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속

임춘희展 / IMCHUNHEE / 林春熙 / painting   2003_1126 ▶ 2003_1202

임춘희_2003년 여름_종이에 펜, 잉크, 아크릴채색_29.5×29.5cm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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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03_1126_수요일_05:00pm

노암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82.(0)2.720.2235

임춘희의 그림세계 ● 흔히 그림이란 거울과 같다고, 눈에 보이는 세계를 재현하는, 현실을 복사하는 매체라고 여겨져 왔다. 이런 전통적 견해를 반박하면서 1922년에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set)는 이렇게 말한다. "본다는 것은 거리를 두는 행위이다. 모든 예술은 사물들과 거리를 두는, 그것들을 변형시키는 투과장치를 가지고 있다. 예술의 마술화면 위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마치 닿을 수 없는 별들에 사는 주민들인 양, 우리로부터 무한히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다." 핵심을 찌르는 말이다. 물론 그림과 가시세계는 리얼리즘에서조차도 완벽하게 일치되지 않는다. 아무리 예술가들이 세계를 독특하게 "해석"하여 생소하게 만들더라도, 어떠한 생소성도 세계인식과 인연을 맺고 있다.

임춘희_불면증_종이에 과슈, 오일파스텔_19×20.9cm_2003 임춘희_불면증_종이에 유채_12×8cm_1996

임춘희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열정적 개입과 당연한 부재사이의 진동, 내면세계의 반역적 표출, 이것이 임춘희의 그림이다. 임춘희에게는 초현실주의적인 모습들이, 그러나 매우 도발적인 색조로 드러나고 있다. 꿈의 영역으로부터, 내면세계의 정글로부터 저절로,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쏟아져 나오는 그림이다. ● 생소한 것, 정체불명의 것, 심층의 흐름은 형상들을 촉발한다. 임춘희는 형상들을 촉발하는 바로 이것들과 치열하게 대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생소성 또는 생소화를 항상 자신의 고유한 체온으로 덥히면서 주제로 삼고 있는데, 이것이 그녀의 작업에서 다가서기와 거리 두기를 그리하여 형상의 효과를 함께 규정하고 있다. 이로써 그녀는 생소성에 자신의 고유한 해석을 부여하고 있다. 생소한 것의 얼굴은 항상 고유한 해석들을 통하여 응시되고 있다. 어쩌면 생소한 것은 가면에 불과하고, 생소한 형상으로-그리하여 관찰가능하고 용인 가능한 형상으로-반사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빼어난 시각적 표현기술을 구사하고, 아무리 훌륭한 형상기호법을 사용하더라도, 근본적으로 형상색출작업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본질은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한 어떤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개인의(생소한) 경험, 그림이나 말로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는 체험의 윤곽선을 더듬어보는 일인지도, 형상들의 비밀을 풀기 위하여 형상언어로 번역해 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형상들의 비밀을 풀기 위하여 형상언어로 번역해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형상언어는 체험의 밑바닥을 폭로해 주지도 않고, 복잡한 경험연관들을 단순화시켜 주지도 않고, 비밀의 열쇠도 제공해 주지 않는다.

임춘희_화산옆의 휴식_종이에 유채_23.5×31.7cm_2000

예술가의 의식을 잠시 들여다보자면, 실로 생소한 것은 우리 인간들의 일상행위 일상생활의 배경 또는 심층흐름이다. 거기에-때로는 갈망이 번득이고, 때로는 감정이 격동하고, 때로는 고통과 절망이 지배하고, 때로는 무시간성의 순간들이-시간의 무한한 연장이 있다. 임춘희의 그림은 감정의 중심을 겨냥하는 일이 많지만, 그러나 이것은 결코 노출증의 발로가 아니다. 그녀가 추구하는 것은 재현이지 자기전시가 아니다. 관람자가 보기에 거의 고통이 느껴지는 곳에서도 그녀는 가면성에 대한 성찰까지만 허용할 뿐, 가면 뒤의 얼굴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다. 관람자의 관음증을 허용하지 않는다. ● 자아의 작동방식, 그러나 트리스탕 코르비에르(Tristan Corbiere)가 지적하듯이,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보지 못할 것을 그려야만 하는 작동방식, 미지의 형상들, 내면적 형상들의 창고를 뒤지는 일은 그녀의 형상 색출작업의 중심요소이다.

임춘희_원숭이 인간_종이에 유채_49.7×34.7cm×2_1995

생소성, 문화적 거리 또는 (자신의 문화권 내에서는) 시간적 거리로서의 생소성, 이런 뜻으로 볼 때 생소성이란 거리와 대결하는 일, 몰이해 및 오해와 대결하는 일이다. 문제설정방식에 따라 공간적 근거리와 원거리는 똑같이 생소한 것으로 될 수도 있다. ● 친숙 속의 생소, 인간은 때로는 무미건조하고, 때로는 감정적 내지 공격적이고, 때로는 상처를 입힐 수도 있고, 때로는 상처를 입을 수도 있으며, 실제로 상처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임춘희의 작업을 보노라면 여러 가지 음향들을, 여러 가지 목소리들을 동시에 듣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녀의 그림 속에는 매우 독특한 공감각적 표현들이 들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업은 결코 설명조가 아니다.

임춘희_꼬리_화선지에 파스텔_62.8×32.8cm_2003 임춘희_숨고싶다_종이에 잉크_41.5×20.8cm_2003

생소성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행위동기들에 있다. 그녀가 표현하는 인물들은 소재지가 없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기억의 편린들에 붙들려 있는 듯이 보인다. 그녀의 인물들은, 내가 보기에, 한시도 현재 순간에, 그림 속에 붙들려 있지 않다. 한 장소에 있다가, 거기서 풀려나서 소용돌이에 휘말려 다른 장소로-시간적으로 보자면 이전일 수도 있고 이후일 수도 있는 곳으로-옮겨간다. ● 세계는 한 덩어리로 빚어진, 온전한 세계가 아니며, 이질적이고 다양한 요소들로 구성된 복합체이다. 때로는 벽돌과 담장으로, 때로는 초목으로 인간을 제압하고 압도하는 세계이다. 항상 모종의 잠재적 위험이 느껴진다. 항상 야만성-제어되지 않는 것과 제어될 수 없는 것-또는 한계, 금지가 있다. 무소재성이란 인물들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단단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느냐는 문제이다. 생소한 시선은 환각상들을 촉발시키고, 이에 따라 발덱(J. H. v. Waldegg)이 말하는-추측의 공간을 제공하고, 확실성보다는 짐작을 매개해 주는-동요하는 감각층들이 나타난다. 형태와 몸짓들은, 마치 전에 알고 있었는데 다시 잊어버리기나 한 듯이, 또는 지금은 모르지만 뒤에 알게 되듯이, 익숙하면서도 생소하다. 이처럼 상징구조들이 자신의 의미를 누설하는 동시에 비밀을 고수함으로써 재촉과 밀도가 더해진다. ● 알, 아이, 벽(남성)체형이 뷔아르네(Vuarnet)가 말하는 유사육체처럼, 되풀이 등장하고, 달의 상징이 거듭 등장한다. 달은 여성을 상징하지만, 그러나 낭만주의적 월야곡 또는 신화의 그것과는 다른 상징법으로 표현되고 있다.

임춘희_생각_나무판에 과슈_17.2×28cm_2002

역장(力場), 삶의 다양한 면모들의 전율, 그뿐만 아니라 "홀로 칼날 위에 서기", 상투적인 미(美)개념을 넘어서서 칼날 위에서 대결하기, 충격적 방식의 미학적 모험은 자칫하면 위험할 수도 있고 상처를 입힐 수도 있지만, 광대와 같은 역설적 유머를 띤 색상과 어우러져 화합하고 있다. 이런 미술적 표현은, 그림대상과 자아 사이의 관계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표피가 아니라 심층을 건드린다. 우스꽝스러움과 절망적 몸짓이 서로 맞닿을 듯 가깝게 놓여있다. 내면세계, 자기 성찰의 정글로부터 비롯되는 열병과 같은 꿈, 여성성에 대한 치열한 대결, 가족에 대한, 그리고 여성의 역할에 대한-정치적 이념이 무엇이든-대결, 육체기관, 균열, 증층, 뇌피질같은 평면, 이런 형상들을 통하여 사유의 부단한 나선운동이 표현되고 있다. 예술작업에 임하는 임춘희의 요구는 이렇다. "그림은 관람자에게 뭔가를 돌려줘야 한다." 이런 원칙에 따라 임춘희는 무의식의 자료실을 바닥까지 샅샅이 뒤져서 당혹스러움, 불안, 불확실성을 끄집어 내온다. 자아 속의 생소성, 자신과의 투쟁, 생소한(주변)세계와의 투쟁, 여성의 역할과의 투쟁, 모국의 문화와의 대결, 자신의 기성존재와의 대결, 자신의 피규정성과의 대결, 삶의 체험은 시각적 강박상태로 전환된 자아의 정글속에서, 삶의 미궁속에서, 출구를 찾는 투쟁으로 이해될 수 있다. ● 육체-그림, 영혼-그림, 기억-그림, 일상의식과 통념을 파헤쳐내는 정서의 기호들에는 언제나 또하나의 새로운 차원이, 그리고 삶의 미궁 또는 존재의 사막속에서 연출되는 끔찍한 장면들이 덧보태질 수 있다. 융(C. G. Jung)은 말한다. "자아의 상징들은 육체의 심연 속에서 생겨난다." 그림이란 대결이며, 시간의 망막바깥으로 떨어져 나온 파열된 의미를 정착시키는 작업이다. ■ 볼프강 헤거

Vol.20031125b | 임춘희展 / IMCHUNHEE / 林春熙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