawing_종이에 먹과 펜_24.5×34cm_1977

3. 김종영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조각가인 김복진에 이은 후속 세대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와 비슷한 세대로 윤승욱, 이국전, 조규봉, 김경승, 윤효중을 들 수 있는데, 윤승욱은 6.25 동란 중 행불되었고, 이국전, 조규봉은 월북하였다. 남쪽에 남아난 이는 김종영을 비롯해 김경승, 윤효중 세 사람이었다. 한국현대조각은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종영은 서울대에서, 김경승은 이화여대에서(나중에 홍대로 옮김), 윤효중은 홍익대에서 후진을 길렀다. 이들의 작가적 태도나 제작의 방법은 그대로 후진들에게 이어져 각기 독특한 맥락을 형성시키기에 이르렀다. ● 김종영은 선비적 기질의 차분함과 아울러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 충실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외향적이기 보다 내향적이었다. 자신에 충실한 그의 작가적 면모가 그가 남긴 엄청난 양의 드로잉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과묵한 성품과 자신에 충실하려는 태도는 자연 밖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 은둔에 가까운 생활방식을 낳게 하였다. 그가 특히 유배생활 속에서 참다운 예술을 꽃피운 추사 김정희를 흠모했다는 것도 그의 은둔에 가까운 생활과 깊게 관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최종태도 이 점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김종영 선생의 은둔적 삶의 모습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러고 저러고들 말이 있지만 내가 보기로는 추사선생을 흠모한 데에 상관이 있으리라고 믿어진다.』(최종태, 『회상 나의 스승 김종영』, 가나아트, 1999, p.26) ● 추사와 김종영을 관계 지우는 것 가운데 또 하나는 서예다. 김종영은 드로잉에 못지 않게 많은 서예작품도 하였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선비적 기질을 지녔다 함은 단순한 그의 삶의 방식이나 태도에서만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선비들이 지녔던 교양으로서 서화를 체득하고 있음에서다. 지난번 김종영미술관이 개관전을 꾸몄을 때 조각 작품과 드로잉 외에 서예작품과 서예에 관한 도구들이 한자리에 진열되었었다. 현대조각가가 전통적 예술세계와 그 매재에 깊숙이 빠져 있었다는 것은 가히 불가해한 일면으로도 읽힌다. 어쩌면 그는 현대조각가이기에 앞서 조선조 선비의 의식을 지녔고 현대 조형의 앞장에 서가면서도 언제나 전통에 대해 깊은 성찰을 늦추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의 의식의 길항(拮抗) 속에서 꼿꼿이 자신을 가눈 보기 드문 예술가의 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최종태는 추사 김정희와 김종영을 비교하고 있다. 『김종영 선생의 행적을 보면 여러모로 보아서 조선시대 선비의 본보기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속에서도 또한 그의 예술과 거기에 따른 생각은 너무나도 현대적인 데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중략- 한국과 동양의 사상에 깊이 뿌리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새로운 문화정신을 수용함에 있어서는 또한 전혀 별개의 사람인 것처럼 양면성이 있는 것이다. 완당(김정희)을 일러 일각에서 사대적인 면에서 지나치다 한 것과 김종영 선생의 대담한 서구예술 수용의 문제에 대해서 비교해 보면 어떤 연관이 있다고 보여지는 일면이 있다. 전통을 고수하는 문제와 새로운 문명에로 뛰어드는 태도의 문제인데 그런 점에서 선생은 완당과 많이 닮아 있다.』(최종태, 앞의 책, p.31) ● 여기서 새로운 문명에로 뛰어드는 태도라 함은 김종영이 일찍이 추상조각을 시도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56년에 한국 미협전에 출품된 「추억」(석고)은 현재 알려진 추상조각으로 가장 상회하는 것이다. 그것도 인체 모델링에서 점차적으로 추상으로 이동해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충격적이라 할 수 있는 순수한 공간창조였다. 그리고 58년에 잇따라 나온 「전설」을 비롯한 일련의 철조가 대담한 구성의 작품으로 이미 철조의 붐은 이들 작품에서 예고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설」에 보이는 용접의 방법과 설화적 내용성은 이후 용접 철조에 나타나는 시대적 의식과 견인되면서 한 시대 조각의 커다란 물결을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 한국과 동양사상을 깊게 체득하고 있는 선비적 기질의 작가가 어떻게 가장 첨단적인 서구의 새로운 물결을 대담하게 수용할 수 있었는가는, 추사가 전통적인 소양을 바탕으로 하면서 중국의 새로운 예술세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태도와 상통됨을 최종태는 지적하고 있다. 어쩌면 이는 내 것에 자족할 것이 아니라 나를 대담하게 박차고 나옴으로써 고양된 나를 만날 수 있다는 논리의 실천이 아닐까. 새로운 것, 서구적인 것과의 끊임없는 길항 속에서 마침내 정련된 자신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로서 말이다. 김종영과 오랜 교분을 쌓았던 박갑성은 이 같은 김종영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고 있다. 『전통적인 서구사상의 핵심을 소화시키고 그 보편적인 형이상학적인 원리 속에 동양적인 전통을 살과 피로 자연스럽게 종합시켰다.』(박갑성, 앞의 책, p.151)

김종영_Work70-3_돌_7×22×19cm_1970
김종영_Drawing_종이에 먹과 펜_38×53cm_1976

4. 전통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의 양면성을 조화시키고 있음은 그의 조각에 나타나는 유기적인 포름과 기하학적, 구조적 포름의 양면성을 조화시킴에서도 엿 볼 수 있다. 김종영의 조각은 인체의 발전적 변형으로서의 유기적인 형태와 엄격한 형태에의 환원으로서 구조적, 구축적인 형태로 나누어진다. 『50년대 말까지 김종영 선생의 작품은 「추억」, 「전설」 등으로 대표되는 공간적 구성의 탐구가 한 때 되다가 점차 양괴의 문제로 다시 환원되고 있는 과정을 볼 수 있다.』(최종태, 앞의 책, p.39) 고 한 지적처럼 모델링 중심의 조각에서 탈피, 대담한 공간구성의 추상으로 진입했다가 다시 양괴 중심의 추상조각으로 환원되고 있다. 「추억」, 「전설」등 공간구성의 작품이 격렬한 제스처와 표현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됨을 파악할 수 있는데 이는 아마도 50년대 후반 풍미한 뜨거운 추상미술과의 어떤 관계가 있지 않나 유추된다. 50년대 후반 밀어닥친 뜨거운 추상미술의 물결은 한국 미술전반을 뒤덮는 노도와 같은 것으로 기억된다. 이 같은 시대의 미의식은 단순한 어느 영역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보편적 유대를 형성해준 것이 되었다. 김종영도 같은 시대의 공기를 호흡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것에 대한 과감한 수용은 그로 하여금 추상표현의 조각적 전개를 가능하게 하였다. ● 60년대에 들어오면서 양괴 중심의 인물 조각을 한 동안 시도하다가 곧 인체의 발전적 형상으로서의 추상에로 나아가고 있다. 50년대 공간적 추상작품이 주로 철재에 의한 것인 반면, 60년대로 오면서는 나무와 돌(대리석)이 중심 매재로 떠오르고 있다. 이후 만년에 이르기까지 그가 주로 다룬 것은 목조와 석조로 압축된다. 많은 조각가들이 전통적인 매재로서의 나무와 돌보다 철조나 기타 화학적인 매재에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 오늘의 추세다. 목조와 석조는 매재의 원시성 뿐 아니라 방법에 있어서도 가장 본원적이라 할 수 있는 깎고, 쪼는 작업에 지탱된다. 다른 재료에 비해 나무와 돌이 가장 순수하게 자체의 질료를 현전시킨다는 점에서 작가와 재료와의 관계는 보다 직접적이랄 수 있다. 김종영이 나무와 돌을 두 매재로 선호했다는 것은 어쩌면 재료와의 만남이 이루는 이 직접성에 기인되는지도 모른다. 다른 매재가 이차적인 수단이 그 만큼 동원되는 반면, 목조와 석조는 처음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작가와의 지속적인 만남을 유지할 수 있다. 말하자면 제작의 지속성이 다른 매재(媒材)에 비해 단연 앞선다. 지속성이 두드러진 매재에 오랫동안 매달렸다는 것은 어쩌면 완성보다는 과정자체를 즐김에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작품을 위한 밑그림으로서의 에스키스가 많다는 것도 이 과정으로서의 지속성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김종영_Work78-20_나무_26×32×62cm_1978
김종영_Drawing_종이에 먹과 펜_34×24.5cm_1977

김종영의 목조와 석조는 가능한 한 매재가 지니는 질료를 그대로 드러내려는 특징을 보인다. 나무는 나무로서의 본래적인 질료를, 돌은 돌로서의 본래적인 질료를 분명히 드러내 보인다. 그것은 어떤 명제를 앞질러 나무로서, 돌로서 나타난다. 이는 매재를 자신의 이념에 동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매재에 순응하는 태도의 결정물임을 뜻한다. 나무는 식물성이란 점에서 연성에 가깝고, 돌은 이미 응고된 무기질이란 점에서 견성에 속한다. 이들은 다같이 밖에서 깎거나 쪼아 들어간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물질적 성향은 퍽 대비적이다. 나무는 돌에 비해 훨씬 부드럽고 풋풋한 내성을 반영하는 반면, 돌은 차가우면서도 견고한 응집성을 지닌다. 나무는 밖으로 뻗는 구조적 속성을 지니는 반면, 돌은 안으로 응고되는 구조적 특징을 드러낸다. 형태의 조성에 있어 이 같은 속성이 필연적으로 반영될 수밖에 없다. 김종영의 목조가 갖는 보편적 형태의 특징은 자라나는 구조와 결구(結構)의 조성이다. 그의 목조 가운데는 마치 자라나는 식물을 연상케 하는 것이 있다. 위로 뻗어 오르는 수직적인 형태에 팽창과 수축이 반복됨으로서 마치 나무가 자라면서 부분 부분에 옹이를 만드는 것을 방불 시키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돌 속에 잠자고 있는 형태를 일깨운다고 했는데, 김종영의 방법은 물질 속에 내재하는 생명의 율조를 조금씩 환기시켜 외재화(外在化)하는 것에 비유된다. 마치 작은 씨앗이 싹터 잠자고 있던 내부의 생명을 조금씩 밖으로 밀어내는 것으로서 말이다. 외재화되는 형태는 안의 리듬의 결정체에 다름 아니다. 생명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잉태된다. ● 형태가 안으로부터 잉태된다는 것은 형태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그의 형태는 무리가 없다. 마치 나무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지게끔 놓아둔다고 할까. 이 자연스러움은 나무를 더욱 나무답게, 돌을 더욱 돌답게 태어나게 하는 요체이기도 하다. ● 나무는 자라나는 속성을 지닌 식물이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가지를 벌린다. 그러기에 나무속에는 그것이 자라는 시간의 태가 기록되어 있다. 목조로 사용되는 나무는 비록 죽은 나무이지만 생명체로서 나무의 역사를 온 몸에 아로새기고 있다. 작가는 나무가 지닌 세월의 결을 최대로 살리면서 외형을 다듬는다. 그러기에 나무는 목조로서 태어나는 형태이기 이전에 나무로서 현전(現前)한다. 이 점은 다른 미술장르와 확연히 다른 조각 고유의 속성에 다름 아니기도 하다. 예컨대, 유채로 인물이나 정물을 그린다고 하자. 화면에 나타나는 것은 유채의 질료를 앞질러 인물이나 정물이 현전한다. 그러나 조각은 인물이나 또 다른 형태를 나타내는 것임에도 인물이나 또 다른 형태를 앞질러 그것이 나무이면 나무, 돌이면 돌이 먼저 현전한다. 그러기에, 조각을 말할 때 어떤 대상보다 목조냐 석조냐는 식의 재료를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각은 회화에 비해 대단히 실질적인 한 유물론적이다. 유채화에 있어 질료인 유채는 수단으로서의 매재에 지나지 않는 반면, 목조나 석조는 그 자체가 목적으로서의 매재로 나타난다. ● 김종영의 목조가 나무다움을 현전시키는 만큼 그의 매재는 가장 자신에 충실한 것으로 반영된다. 나무가 자라나는 속성을 지닌 질료인 반면, 돌은 이미 응고된 무기질이다. 나무가 생성의 질료에 따르는 내재적 질서가 있는 반면, 돌은 오히려 가공의 내구력이 요청되는 물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돌에도 그것의 형성의 결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며, 때로 그 결을 쫓아 형상을 유도하는 경우도 있지만 나무에 비해서는 안으로의 잉태보다 밖에서 가하는 촉매에 의해 상형화되는 경우가 많다. 목조가 때론 유기적, 때론 구조적인 질서의 상형으로 나타나는데 비해 석조는 대체로 유기적인 볼륨 중심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목조와 석조가 같은 구조적 특징을 나타내는 경우다. 이야말로, 질료에의 순응보다 작가의 형성의 의지가 두드러지게 구현된 예가 아닌가 생각된다. 어쩌면 이 같은 의도는 유기적 포름과 구조적 포름을 융화하려는 그 나름의 시도로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전통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의 양면성을 조화시키고 있듯이 말이다.

김종영_Work76-12_나무_58×27×26cm_1976
김종영_Drawing_종이에 펜과 수채_34×25cm_1970년대

5. 전반적으로 김종영의 조각은 견고하면서도 단순한 형태로 나타나는 일반성을 지니고 있다. 모든 형태는 스스로 견고함과 단순함을 내재한다. 이 점에 있어 그의 조각은 환원적이다. 본질에로의 환원이다. 본질이란 무엇인가. 마치 안이 꽉 차있는 열매 같은 것이다. 김종영의 조각은 안이 꽉 차 있는, 영그는 형태라고 비유할 수 있다. 어쩌면 그가 나무 앞에서, 돌 앞에서 오랫동안 기다린 것은 다름 아닌 이 속이 차 있는 형태의 잉태가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김종영의 조각은 연작의 개념보다 하나하나 완벽한 자기완성을 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남긴 많은 에스키스도 이 완벽한 자기완성을 위한 사고의 정비였을 것이다. ● 나무는 그 본래적 생성의 형상을 돌은 안으로 잠겨드는 태고의 침잠을 드러내려는데 그는 오랜 시간을 두고 기다린 것이 아니었을까.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무 앞에서, 돌 앞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무를 통해, 돌을 통해 사유하는 것이 아닐까. 나무를 깎거나 돌을 쪼는 일이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나무를 통해, 돌을 통해 사유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유형의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일면을 드러낸다. 많은 드로잉과 에스키스가 있지만 이것들이 다 작품으로 구현되지는 않았다. 그는 완성을 향해서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그러기에 완성을 향한 준비와 단계는 많았지만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아니 어쩌면, 김종영은 유물적인 존재로서의 완성에 앞서 사유의 지속성을 유지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완성한다는 것은 이미 유물적인 존재 속으로 사유가 막음된다는 것이다. 정신의 불꽃으로서 생생한 사유를 어떻게 하면 더욱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을까. 그것이 수많은 드로잉(또는 에스키스)으로 남아난 것은 아닐까. ■ 오광수

Vol.20031128b | 김종영:조각과 그 밑그림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