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파장

이수정 회화展   2003_1120 ▶ 2004_0110

이수정_원.파장_캔버스에 유채, 대리석분_2003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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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1120_목요일_05:00pm

갤러리 세줄 서울 종로구 평창동 464-13번지 Tel. 02_391_9171

감성과 명상을 견인하는 의식의 통로 ● 이수정의 작품에서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단지 물료들의 뒤섞임이 자아내는 어떤 감성 자체를 느낄 뿐이다. 일견 그녀의 화면이 은연중에 모노크롬적 회화를 연상시키거나 미니멀리스트들의 텅 빈 캔버스와의 시각적 유사성을 보이고는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작품이 텅 빈 캔버스를 제시하는 모더니스트적인 것으로 회귀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공간이 작품제작과정과 내용의 관계를 주체적 지위에 두거나 캔버스와 질료의 일치를 구성하는 지점에 머무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업은 캔버스라는 물리적 실체의 조건위에서 자연의 이치나 동양철학을 끌어들여 작업의 알리바이를 찾아나간 선배 세대들의 연장선상에서 그 연관성의 가닥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미지가 끌어들일 수 없는 어떤 지점을 응시하고자 한다. 고급 추상 미술의 격과 감수성 위에 자신의 육체, 감성, 기질, 그리고 거의 마니아적 취향에 가까운 물료의 운용을 개입시킴으로서 독자적 '버전'을 개척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 새로운 버전의 단초는 '대리석가루'라는 독특한 재료를 물감과 섞어 캔버스에 흡착시키는 과정에서의 노동과 시간의 축적에서 찾게 된다.

이수정_원.파장_캔버스에 유채, 대리석분_2003_부분

이수정이 파리 유학시절 우연히 어떤 미술관에서 목격했던 백색 대리석 가루의 영롱하고 미세한 신비의 체험은 미술의 언어로서가 아니라 의식 밖의 통로를 매개할 수 있는 사유의 감성으로 다가왔고, 그녀는 그 체험을 화면위에서 기민하게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캔버스와 밀쳐지고 포옹하면서 화면과 물료와의 대립과 융화의 애절한 관계가 지속되면서 백색대리석 가루는 매끄러운 마티에르를 용인하게 되며 유화물감과 계속되는 중첩의 과정에서 결국 무엇을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화면에 직접 붙으면서 스스로 의미체로 생성되는 하나의 오브제가 된 것이다. ● 그러니까 그녀의 오브제로서의 대리석은 크레타의 기억에서 미켈란젤로의 역동적 힘의 원천의 분말까지가 압축된 영혼과 시간, 뼈대와 피부, 정신을 비벼 넣는 행위가 되며 대리석가루를 붙여나가는 그녀의 행위는 표상의 논리에 지배 되는 지적 탐구의 소산이라기보다 차라리 물(物)제작적 과정과 선택의 중간 지점을 명상하는 시적노동이 되는 셈이다. 그것은 분말의 분열자적 지식과 경험을 찾아 특이성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언급한 것처럼, '끊임없는 순회의 사유'를 지향하고 있다. 즉 무채색 색조의 배경화면과 원으로 기호화된 형상들이 매끄럽게 피부화된 둥근 빛을 형성하며 명확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은밀히 전송될 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실재와 표상의 집요한 각주들로부터 벗어나 자기언급을 최소화하는 안쪽의 파장이 길어 올려진다는 점이다. 그 지점이 '원? 파장'으로 명명된 이수정의 신작들이 공명해내는 내파로서, 작가와 화면의 내면에 스며드는 집약된 노동의 명상적 깊이를 드러내고 있는 부분인 것이다.

이수정_원.파장_캔버스에 유채, 대리석분_200×200cm_2003
이수정_원.파장_캔버스에 유채, 대리석분_200×200cm_2003

그렇게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의 경계를 왕래하며 존재의 순환 속에 놓여진 원들은 어떤 확고한 존재감을 증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녀의 원은 어떤 구체적 대상으로서의 명시성이 소거된, 오히려 물감과 안료와의 섞임과 붓질의 흔적과 얼룩에 불과한 모호함과 은밀함을 드러냄으로서 섬세한 감정적 동요를 경험하게 한다. 그러니까 뿌연 안개 같은 화면속의 수수께끼의 수상함 같은 난감함마저 주면서 아주 먼 과거의 대리석의 꿈의 견고함을 잉태한 채 아예 삭제명령을 기다리는 이미지의 욕망과 원초적 정서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표류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 그러한 미세한 파장의 울림이 증폭되는 곳에서 필자는 이수정의 여성으로서의 개인사적 체험과 사회적 관계성 속에서의 자아를 들여다보게도 된다. 즉 굳이 페미니즘의 명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녀가 고유한 언어를 축조하면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되묻고 이미지의 재현의 권력과 욕망들을 거세해나가면서 여성성에 기반한 정서적 프로토콜을 작동시켜나간 흔적들 말이다. 그것은 그녀가 원을 그려나가면서 기호 일반의 절대적 진리나 권위 혹은 상징성을 쫒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태동되기 이전의 것들을 자궁속에 잉태하는 것과 같은 잠재태, 혹은 가능태로서의 모성의 생명력을 다듬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람객이 보게 되는 이수정의 원들은 시선을 통해 우주의 질서나 근원에로의 소급과 같은 어떤 권력적 이데올로기로서 동공에 명확히 각인되는 상이 아니라 흔들리는 불완전한 암시나 흔적 혹은 부재, 잊혀진 기억들을 어루만져주는 섬세한 치유의 손길과도 같은 여성적 감수성을 견인하는 의식의 통로로 연결된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화면은 '소멸의 깊이'와 포옹하는 결핍의 치유로서 기능하게도 되는 것이다.

이수정_원.파장_캔버스에 유채, 대리석분_50×50cm_2003

이번 전시에서 1층과 2층에 나뉘어 전시장을 가득 메운 원들의 집합은 동일한 어떤 패턴을 구축하면서도 층별 연출의 차별화된 전시 기법에 의해 공간적, 개념적으로 상호 구분되는 두개의 장으로 설정된다. ● 1층 공간에서 십자가 형상으로 원들을 에워싼 네온 설치는 종교적 아우라를 발산하는 데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목격한 절대적 진리와 권위로서의 '믿음'의 허구와 위선 혹은 맹종의 허영의 뒤편을 폭로하는 장치로 기능하며 특정한 상황을 전개시키고 있다. 그리고 2층에서 펼쳐지는 원들의 총체적 집합들도 공간과 색채의 관계성이 상호 교류하는 다의적 에너지의 아우라를 '파장'으로 발산하며 명상과 감성으로서의 의미의 전의와 확장을 불러 모으고 있다. 그렇게 여성적 감성이 체화된 소멸의 비밀스러운 화면들은 대리석의 크레타적 시간대의 풍화의 잔흔들을 포옹하고 훑으면서 이미지의 건너편에 서서 밝음 속의 어두움의 봉인된 시간을 응시하고 있다. ■ 이원일

Vol.20031120a | 이수정 회화展

2025/01/01-03/30